기이하고 매혹적인 영혼의 단짝
현대 영화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비전을 가진 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요르고스 란티모스일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인간 본성의 어둡고 불편한 진실,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 그리고 자유의지의 한계를 탐구합니다. 종종 비현실적인 설정과 건조한 유머를 통해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관객에게 깊은 사유를 요구하죠. 란티모스의 초기작부터 <더 랍스터>, <킬링 디어>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 본능, 사회적 규범의 허상, 그리고 관계의 기형적인 모습을 집요하게 파헤쳐 왔습니다.
이러한 란티모스 감독의 기묘하고도 매혹적인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그의 ‘뮤즈’이자 ‘영혼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한 배우가 바로 엠마 스톤입니다.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인 그녀는 로맨틱 코미디부터 드라마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지만, 란티모스를 만나 그녀의 잠재력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폭발했습니다.
두 사람의 협업은 단순한 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넘어섭니다. 서로의 예술적 지향점을 깊이 존중하며 시너지를 창출하는 특별한 유대감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영화는 관객에게 불편함과 동시에 강렬한 매혹을 선사하며, 현대 사회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사유를 촉발하는 역할을 합니다.
서로를 알아본 영혼: 신뢰와 존중이 빚어낸 예술적 시너지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한 구체적인 일화는 베일에 싸여있지만, 란티모스 감독이 엠마 스톤과 “오랫동안 서로를 신뢰하는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 언급은, 첫 만남부터 깊은 신뢰와 편안함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엠마 스톤 역시 “요르고스 감독과 함께 작업할 때 정말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영화감독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그를 정말 존중하고 존경한다”고 말하며, 수직적 위계가 아닌 수평적인 동료애를 중시하는 그의 철학에 깊은 공감을 표했습니다.
란티모스 감독은 배우와 스태프 모두를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의 파격적인 작품 세계에서 배우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 ‘안전한 환경’과 ‘동등한 관계’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상호 신뢰와 존중은 <가여운 것들>에서 엠마 스톤이 단순히 주연 배우를 넘어 프로듀서로까지 참여하게 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으며, 이는 단순한 직업적 관계를 넘어선 예술적 파트너십의 심화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만남은 서로의 예술적 비전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필연적인 조우였습니다.
기이한 아름다움의 연대기:
엠마 스톤 x 요르고스 란티모스 협업 작품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 첫 장편 협업으로 예술적 공감대 형성
<블리트>(2022) - 실험적 단편을 통한 예술적 실험과 관계 심화
<가여운 것들>(2023) - 엠마 스톤의 프로듀서 참여로 협업의 정점을 이룸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2024) - 3개 캐릭터 연기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 과시
<부고니아>(2025 개봉 예정) - 한국 영화 리메이크로 새로운 도전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권력, 욕망, 그리고 인간 본성의 해부
두 사람의 첫 장편 협업인 <더 페이버릿>은 18세기 영국 앤 여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단순한 역사극의 외피를 벗고 권력의 무의식과 인간 본성의 동물적 욕망을 기괴하고 잔혹하게 드러냅니다. 영화는 ‘상처’, ‘거위’, ‘토끼’와 같은 상징들을 통해 권력의 본질과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구합니다. 인물들의 육체적 ‘상처’는 내면의 불안과 권력욕의 균열을 상징하며, 귀족들의 ‘거위 경주’는 국가를 논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유희에만 몰두하는 지배층의 위선을 풍자합니다. 앤 여왕의 방에 있는 수많은 ‘토끼’들은 그녀가 잃어버린 아이들이자, 통제 불가능한 권력의 속성과 끊임없이 치고 올라오는 새로운 세력을 암시하는 섬뜩한 알레고리입니다.
엠마 스톤이 연기한 ‘애비게일’은 신분 상승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골적인 욕망의 화신입니다. 순진한 모습으로 등장해 점차 교활한 본성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욕망과 생존 본능을 보여주는 란티모스 세계관의 전형적인 인물이죠. 란티모스 감독은 광각렌즈, 어안렌즈, 극도의 슬로우 모션 등 과감하고 왜곡된 연출을 통해 가까이서 본 권력의 외설성과 인물들의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더 페이버릿>은 란티모스 특유의 시각적 ‘왜곡’을 통해 권력의 본질이 얼마나 추하고 동물적인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메시지를 던지며, 엠마 스톤은 그 세계의 가장 완벽한 구현자임을 증명했습니다.
<가여운 것들>(2023)
자유를 향한 벨라의 여정, 그리고 시스템의 조소
협업의 정점을 이룬 <가여운 것들>은 인간 성장, 자유의지, 사회적 통념에 대한 깊이 있는 인문학적 고찰을 담고 있습니다. 죽은 여성의 몸에 아기의 뇌를 이식해 되살아난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는 세상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안고 탐험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녀의 여정은 ‘인간의 감정이나 도덕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배워나가는 과정이며, 이는 기존의 도덕적, 사회적 통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엠마 스톤은 벨라의 순수하고 원초적인 상태부터 지적, 감정적, 성적으로 각성하는 전 과정을 파격적이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녀의 연기는 마치 “이 영화를 위해 다시 창조된 진짜 피조물” 같다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벨라의 성적 탐험은 억압된 여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동시에,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야 하는 실존적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흥미롭게도 엠마 스톤은 벨라의 여정을 특정 성별 간의 대립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벨라가 어떤 식으로든 남성들과 맞서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이게 인생과 세상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그녀의 모든 경험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는 벨라의 탐험이 젠더 이슈를 넘어, 한 인간이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보편적인 성장 서사임을 시사합니다.
영화의 결말은 더욱 냉소적입니다. 모든 경험을 마치고 ‘창조자’의 위치에 서게 된 벨라는 또 다른 시스템을 재생산할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됩니다. 이는 자유를 얻은 개인이 결국 또 다른 시스템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제시하며,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에 대한 란티모스다운 비판적 질문으로 마무리됩니다.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2024)
부조리한 세상 속 인간의 몸부림
가장 최근작인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는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철학을 깊이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세상은 합리적이지 않다. 모든 나쁜 일과 좋은 일은 그냥 일어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무의미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헛된 몸부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세 개의 옴니버스 이야기 속에서 엠마 스톤은 각각 다른 세 캐릭터를 연기하며 다채로운 얼굴을 선보입니다. 영화는 ‘친절(Kindness)’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배신감, 죽이고 싶은 마음, 불편한 마음’ 등 인간 내면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들을 억압하고 완화하는 사회적 제어 기제임을 암시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위선적인 ‘친절’과 인간 본능의 억압에 대한 란티모스 감독의 냉소적 시선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어떤 이는 환상에 빠지고, 어떤 이는 맹목적인 믿음에 의지하는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며, 카뮈가 말한 ‘부조리를 대면한 채 살아가는 반항’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다가올 기이함: <부고니아>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이들의 다음 협업은 한국 영화계에도 큰 기대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2003년 개봉하여 컬트적인 인기를 끈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작, <부고니아>(2025)입니다. 원작이 가진 독특한 음모론적 서사와 기이함, 그리고 현실 비판의 요소는 란티모스 감독의 세계관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원작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피해의식을 가진 인물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란티모스 감독이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에서 다룬 ‘부조리’ 인식이 ‘음모론’이라는 형태로 발현될 때의 인간 심리와 사회적 파장을 더욱 깊이 파고들 것으로 보입니다. 엠마 스톤이 연기할 제약 회사 CEO 캐릭터가 과연 단순한 ‘피해자’일지, 아니면 현대 사회의 통제와 착취를 상징하는 또 다른 ‘시스템의 상징’일지에 따라 영화의 인문학적 메시지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부고니아>는 2025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와 경쟁하게 되네요.
(제82회 베니스 영화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
<부고니아>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2025년 10월 24일(미국) 또는 11월 7일(북미/한국)에 개봉할 예정입니다. CJ ENM이 국내 배급을 담당합니다.
<부고니아> 이후에도 그들의 협업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엠마 스톤이 프로듀서로까지 참여하며 작품 세계에 깊이 관여하는 만큼,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캐스팅을 넘어선 장기적인 예술적 파트너십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현대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엠마 스톤과 요르고스 란티모스. 이들의 협업은 현대 영화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깊이 있는 사유와 질문을 던질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권력의 본질, 인간의 욕망,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 자유의지의 한계, 존재의 의미와 같은 보편적인 인문학적 주제들을 기이하고도 독창적인 미학으로 풀어내며 관객에게 강렬한 지적 자극을 선사합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도발적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예술의 본질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서로의 한계를 확장시키는 완벽한 파트너십, 이 ‘영혼의 협업’이 앞으로 또 어떤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이야기로 우리의 안온한 세계를 뒤흔들지, 전 세계 영화 팬들은 숨죽여 그들의 다음 행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예술적 여정은 현대 영화의 지평을 끊임없이 넓혀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