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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Wonderwall’이 되어줄 수 있을까

오아시스 내한 공연으로 본 세대 간의 충돌, 그리고 ‘로큰롤’이라는 섬

by 조하나


2025년 서울 외곽, 고양 주경기장. 마침내 조명이 꺼지고, 오랜 기다림으로 응축된 공기가 폭발 직전까지 팽팽해졌다. 특유의 거칠고 압도적인 기타 리프가 거대한 파도처럼 경기장을 덮쳤을 때, 터져 나온 함성은 시공간을 뒤섞었다.


재결합한 오아시스의 귀환. 2009년 갤러거 형제의 불화로 오아시스가 해체된 이후, “맨체스터 시티가 우승하면 재결합을 생각해 보겠다” 하던 농담이 ‘말이 씨가 된다’는 우주의 섭리를 증명하는 현실이 됐다. 리암 갤러거는 ‘비디 아이’로, 노엘 갤러거는 ‘하이 플라잉 버즈’로 각자의 길을 걷던 시간을 지나 90년대 맨체스터의 축축한 공기가 다시 하나가 된 그들의 음악으로 지금, 여기를 가득 채우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울림 속 심장이 뛰는 방식은 미묘하게 달랐다. 펜스 앞에서 온몸으로 환호하는 앳된 얼굴들과 한 걸음 뒤, 팔짱을 낀 채 아련한 미소로 무대를 응시하는 중년의 눈빛들. 같은 멜로디 위에 서로 다른 시간을 얹어 부르는, 명백히 다른 온도의 밤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예상했던 풍경이 온라인을 달궜다. 90년대부터 그들의 음악과 함께 청춘을 보냈던 이들, 이제는 사회의 허리가 된 4050 세대는 젊은 세대의 열광을 재단하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들으며 패션만 흉내 내는 가짜 팬들”. 그들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부심’을 넘어선, 어떤 절박함 같은 것이 묻어났다. 마치 자신들의 성역을 침범당한 듯한 날카로운 경계심마저 느껴졌다.


그 마음, 어찌 모를까. 그들에게 오아시스는 단순한 밴드가 아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건넜던 비밀 암호였고, 팍팍한 현실을 견디게 했던 위스키였으며, 세상에 대한 반항의 깃발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깃발을, 그들의 언어와 감수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음 세대가 흔들고 있으니, 속이 상할 만도 하다.


어쩌면 그 시절의 음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먹고 사느라, 어른이 되어가느라, 점점 밀려나는 ‘문화’라는 삶의 지분에 대한 주장이자, 이미 멀어져 버린 젊음을 향한 투사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수백 년 된 고전 문학을 요즘 애들은 읽지 않는다고 혀를 차는 어른들은 예전에도 늘 있었다. 오아시스 역시 이제는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클래식이다. 그런데 왜 유독 이들의 음악에 대해서는 그토록 날 선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걸까? 수백 년 된 고전에는 없지만, 오아시스의 음악에는 있는 것. 바로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나 베토벤의 교향곡이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그것이 IMF 외환위기의 칼바람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던 청춘의 어깨를 감싸주거나, 밀레니엄 버그의 공포와 세기말적 허무함이 뒤섞인 90년대 말의 공기를 함께 호흡해 주지는 않았다. 오아시스는 그들의 불안과 반항, 사랑과 좌절이 담긴 노랫말과 멜로디로 당시 젊은 날의 자화상 그 자체가 되었다.


젊은 세대가 오아시스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실은 자신들의 치열했던 지난날을, 그 혼란과 순수를 알아봐 달라는 외침은 아닐까. 이제는 음악을 들을 시간도, 공연장을 찾을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을 말이다. 젊은 세대의 서툰 열광을 향한 비판 속에는, 그렇게 변해버린 스스로에 대한 서글픔과 자기 연민이 배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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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우리가 지키려는 것이 과연 음악 그 자체인가, 아니면 빛바랜 청춘의 추억에 대한 독점권인가. 우리가 젊은 세대의 ‘날 것’ 같은 열정을 비웃을 때, 정작 우리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낡음’에 스스로 잠식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록 스피릿’이라는 것이 특정 세대의 골동품이 될 수 있을까? 맨체스터 노동자 계급의 아들로 자란 형제가 학교를 때려치우고 허름한 지하 공간에서 만든 오아시스의 음악은 애초에 그런 경계를 비웃으며 태어났다. 그들의 음악 자체가 시스템에 대한 반항이었고, 꾸밈없는 날 것의 외침이었으며, ‘어쨌든 살아남겠다’는 치열한 생존의 노래였다. LP로 듣든, CD로 듣든, 스포티파이나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발견하든, 중요한 것은 그 음악이 여전히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하고, 삶의 어떤 순간에 배경음악이 되어준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 솔로 활동으로 한국을 찾았던 노엘 갤러거와의 인터뷰에서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그의 공연에서 수많은 관객이 ‘Don’t Look Back In Anger‘를 떼창하는 모습을, 그는 마이크에서 잠시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곤 했다. 그 모습이 인상 깊어 그에게 물었다. “저 노래는 이제 당신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 된 것 같다”고. 그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그러나 진지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Don’t Look Back In Anger’(1996)를 쓴 그날 밤의 그 순간은 변치 않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지. 반대로 나는 생에서 그 순간을 단 한 번 겪었고, 그 이후로 계속 나이 들고 있어. 그래서 음악은 영원해. ‘Live Forever’(1994) 역시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서가 아닌 ‘영원히 기억되는 것’에 대해 쓴 노래야. 그게 바로 로큰롤이지.”


그의 말처럼, 음악은 창작자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생명력을 얻고 시간을 여행한다. ‘샐리(Sally)’는 그렇게 X세대의 불안과 밀레니얼의 방황을 거쳐, 마침내 Gen Z의 마음에 가 닿는다. 그래. 이게 음악이고, 이게 바로 로큰롤이다.


창작자 자신조차 노래의 영원한 생명력을 인정하고 그것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것 자체를 ‘로큰롤’이라 부르는데, 과연 누가 그 흐름을 막아서겠는가. 누가 감히 특정 세대의 기억 속에 그 노래를 박제하려 하는가.


오히려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의 방식으로 그 노래를 재발견하고 열광하는 것이야말로 오아시스의 음악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그들이 꿈꿨던 ‘Live Forever’의 진정한 의미이다. 새로운 세대의 열광을 ‘수박 겉핥기’라고 폄하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그 음악의 현재적 의미를 놓치고 과거의 껍질만 핥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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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것은 음악을 듣는 방식이나 세대가 아니라, 그 음악 앞에서 얼마나 진실한가 하는 ‘마음’일 것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찾아 듣고, 텅 빈 공연장을 찾아 그 공간을 채우고, 가사와 멜로디에 기대어 밤을 지새우며 아티스트의 세계에 가닿으려 했던 그 순수한 마음. 그 경험의 순수함과 무게는 결코 다른 세대에 대한 비웃음으로 폄하될 수 없다. 오히려 타인의 열정을 함부로 재단하고 의심하는 순간, 가장 먼저 흐려지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이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한다. 오아시스의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 강물 위에 ‘로큰롤’이라는 이름의 섬은 여전히 떠 있다. 새로운 세대는 그 섬에 새로운 깃발을 꽂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노래를 부를 것이다. 기성세대는 흘러간 물결을 아쉬워하기보다, 새로운 물결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너그럽게 바라봐 주는 것은 어떨까. 함께 그 물결에 올라탄다면 더 좋겠다.


세대 간의 벽을 넘어 음악이라는 공통의 언어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할 때, 오아시스의 노래는 박제된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전설로 우리 곁에 ‘Live Forever’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분노 속에서 뒤돌아보지 않고(Don’t Look Back In Anger),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 서로의 구원(‘Wonderwall’)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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