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권력을 내어주기 전, 우리는 더 신중해져야 한다
최근 한국은 ‘경주 APEC 2025’라는 커다란 국제적 규모 행사를 통해 작년 12.3 불법 비상계엄 이후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돌아왔음을, 그리고 선진국 대열에 들 충분한 가치가 있는 나라임을 세계 무대에 천명했다.
하지만 밝고 둥근달의 그림자처럼 한국 사회의 병들고 어두운 면은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멋진 모습의 대한민국이 하루 평균 2명 꼴로 사람들이 일하다 죽고, 자살률은 가장 높고 출생률은 가장 낮은 나라라는 걸 알면 세계 시민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물론, 12.3 비상계엄 사태를 시민들의 힘으로 막아내고 내란을 일으킨 자를 탄핵하고 새 대통령을 세운 이 나라의 놀라움은 존중받아야 한다. 영화 <굿뉴스> 대사처럼, “진실은 간혹 달의 뒷면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앞면이 거짓은 아니다.”
바로 ‘경주 APEC 2025’ 개최 직전, 단 하나의 언론사를 통해서만 알려졌던 ‘런던베이글뮤지엄(런베뮤)’에서 일하다 과로로 숨진 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내 삶의 가치와 방향이 오로지 ‘돈’만 좇던 이십 대엔 단기간에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신자유주의와 브랜딩, 마케팅 붐이 일어나던 2000년대 초반이었다, 서점가 베스트셀러를 채웠던 세스 고딘의 <보랏빛 소가 온다>라는 책이 기억난다. ‘보랏빛 소’. 그러니까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각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 ‘보라색’과 ‘소’, 이 두 가지를 합쳐 새로운 개념과 충격으로 마케팅하라는 조언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들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이미 있는 것들을 합쳐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인 양 제안하라는 것이다.
나는 ‘런던베이글뮤지엄’이 이 세스 고딘의 ‘보랏빛 소’의 개념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엄청난 반향을 이끌며 ‘런베뮤’는 성공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은 박수받아 마땅하지만, ‘런던’과 ‘베이글’과 ‘뮤지엄’을 조합한 이 요상한 이름의 빵집에 나는 도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 패션지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동안 그 힙한 것들의 뜬금없는 조합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것을 둘러싼 눈먼 돈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순간의 화려함으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대신, 꾸준히 묵묵하게 깊고 진정성 있는 메시지로 소구하는 브랜드를 좋아한다. 나라는 사람의 성향과 가치관이 그런 것일 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열광해도 내가 싫으면 그만인 거다.
그러나 그 빵을 만들다 사람이 목숨을 잃고, 쪼개기 계약으로 법망을 피하고, 일부러 선반을 높게 설치해 직원이 컵을 꺼낼 때 허리 라인을 돋보이게 하고, 파티셰를 인간이 아닌 매장 안 오브제(물건)처럼 보이도록 일하는 사람의 눈부심은 상관없이 자연광을 마주하도록 키친을 설계했다며, 그게 마치 마법 가루를 발라 놓은 것 마냥 성공신화로 둔갑해 판매된 것, 그 마법 가루를 퍼 날라준 언론과 유튜버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믿기로 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아주 많다.
친구들이 많은 엔터, 요식 업계에선 RYO의 근사하게 포장된 ‘엑시트’를 ‘먹튀’라고 부르곤 했는데, 그 ‘먹튀’에 인문학적 깊이와 철학, 판타지를 섞어 반향을 일으키는 데 크게 일조한 <최성운의 사고실험>이라는 유튜브 채널은 현재 RYO의 인터뷰 콘텐츠를 삭제한 상태다.
‘런베뮤’의 창업자 RYO는 직원의 과로로 인한 사망 사건이 발생한 지난 7월 직후 이를 쉬쉬하며 회사를 매각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도 CBO(최고 브랜드 책임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고, 그 직함을 간판으로 수많은 유튜브와 공중파, 종편의 정규 프로그램을 종횡무진 누비며 자신의 철학을 설파함으로써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 하지만 몇 개월이 흘러 이 일이 일파만파로 퍼지자, 자신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비공개로 돌리고 아무런 반응도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그는 스스로, 그동안의 행보가 MZ 세대가 진정으로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도움을 주고자 하는, 한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선배로서의 진정성이 아닌, 오직 브랜드 마케팅과 자신의 영달을 위함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흥미로웠던 건 사람들의 반응이다. 이 사건이 불거진 이후, RYO가 쓴 책 <생각 없는 생각(Philosophy RYO)>를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진열했던 서점들이 그의 책을 산업재해 코너로 옮기고 규탄했다. 하지만 과로사 의혹 사건이 불거지기 직전까지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그나마 책을 많이 읽고 인문학적 사유를 지향한다는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각광받았다. 이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단기간에 무려 12쇄를 넘게 찍었다. 어쩌면 우리 사회 자체가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다.
RYO라는 사람의 브랜딩과 마케팅을 찬양하며 과로사 의혹이 불거지고 나서도 ‘그렇게라도 해서 돈 많이 버는 것도 능력’이라고, 그것만큼은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다. 여전히 ‘런베뮤’ 앞에 줄을 서서 ‘런던’과 ‘베이글’, ‘뮤지엄’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조합의 공간에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사진 아래 진열된 베이글을 주어 담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어쩌면 ‘이제는 선진국’이라는 나라에 왜 전청조나 김건희 같은 사람이 활개 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조금은 풀린 것 같다.
사람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공 신화에 아름다운 배경 스토리까지 얹힌 ‘동화’에 쉽게 현혹되고 매혹된다. 물론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 자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찾아보면 많다. 하지만 거기에 수천억 원의 돈을 벌고 ‘엑시트’했다는 ‘동화’가 더해지면, 그 자체가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 너무나 비현실적인 일이라는 걸 알기에 우리는 그 인물과 이야기에 더 끌린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는 너무 쉽게 권력을 내어준다.
‘너 자신으로 살아’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해’라고 외치는 RYO도 그랬다. 온갖 방송사와 언론, 유튜버들은 어쩌면 천운을 타고났을지도 모를 한 개인의 이야기에 ‘시대적 인사이트’라는 포장지를 덧씌워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 마냥 둔갑시키는 데 그 어떤 죄책감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작가도 PD도 결국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몽환적인 감성과 예술가의 에테르까지 갖춘 RYO라는 인물을 어떻게 지나치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포장하는 인물 자체도 사람이란 걸 잊어선 안 된다. 인간은 지극히 입체적이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진정으로 연륜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은 자기 성공의 잣대를 ‘숫자’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되레 자신이 성공한 사람인 게 맞냐고 청중에게 되묻는다. 대체 어떤 기준으로 한 인간의 삶을 감히 ‘성공’ 했다, ‘실패’ 했다, 나눌 수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을 명분으로 사람들에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으며, 자신의 말과 행동의 영향력과 파급력, 책임을 잘 안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주변 사람들’과 ‘운’에 더 지분을 둔다. 누군가에게 권력을 내어주기 전, 우리는 더 신중해져야 한다.
‘런베뮤’ 창업자이자 CBO인 RYO라는 사람이 자신의 닉네임이 ‘RYO’인 이유가 ‘좋은 동료’의 ‘료’에서 따왔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 본 영화 <굿뉴스>가 떠올랐다. 베이글이라는 ‘사실’, 런던과 뮤지엄, RYO라는 ‘약간의 창의력’, 그리고 대중의 ‘믿으려는 의지’가 완벽하게 합을 이뤄 작동한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예방’이 아니라, 일이 벌어지고 끔찍한 결과가 나오면 그제야 ‘수습’하는 방식에 너무 익숙해졌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각종 산재 사고, 높은 자살률, 낮은 출생률 문제 등. 그리고 결과가 나오고 나서야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이미 이득을 취한 사람들이 책임에서 빠져나간다. 이 시스템과 구조를 당연히 바꾸는 게 마땅하지만, 마치 인건비를 아껴 기업 이익을 높이는 게 ‘혁신적인’ 기업 운영이라며 칭송받는 기괴한 사회적 문화와 정서를 우리는 근본적으로 돌아봐야 한다.
나는 2000년대 홍대 클럽에서 일을 시작해 2010년 인디 매거진과 상업 패션지를 거쳤다. 대형 패션지에 다닐 때 어시스턴트 ‘열정 페이’ 문제가 폭로됐다. 아니, 이미 문화예술, 패션, 디자인, 사진, 영상, 공연 등 모든 곳에서 ‘젊음에 대한 착취’에 관한 문제가 터져 나왔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어시스턴트’를 거치지 않고 아주 작은 규모의 독립 매거진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에디터가 된 케이스였기에 그런 기형적이고 착취적인 시스템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봐야 같은 월급쟁이인 주제에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정기자’ ‘계약직’ ‘비계약직’ ‘어시스턴트’ 등으로 계급을 나눠 일방적으로 권력을 과시했다.
나는 젊고, 밝고, 생기 가득한 친구들의 눈을 보고 말했다. “지금, 당장, 도망쳐!” 하지만 나는 그들이 도망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답은 그들이 직접 찾아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에게 답을 원했다. 답이 없는 이가 도망치라고 하니 누가 내 말을 듣겠는가. 하지만 RYO는 자신이 답을 가지고 있는 척 사람들을 기만했다. 어쩌면 자기 자신마저 속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절대로 RYO처럼 인생을 통달하고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추앙한다 해도 나 자신이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느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장 끔찍했던 건 사람이 죽어 나가도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젊음의 착취를 당연시하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어른들과 사회는 우리를 방치했고, 물질주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톱니바퀴는 가열 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주변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듯 보였다. 외로웠다. 나는 이렇게 일하다간 ‘죽겠다’ 싶어 사표를 냈다. 단 몇 줄의 그 종이 한 장을 내기까지 나는 이 사회의 충실한 일원이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좌절감, 실패함에 사로잡혔지만, 결국 나를 갉아 먹는 그 끔찍한 자책감을 이겨내기로 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알량한 명한 한 장과 병든 사회의 소속감은 오히려 나에겐 독이었다. 일단 나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죽도록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당연한 미덕’이라는 사회의 가스라이팅에 신물이 나 최근 10년은 한국에서 도망쳐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나만의 답을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처음엔 해외 다이빙센터 ‘한인샵’에서 일했다. 물리적 위치만 다를 뿐 한국과 다를 게 없었다. 결국 한국인은 나뿐인 웨스턴샵을 찾아가 자리 잡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지우고 싶은 한국인의 DNA를 뼛속까지 느꼈다. 유러피안 강사들은 조금만 몸과 마음이 불편해도 일을 하지 않았다. 조직과 회사보다 자기가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일도 아닌 걸 찾아 과도하게 열심히 했고, 부당한 대우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툭하면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유러피언들과는 확연히 다른 나를 보고 영국인 사장은 ‘이게 웬 떡이냐’ 했다. 그들이 펑크 낸 스케줄을 메운 건 언제나 나였다. 나에겐 죽을 만큼 아프지 않으면 일을 빠지지 않는 근성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마저 착취당하고 영혼을 갈아 일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이 ‘파라다이스’라고 부르는 곳에서 나는 또다시 번아웃을 겪었다. 시스템에서 벗어나려 저항하고 도망쳤는데 그 시스템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그 모든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한 후에야 나는 나 자신을 지키고, 그럼으로써 단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한국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쓴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절망을 본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성과 양심을 가진 이들을 통해 희망도 본다. 우리가 함께 하면, 드라마틱한 출구는 아니더라도 미세한 틈 하나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순진하게 믿기로 했다.
누군가가 ‘죽고 나서야’ 돌아보는 사회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 관심을 갖고 그 죽음을 막는 사회는 희망이 있다. 당장 우리 곁을 돌아보자. 숨소리 한 번 못 내고 조용히 서서히 내면부터 말라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APEC 같은 화려한 행사를 잘 치러낼 능력이 차고 넘치는 나라가, 곁의 동료와 이웃이 조용히 죽어가지 않도록 하는 게 진정한 선진국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