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 유튜버의 성폭행 피해 고백을 듣고
‘경주 APEC 2025’의 성공적 개최로 한국은 다시 한번 ‘선진국의 꿈’을 이룬 듯했다. 하지만 APEC 직후, 한 여성 유튜버의 눈물로 범벅된 성폭행 피해 고백 영상이 이내 나의 알고리즘에도 닿았다. 그녀의 고백을 듣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아, 우린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영상의 썸네일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그녀에게 날아들 비수 같은 모진 말과 남성들의 피해의식으로 인한 방어기제, 여성 혐오였다. 그녀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용기를 낸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사무쳤다.
그녀는 담담하게 영상을 시작했다. 약 1년 반 전 택시 기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이후 그녀는 현재까지 소송을 진행 중이며, 이로 인한 극심한 우울과 불안, 공황 장애 등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성폭행 피해로 인해 신체적 건강(자궁 질 손상, 생리 불균형, 탈모 등)이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 악화로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됐고, 유튜버로서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중간중간 큰 숨을 내쉬며 “아, 이제 좀 살겠다” “이제 좀 시원하다”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피해자인데, 왜 좁은 방구석에서 혼자 치욕과 슬픔을 삼켜야 하는지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피해 사실 고백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성범죄 피해자들이 더 이상 숨지 말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며 회복 과정을 공유하고 연대하며 함께 이겨낼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신고가 안 되니 성범죄를 당하면 반드시 씻지 말고 경찰서가 아닌 해바라기 센터로 가라는 실질적인 조언도 건넸다.
어김없이 끔찍한 2차 가해가 그녀에게 쏟아지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이에 놀라지도 않을 만큼 이 사회의 혐오에 무뎌졌다. 무감각, 마비된 감각이 최악이다. 무심해지는 순간, 끝이다.
대부분이 남성인 댓글의 내용은 처참했다. “대한민국 치안이 얼마나 좋은데” “인도 가서 성폭행당해 봤냐” “뭐 그리 힘드냐고 징징거리냐, 군대가 더 힘들다” “택시는 왜 탔냐” “성폭행당했다는 애가 그동안 유튜브에서 운동하고 웃고 떠들었냐, 도저히 못 믿겠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지 말라” 등등.
처참했다. 모두 ‘나, 나, 나, 나, 나!’였다. ‘나 자신’의 피해 사실과 고통을 ‘우리’로 승화시킨 당사자에 비해 너무나 처참한 우리 사회의 몰골이었다. 자신을 잠식한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으로 인한 여성에 대한 혐오를 성범죄 피해자에 투영하는 미성숙하고, 천박하고, 악독한 2차 가해였다.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넷플릭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성폭행 피해를 신고한 10대 소녀가 ‘믿을 수 없는’ 피해자로 낙인찍히고, 주변과 심지어 경찰에게까지 의심받으며 겪는 고통을 그린 실화다. 피해자의 편에 서지 않는 사회, 그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2차 폭력인지 보여준다.
드라마 속 무능하고 냉담했던 남성 경찰들의 시선은 한국 사회와 일치한다. 그들은 고통을 공감하는 대신 자신의 안일한 ‘상식’으로 사실을 재단하고 피해자의 행실을 따져 묻는다. ‘이상적인 피해자’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으면 기꺼이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도대체 왜 성범죄를 당하고도 즉시 신고하거나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느냐, 그런 여성들이 너무 답답하다, 라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 드라마를 권한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이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남자친구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남성들이 ‘추근거림’을 가장한 ‘위협’을 가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본능적으로 체득한 생존 대처법이다.
실제로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술 마실 땐 “남자친구 여기로 금방 올 거예요” 하고, 길을 걸을 땐 “근처에서 남자친구 곧 만나기로 했어요”라고 대꾸하면, 헐레벌떡 자리를 피하는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여성이자 당사자인 내가 그냥 “싫어요”라고 말할 땐 들은 척도 안 하던 이들이 신기하게도 다른 남성을 개입시키면 즉시 멈췄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실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다른 남성 때문에 말이다.
서울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여자 후배에게 택배를 보낼 일이 있어 주소를 물었다. 그 친구는 택배 수취인 이름에 ‘김힘찬’이라 써달라고 했다. 나는 이유를 알기에 ‘왜’냐고 묻지 않았다.
남성들은 여성의 아버지가 딸을 귀하게 여기는 걸 보면 함부로 못 한다. 반대로 아빠가 없는 여성은 함부로 대한다. 조국혁신당 성비위 사태 때 강미정 전 대변인이 이혼한 싱글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그녀에게 검사 집안 남편이 있었어도 그들이 그녀에게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성을 그렇게 대하는 남성들은 여성을 인간이 아닌, 쟁취하고 소유해야 하는 물건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의 근원이 같은 남성에게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걸 만만하게 보이는 여성에게 푸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한국 사회 특유의 ‘병영 문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오래전부터 막연하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남성 친구들의 군 복무 기관과 제대 이후의 변화를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 자료들을 찾아보니 이미 많은 사회학 연구에서 ‘군사화된 남성성’의 폐해가 지적된 바 있다.
물론 다른 여러 나라에도 군대는 있지만, 한국의 상황은 질적으로 다르다.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현실,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군사독재를 거치며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폭력의 잔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의무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전면적 징병제라는 특수성. 이 기형적인 토양 위에서 ‘병영 문화’는 단순한 군대 문화를 넘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논리로 강화된다. 상관에게는 절대복종하고 부하에게는 군림하는 극단적인 위계 서열, 그리고 그 서열을 폭력으로 유지하는 방식 말이다. 이 문화 속에서 ‘강한 남성’이 되지 못한 ‘약한 남성’은 ‘여성’으로 치부되며 멸시와 폭력의 대상이 된다.
이 왜곡된 학습이 사회로 그대로 전이되면서 여성은 자연히 ‘아래’이자 ‘약자’로 규정된다. 그렇기에 여성이 예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고 ‘거절’을 할 때, 그들은 바로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들에게 여성의 거절은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자신들이 뼛속까지 체화한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하극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유독 자신보다 약하고 ‘아래’라고 생각하는 여성에게만 발현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여성으로서 절망감을 느낀다. 자기보다 강하고 ‘위’라고 생각하는 같은 남성에겐 아무리 모욕당하고 거절당해도 결코 그러지 못한다.
나는 우리 사회 전반에 스민 여성 혐오의 근본적 문제가 남성 의무 징병제라면 성별 구분 없는 모병제로 바꾸는 데 찬성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이 문제에 깊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공감하고 있음을 남성들도 알았으면 한다.
여성, 그 자체를 쟁취하고 소유하는 게 자기가 속한 남성 무리 속에서 존재감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성이 유독 한국 사회엔 많다. 여성을 독립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성 주변의 애인, 남편, 아버지 등을 중심에 세워 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성들이 스스로 “싫다”라고 말하면 듣지 않다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알파 메일’을 들이대면 바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여성으로 살며 가장 무기력함을 느끼는 지점이다. 결국 이 세상은 남성 VS 남성이지, 남성 VS 여성조차 못 된다.
밤에 길에서 뒤에 누가 쫓아오는데, 앞에 가는 다른 남성 옆에 가서 도와달라고 속삭인 적이 있다. 그러니까 곧바로 쫓아오던 그놈이 사라졌다. 나는 그저 내가 도움을 청한 남성이 쫓아오는 남성 같지 않길, 내가 탄 택시 기사가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운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일상의 연속이다. 이 일상은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딱히 분노도 실망감도 없다. 그저 무기력할 뿐이다.
남성 중심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으로 인정받고 싸워야 하는 남성들의 고충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 그러나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살아갈 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기자 일을 할 때 새벽 마감을 마치고 택시를 탔다. 그때 남성 택시 기사 첫마디가 “아가씨, 이 시간까지 뭐 재밌는 거 했나 봐~ 술 많이 마셨겠네” 하고 위아래로 훑으면, ‘아, 오늘 또 재수 없게 걸렸구나’ 하며 피곤해서 눈꺼풀이 감기는데도 내내 남자친구와 통화하는 척을 해야 했다. 그 새벽에 받을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나의 의지와도 무관한, 예측에도 없던 생존과 안전이 직결된 상황에 맞닥뜨릴 때 이런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내가 싫어 자괴감도 컸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택시를 부를 때 여성 기사로 선택할 수 있다고도 한다. 이렇듯 이건 여성의 태도나 처신, 선택의 문제가 아닌 사회 시스템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다.
지금까지 살면서 크고 작은 성희롱, 성추행을 겪었지만, 내가 저 유튜버처럼 더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은 건 내가 만난 남성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단지 내가 운이 좋아서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감. 수동적이고 의지박약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이 진정 여성인 내가 어찌한다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절망감을 항상 가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욱 성폭력이 일어난 후에라도 강력하게 대응하는 법적 시스템과 피해자의 편에 서는 사회적 문화와 정서가 중요한데,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고백한 유튜버에 가해지는 사회의 2차 가해를 보고 있자니 우리는 아직 갈 길이 까마득히 멀다.
그래서 한국에선 성범죄 피해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우주만큼 거대한 용기다. 여성은 철저히 배제된, 남성 vs 남성인 세상에서 남성들은 자기들끼리 영역 싸움과 서열 다툼을 하다가도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당한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공개하면 갑자기 남자끼리 한 팀이 되어 피해자인 여성을 공격한다.
지금도 그녀가 지나고 있을, 그리고 끝이 안 보여 막막하기만 할 지옥 같은 고통과 트라우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옥 불구덩이에서 기어이 찾아낸 그녀의 용기에 존경을 보낸다. 그리고 그녀와 온 마음으로 함께 한다. 우리가 서로의 고통에 무심해지는 순간, 그걸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