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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 10년 후의 비행

‘진정성’을 삼켜버린 ‘관심’의 시대, 여전히 유효한 ‘버드맨’의 경고

by 조하나


10년 전 영화 한 편이 자꾸 나를 좇는다


2015년 국내 개봉한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압도했습니다. 바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이죠. 2014년 북미에 먼저 선보인 <버드맨>은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습니다. 무려 9개 부문 최다 후보에 올랐고, 작품상, 감독상 등 4개의 핵심 부문을 석권했죠. 영화의 뛰어난 기술적 성취만큼이나 날카로운 동시대 비판으로 평단과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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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의 아카데미 수상 이후로 10년 가까이 수많은 수상작이 쌓였는데 여전히 저에겐 이 영화가 생생합니다. 영화는 ‘상품’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절규가 여전히 들리는 듯하죠. 무엇보다 멋진 건 <버드맨> 자체가 2시간이라는 유통기한을 가진 영화의 휘발성을 뛰어넘어 시대를 초월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고전(클래식)’이 된 점입니다.


영화는 과거 슈퍼히어로 ‘버드맨’으로 할리우드 톱스타의 영광을 누렸으나 지금은 잊힌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이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하는 처절한 과정을 그립니다. 하지만 <버드맨>이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이러한 표면적 서사 너머에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2010년대 중반 예술의 위기와 상업주의, 진정성과 관심, 그리고 자아와 페르소나의 경계가 무섭게 허물어지던 시대의 불안을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2025년, 우리는 <버드맨>이 그 당시 제기했던 질문들, 혹은 예견했던 미래가 더 이상 ‘풍자’나 ‘경고’가 아닌, 압도적인 ‘현실’이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극장은 OTT 플랫폼에 의해 잠식당했고, 소셜 미디어는 ‘숏폼’의 세상으로 재편되었으며, 이제는 AI가 예술의 영역의 문턱을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영화를 다시 보는데 더 넓고 깊은 생각이 들더군요.







나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는 것

And did you get what you wanted from this life, even so?
당신은 이 삶에서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I did.
네.

And what did you want?
그게 뭐였나요?

To call myself beloved, to feel myself beloved on the earth.
나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는 것.



이 대화는 <버드맨>의 오프닝 크레딧에 등장하는 문구이자, 레이먼드 카버의 실제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리건 톰슨이 ‘진정한 예술’이라 믿으며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는 연극의 원작, 카버의 단편 소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죠.


리건이 수많은 작가 중 카버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는 ‘버드맨’을 비롯한 히어로 무비로 점철된 할리우드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순수 문학’과 ‘진짜 예술’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카버의 세계는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조차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인간 본질의 고통과 혼돈을 다루죠.


카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사랑’에 대해 말하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폭력과 상처, 그리고 수많은 언어의 실패로 점철됩니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본질에 가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좌절합니다.


이는 리건 톰슨의 처절한 투쟁과 일치합니다. 그는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기 위해” 연극에 모든 것을 걸지만, 정작 그가 사용하는 방식은 ‘진정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예술이 아니라 ‘성공’을, 소통이 아니라 ‘인정’을 갈구합니다. 심지어 그가 연기하는 연극 속 인물 ‘에드’가 두 번의 자살 시도를 하는 것처럼, 리건의 삶과 예술은 위험하게 중첩됩니다.


결국 <버드맨>은 소설 속 카버의 질문, 즉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영화로 옮겨왔습니다. 리건이 갈망하는 ‘사랑’은 진정한 인간적 교감일까요, 아니면 영화 속 ‘버드맨’이 리건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관심’과 ‘명성’일까요?








관객을 감금하는 카메라와 심장을 울리는 드럼


<버드맨>은 ‘관람’이 아닌 ‘체험’하는 영화입니다. 이냐리투 감독은 관객을 스크린 밖 안전지대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리건의 불안한 내면 한복판으로 끌어당기죠. 바로 두 가지 혁신적인 기술적 장치를 통해서였습니다.


카메라라는 감옥: 엠마누엘 루베즈키의 ‘컨티뉴어스 숏’


<버드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영화 한 편 전체가 마치 단 하나의 숏, 즉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으로 촬영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은 교묘한 환상이죠. <버드맨>의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감독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1948년, 영화 <로프>에서 시도했던 기법에 현대 기술을 결합해 전례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카메라는 어두운 복도를 통과하거나 빠른 속도로 방향을 트는 등 관객이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숨겨진 컷을 감쪽같이 삽입합니다. 하지만 관객은 이를 쉽게 눈치채기 힘듭니다.


컷 없이 장면이 이어진다는 건 영화가 관객에게 ‘편집’을 통해 시점을 전환하거나 잠시 숨을 고를 ‘휴식’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끊임없는 카메라는 바로 관객입니다. 그리고 그 관객을 브로드웨이 극장이라는 폐쇄된 공간과 리건의 강박적이고 불안한 내면에 문자 그대로 감금시키죠. 우리는 리건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의 공황과 불안을 실시간으로 함께 견뎌야 합니다. 카메라는 리건의 감옥이자,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자의식,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관객은 전지적 시점이 아닌,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라는 지옥에 갇혀, 그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인 ‘버드맨’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벗어지지 못하는 고통을 함께 체험하게 되죠.






심장의 박동 혹은 광기를 표현한 드럼 솔로

<버드맨>의 심리적 감옥을 완성하는 또 다른 축은 안토니오 산체스의 즉흥적인 재즈 드럼 솔로입니다. 영화 음악은 전통적으로 관현악을 통해 감정을 고조시키지만, <버드맨>은 정형화된 멜로디를 거부합니다. 대신 리건의 심리 상태에 따라 불규칙하게 울리는 드럼 사운드만으로 시종일관 긴장과 불안을 형성합니다.


영화의 백미는 배경음악으로서의 영화적 장치와 현실의 소리 사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허물어뜨리는 방식입니다. 드럼 소리가 리건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불안한 심리의 사운드인지, 아니면 그가 방금 지나친 거리의 버스킹 드러머가 연주하는 실제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죠.


드럼은 가장 원초적인 악기이며 인간의 심장 박동을 닮았습니다. 하지만 산체스의 스코어는 안정적인 박자가 아니라, 불규칙하고 즉흥적인 ‘공황장애’의 사운드입니다. 내면의 소리(사운드트랙)와 외부의 소리(버스킹)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은 리건의 내면적 불안(버드맨)이 더 이상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잠식하기 시작했음을,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 그의 상태를 청각적으로 증명하는 장치가 되죠.

이처럼 <버드맨>이 '컨티뉴어스 숏'과 '드럼 솔로'를 통해 관객에게 강제했던 숨 막히는 불안감은 단순히 리건 톰슨 개인의 심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2014년, 영화가 포착했던 시대 전체의 불안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25년, 우리는 이 불안감이 어떻게 현실의 괴물이 되었는지 목격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의 경고가 현실이 될 때: <버드맨>의 세 가지 예언


<버드맨>은 2014년, 이미 시작된 세 가지 거대한 흐름을 정확히 겨눴습니다. 10년이 지난 2025년, 다시 이 영화를 보니 섬뜩할 정도의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 친구한테도 망토를 입혔어?”


2014년, <버드맨>은 마블과 DC로 대표되는 슈퍼히어로 영화, 즉 IP(지적 재산) 기반의 블록버스터가 할리우드를 점령하기 시작한 현상을 신랄하게 풍자했습니다. 영화는 “예술은 할리우드에서 이룰 수 없다”고 믿는 리건이 ‘진정한 예술’의 상징인 브로드웨이 무대로 도피해 인정받으려 하는 고군분투를 그리죠.


아이러니하게도 ‘버드맨’ 리건 톰슨을 연기한 배우는 원조 ‘배트맨’이었던 마이클 키튼입니다. 그리고 그와 예술적 충돌을 빚는 연극배우 마이크 샤이너는 ‘헐크’를 연기했던 에드워드 노튼이 맡았죠. 그리고 리건의 딸 샘은 ‘스파이더맨’의 여자친구였습니다.


그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히어로 무비에 출연하지 않은 배우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실제로 언급되는 제레미 레너(어벤저스)부터 마이클 패스벤더(엑스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아이언맨)까지 모두 IP 기반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출연했죠. 영화 속 리건이 제레미 레너가 ‘어벤저스’를 찍는다는 말에 “그 친구한테도 망토를 입혔어?”라고 묻는 대사는, 이 ‘망토 입은 배우들’이 휩쓸어 버린 예술계에 대한 구세대의 자기비판이자 모욕감을 드러냅니다.


10년 전 영화 <버드맨>이 두려워한 것은 ‘콘텐츠의 질’이었습니다. 2025년, 우리가 마주한 위기는 ‘플랫폼의 구조’ 자체가 됐죠. 2014년의 IP 영화들은 적어도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상영되었습니다. 하지만 2025년 현재, 팬데믹까지 거치며 극장가는 붕괴 직전이고, <버드맨>과 같은 예술 영화는 물론 웬만한 상업 영화조차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다양한 OTT 플랫폼으로 직행하고 있습니다.


2025년 9월, 넷플릭스의 공동 CEO 테드 사란도스는 “넷플릭스가 극장을 죽인 것이 아니라, (관객의) 행동이 변한 것”이라며, 자신들은 “고객이 있는 곳에서 고객을 만날 뿐이며 오히려 할리우드를 구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미디어 환경이 영화 속 리건 스스로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버드맨’의 논리가 완벽하게 승리한 세계임을 보여줍니다. 리건의 내면의 목소리 ‘버드맨’은 “사람들은 피 튀기는 액션과 볼거리를 원하지, 너의 우울한 예술 따위는 원하지 않아!”라고 끊임없이 속삭였죠. 2014년 영화 <버드맨>이 경고했던 ‘상업주의의 예술 잠식’은 2025년 ‘플랫폼의 예술 인프라 대체’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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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존재하지 않아”

<버드맨>은 ‘관심’과 ‘바이럴’이 ‘진정성’을 대체하기 시작한 2014년의 소셜 미디어 시대를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리건의 딸 샘이 아빠에게 내뱉는 독백을 통해 말이죠.


“아빠는 블로거를 혐오하고, 트위터를 비웃고, 페이스북 계정조차 없지. 아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 장면은 구시대의 ‘진정성’이 신시대의 ‘관심도’ 앞에서 얼마나 무력했는지 보여줍니다. 역설적이게도 리건이 ‘예술가’로서 대중의 관심을 되찾게 된 계기는 그의 처절한 연극이 아니라, 실수로 타임스 스퀘어에서 속옷 바람으로 ‘바이럴’ 된 영상 덕분이었습니다.





2014년의 ‘바이럴’은 2025년 틱톡,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로 대표되는 ‘숏폼’ 알고리즘으로 극대화되었습니다. 2014년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존재 증명’의 공간이었다면, 2025년의 틱톡은 ‘진정성’을 전략적으로 소비하는 공간입니다. 요즘 틱톡 시대의 인플루언서들은 과잉 생산된 콘텐츠 대신 필터링되지 않은 날것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죠.


<버드맨>의 2014년이 ‘진정성’과 ‘관심’의 대립이었다면, 2025년은 ‘진정성 있게 보이도록 연기하는 것’ 또한 ‘관심’을 얻는 핵심 전략이 된 시대입니다. ‘진정성’ 자체가 ‘관심 경제’에 포섭된 것입니다. 2014년 리건의 ‘바이럴’은 의도하지 않은 실수였지만, 2025년의 ‘진정성’은 치밀하게 의도된 전략이자 고도화된 마케팅 기법인 것이죠.


여기에 2025년, 우리는 AI라는 더 거대한 위협을 마주합니다. AI는 이 구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리건 톰슨은 '인간' 예술가로서 '진정성'과 '관심' 사이에서 고통받았지만, AI는 고통 없이 '진정성 있는 척하는' 결과물을 무한히 생성합니다.


2014년의 질문이 '관심을 얻기 위한 예술도 진정성이 있는가?'였다면, 2025년의 질문은 "AI가 만든 완벽한 예술 앞에서, 리건의 그 처절한 인간적 고통은 이제 어떤 의미가 있는가?"로 바뀌었습니다.




“예술가가 될 용기가 없어 비평가가 된 사람들”


<버드맨>은 예술가를 재단하는 ‘비평가’의 막강한 권력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연극 비평가 타비타 디킨슨은 리건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리건의 연극을 보기도 전에 “당신은 배우가 아니라 셀러브리티”라며 모욕을 퍼붓고, “할리우드 광대가 브로드웨이를 더럽힌다”는 이유로 리건의 연극을 “죽여버리겠다”라고 선언하죠. 또 그녀에겐 그럴 만한, <뉴욕타임스>라는 비평 권력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마이크가 디킨슨에게 한 말입니다. “예술가가 되지 못해 비평가가 된 사람은 군인이 되지 못한 정보원과도 같다.” 영화는 창작의 고통을 모른 채 오만한 판단만으로 작품을 재단하는 비평가의 폭력성을 고발합니다. 당시 매거진 에디터였던 저는 예술가와 대중 사이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항상 예술가에 대한 존경과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에겐 스스로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들여다볼 용기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고통과 철학, 영혼을 갈아 넣은 예술작품을 어쩌면 제가 너무 쉽게 판단하고 별점을 매기고 비판한다고 생각하며 자괴감에 괴로워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마이크의 저 대사가 너무 와닿았죠.


2025년 현재, 타비타 디킨슨 같은 엘리트 비평가의 권위는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이제 문화를 좌우하는 것은 <뉴욕타임스>의 리뷰가 아니라, 대형 ‘인플루언서’들입니다. 비평은 이제 ‘식견’이 아니라 ‘데이터’의 영역이 되었고, ‘팔로워 수’와 ‘참여율(인게이지먼트)’이 곧 영향력입니다.


하지만 2014년의 리건에게 타비타는 2025년의 ‘인플루언서’보다 차라리 상대하기 쉬운 적수였을지 모릅니다. 타비타는 비록 악의적이었지만, 그녀는 ‘연극’이라는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과 ‘신념’을 가진 ‘문지기’였습니다. 그녀의 비판은 적어도 ‘예술’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졌죠.


그러나 2025년의 인플루언서-비평가들은 ‘예술’이 아니라 ‘참여율’과 ‘바이럴’을 기준으로 콘텐츠를 판단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의 미학이 아니라, ‘이 리뷰 영상이 얼마나 많은 ‘좋아요’를 받을 것인가’입니다. 타비타의 비평이 예술가에게 폭력적이었을지언정, 2025년 ‘바이럴’의 알고리즘은 예술가를 ‘라벨’조차 붙일 가치가 없는 존재로 ‘투명인간’ 취급하며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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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숨겨둔 두 개의 함정: 김치와 이카루스


<버드맨>은 비평적 성취와 더불어, 논쟁적인 장면과 상징적인 형식 파괴의 순간을 통해 더욱 깊은 해석의 여지를 둡니다.



엠마 스톤의 ‘김치’ 발언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리건의 딸 샘은 아시안이 운영하는 꽃집에서 영상 통화를 합니다. 그녀는 꽃집 주인에게 “닥쳐!”라고 소리친 뒤 “꽃에서 역겨운 김치 냄새가 난다”고 경멸적인 표정으로 말하죠.


국내 개봉 당시 이 장면은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국내 홍보사 측은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대사일 뿐 확대 해석은 무리”라는 입장을 표했지만, 이 장면은 ‘캐릭터 묘사’라는 이유가 명분이 될 수 없습니다. 사실 꽃집에서 엠마 스톤이 통화할 때 뒤에서 영어가 아닌 언어로 그녀에게 계속 무언가 말하는 꽃집 주인 남성은 한국인도 아니거든요. 10년 전만 해도 이런 무심하고 무의식적인 일상적 인종차별은 흔했습니다. 만약 지금 이런 장면이 들어간 영화가 나온다면, 그때와는 다른 반응이었을 겁니다.


더 나아가, 이 대사는 샘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위선을 폭로하며, 그녀가 상징하는 ‘신세대’ 역시 ‘구세대’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샘은 구시대적 가치관, 즉 ‘진정성’에 얽매인 아빠 리건에게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쏘아붙이면서 ‘신세대의 각성’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소수자인 아시안 이민자에게는 인종차별적 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습니다. 그녀의 ‘각성’이 얼마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백인 중심의 세계관 안에서만 유효한지 보여주죠. 이 장면은 ‘신세대’의 각성 역시 구세대와 똑같은 ‘일상의 폭력’을 저지르고 있음을 냉소적으로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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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루스의 추락


<버드맨>의 철학적 근간에는 ‘이카루스의 몰락의 신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는 장인인 아버지 디달로스가 만든 밀랍 날개를 달고 감옥을 탈출합니다. 아버지는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습기에, 너무 높게 날면 태양의 열기에 날개가 녹을 것”이라 경고하며 ‘중용’을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하지만 이카루스는 비행의 환희에 취해 경고를 잊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다, 밀랍이 녹아 추락해 죽음을 맞습니다. 이는 신의 영역을 넘본 인간의 오만과 그로 인한 파멸을 경고하는 고전적인 관념입니다. 리건 톰슨은 2014년의 이카루스, 그 자체였죠.


그의 밀랍 날개는 ‘진정한 예술’이라는 허울을 쓴 브로드웨이 연극이며, 그가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할 ‘태양’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을 괴롭히는 내면의 목소리, 즉 ‘버드맨’이라는 ‘에고’이자 ‘오만’입니다.


리건의 내면의 목소리 ‘버드맨’은 그에게 장엄한 제스처이자 희생으로 “이카루스처럼 날아오르라”고 부추깁니다. 이는 리건의 나르시시즘과 오만이 장엄한 광경으로서의 자기 파괴(자살)를 속삭이는 순간입니다. 리건이 무대에서 총을 쏜 직후, 스쳐 지나가는 몽타주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혜성 같은 물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시각적 변주이기도 합니다.


리건 톰슨은 ‘할리우드 광대’라는 낮은 비행(추락)과 ‘진정한 예술가’라는 높은 비행(오만) 사이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중용의 길을 찾지 못했죠. 그가 선택한 파괴적인 비행은 이카루스의 추락과 오버랩되며, ‘진정성’을 향한 열망이 어떻게 자기 파괴적인 ‘오만’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철학적 상징으로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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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 지옥의 종말: 마침내 '컷'이 찾아오는 순간


리건의 폐쇄적인 1인칭 시점을 강제하기 위한 ‘컨티뉴어스 숏’ 형식은 리건이 연극 무대 위에서 실제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는 순간까지 고통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리건이 총을 쏜 직후, 관객은 영화 사상 처음으로 명백한 ‘컷’을 목격합니다. 그 순간 저는 너무 자유롭고 시원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병실로 바뀐 장면, 리건은 코에 붕대를 감은 채 깨어납니다.


이 ‘컷’은 영화 전체의 문법을 깨뜨리는 가장 중요한 상징적 행위입니다. ‘컨티뉴어스 숏’이 리건의 불안하고 폐쇄적인 ‘주관적 지옥’이었다면, 무대 위에서 ‘진짜 피’를 흘리며 감행한 그의 마지막 행위는 그 지옥을 끝내기 위한 처절한 시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컷’은 리건 톰슨의 ‘주관적 지옥’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죽음’과 ‘재탄생’의 경계선입니다.


이 장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리건은 무대에서 이미 죽었고, 병실 장면은 그가 죽기 직전 꾸는 ‘환상’ 혹은 ‘천국’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가 ‘버드맨’이라는 자아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버드맨의 부리를 상징하는 ‘코’를 잃은 채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 했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죠. 어느 쪽이든 ‘컨티뉴어스 숏’이라는 감옥은 파괴되었고, 그와 관객, 우리는 비로소 1인칭 지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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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오르다: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영화의 마지막, 리건은 병실에서 깨어나 그토록 원했던 타비타의 ‘극찬 리뷰’를 얻고 가족의 사랑도 확인합니다. 그는 화장실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버드맨(에고)’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창틀에 올라서서 망설임 없이 뛰어내립니다.


이 모호한 결말은 크게 세 가지로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먼저 리건이 이미 무대에서 죽었거나 병원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해석입니다. 그가 원했던 모든 것(성공, 사랑)을 얻었음에도 그의 나르시시즘과 공허는 채워지지 않은 거죠. 두 번째로 그가 ‘버드맨’의 초능력을 완전히 각성하고 진짜로 날아올랐다는 해석입니다. 마지막으로 딸 샘이 병실에 들어와 아빠가 사라진 창밖을 볼 때 그녀는 처음엔 추락을 예상한 듯 아래를 보지만, 이내 시선을 하늘 쪽으로 돌리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짓습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엔딩의 의미에 정답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리건이 실제로 날았는지가 아니라 샘이 그가 날았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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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리건 톰슨의 사투는 ‘진정성 있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진정성’은 사실 ‘관심’과 ‘인정’을 갈구하는 또 다른 형태의 나르시시즘이기도 했죠.


10년 전, 영화 <버드맨>이 이 둘 사이에서 고뇌했다면, 2025년의 우리는 더 복잡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진정성’마저 ‘관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고, AI가 ‘진정성’을 모방하는 시대에 ‘진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버드맨>의 원제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가장 모호하고도 강력한 답변입니다. 영화는 감독의 의도대로 우리에게 사실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리건은 날았을까, 아니면 추락했을까? 그는 이미 무대에서 죽은 걸까, 아니면 병실에서 새로운 코를 얻고 다시 태어난 걸까?


영화가 거부하는 이 ‘정답’이야말로, 2025년을 사는 우리를 지배하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함정입니다.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진정성을 검증하며, 사실을 확정하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AI가 인간의 창의성을 모방하는 지금, 이 강박은 더욱 심해졌죠.


<버드맨>이 제시하는 미덕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관심 경제’의 화신이었던 샘은 창밖을 볼 때 처음엔 추락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 아래를 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들어 위를 선택하며 미소 짓습니다. 이것이 바로 <버드맨>이 말하는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일 것입니다. 리건이 '날았는가, 추락했는가'라는 '증명'의 세계를 초월해, '날아올랐다'는 '의미'의 세계를 선택하는 태도 말이죠.


리건의 비행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예술이기에, 상징이기에 샘은 마침내 아버지를 이해합니다. 우리는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예술에 본능적으로, 감각적으로, 직관적으로 끌리게 됩니다. 바로 그 예술작품을 만든 '인간'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2025년, AI가 '진짜 같은' 예술을 무한히 생성하고 알고리즘이 데이터로 '정답'만을 요구하는 시대에, 샘의 이 선택은 더욱 절실한 질문을 던집니다. AI는 리건이 '날았는지', 사실을 데이터로 분석할 순 있어도, 샘이 바라본 '비상'의 의도와 그 의미의 가치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퍼스널 브랜딩’을 해야 한다고 떠드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좋아요’와 ‘조회수’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AI가 인간의 고통 없는 예술을 만드는 시대. ‘진정성’은 가장 증명하기 어려운 가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2025년 지금, ‘진정성’과 ‘관심’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지친 우리에게 <버드맨>은 묻습니다. 당신은 사실을 '증명'하는 데이터의 세계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샘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의미'와 '본질',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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