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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그 슬프고도 따뜻한 시선

by 조하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넷플릭스를 통해 드디어 공개되었습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델 토로 감독이 <판의 미로>, <셰이프 오브 워터> 등을 만들기 훨씬 이전부터 수십 년간 염원해 온 ‘필생의 꿈 프로젝트’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늘 인터뷰에서 “나는 괴물과 사랑에 빠졌다”, “괴물이야말로 세상의 편견에 상처받기 쉬운 순수한 존재”라고 말해왔죠. 감독의 전작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델 토로라는 사람 자체가 소외당하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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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 토로 감독이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창조주에게 버림받고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한 ‘크리처’야말로 그가 평생 이야기해 온 ‘아웃사이더’의 원형이기 때문이죠. 델 토로는 이 고전을 통해 ‘누가 진짜 괴물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진짜 공포는 크리처의 꿰맨 살점이 아니라 ‘연민의 부재’에 있다”라는 자신의 오랜 신념을 스크린에 집대성합니다.


공개된 지 얼마 안 됐지만, 이미 평단과 대중은 “숨 막히는 프로덕션 디자인”, “가슴을 저미는 서사”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거장 감독 델 토로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고통스럽고도 숭고한 걸작”이라는 호평이 주를 이룹니다.


이러한 영화의 완성도 뒤에는 델 토로와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명장들이 있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로 오스카를 거머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음악을, <나이트메어 앨리>의 댄 로스츠센이 촬영을 맡아 델 토로 특유의 어둡고 환상적인 ‘고딕 미장센’을 완벽하게 구현해 냈습니다.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캐스팅과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합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역을 맡은 오스카 아이작은 <문나이트>, <듄>, <인사이드 르윈> 등 매 작품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복잡한 내면 연기를 선보여 온 배우입니다. 이번에는 세대적 트라우마와 지적 오만에 갇힌 창조주 ‘빅터’를 맡아 극의 비극적인 무게 중심을 든든하게 잡아줍니다.


<유포리아>와 <솔트번>의 청춘스타에서 <프리실라>의 ‘엘비스’로 완벽하게 변신했던 제이콥 엘로디가 ‘크리처’를 연기합니다. 부서졌으면서도 우아하고 가련한 영혼을 표현해 낸 그의 연기에 찬사가 이어지고 있죠. 특히 <유포리아>에서 전형적인 남성성을 상징하던 배우가 그 극단에 있는 ‘크리처’가 되었다는 건 델 토로 감독이 의도한 아이러니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펄>, <X>, <서스페리아> 등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며 ‘호러의 아이콘’이 된 미아 고스는 ‘엘리자베스’ 역을 맡아 <프랑켄슈타인>의 무정한 비극 속에서 ‘연약한 양심’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냅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델 토로 감독 특유의 아름답고 장엄한 미장센과 스타일,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다시 태어난 작품입니다.











괴물을 만든 괴물: 빅터와 크리처, 서로를 비추는 거울


빅터의 오만: 상처가 상처를 낳을 때


델 토로의 이야기 속 빅터는 지적 오만에 사로잡힌 천재이기도 하지만, 대물림되는 트라우마를 겪은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냉혹한 아버지의 억압적인 교육과 감정적, 신체적 학대와 방치 속에서 ‘인간애’를 잃어버린 모습이죠.


빅터의 창조 행위는 순수한 지적 탐구가 아니었음을 영화는 분명히 말합니다. 자신이 겪었던 학대와 방치를 자신의 피조물에게 그대로 대물림하는 비정하고 슬픈 트라우마의 반복일 뿐이죠. 상처받은 아이가 무정한 부모가 되어 또다시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비극의 순환 속에서 빅터는 신이 되려 했으나, 결국 자신을 파괴한 아버지의 유령을 재생산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어머니의 유령: 붉은 피와 흰 우유


델 토로의 캐스팅 중 가장 대담하고 탁월한 선택은 바로 미아 고스의 1인 2역입니다. 그녀는 젊은 '엘리자베스'인 동시에, 빅터의 죽은 어머니 '클레어'를 연기합니다.


이 파격적인 캐스팅은 빅터라는 인물의 뒤틀린 심리를 관통하는 '시각적 선언'임과 동시에 빅터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이 트라우마는 빅터의 출생 그 자체에서 시작됩니다. 빅터는 출산으로 사망한 어머니의 붉은 피를 뒤집어씁니다. 생명을 만들다 죽음을 맞은 어머니에 대한 끔찍한 원죄죠. 그리고 영화는 이 '붉은 피'의 트라우마에 갇힌 빅터가, 영화 내내 강박적으로 '흰 우유' 만을 마시는 모습을 비춥니다.


이는 '붉은색(피/죽음/트라우마)'과 '흰색(우유/생명/모성)'의 시각적 대비이자 충돌입니다. '흰 우유'를 통해 잃어버린 모성을 갈구하는 빅터는, 결국 여성을 배제하고 스스로 생명을 창조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가 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엘리자베스에게 집착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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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좇는 슬픈 추격: 끝나지 않는 애증의 굴레


크리처와 빅터가 평생 서로를 좇는 이유는 단순한 미성숙함이나 복수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델 토로의 영화는 이 관계가 일방적인 추격이 아닌, 창조주와 피조물이 서로를 놓지 못하는 '상호적 집착'이자 '애증의 굴레'임을 보여줍니다.


크리처에게 빅터는 유일하게 각인된 '부모'이자 '신'입니다. 맹인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성을 배운 크리처에게 빅터를 좇는 행위는 버림받은 아이가 부모의 뒷모습을 좇는 가장 원초적이고 필사적인 '연결'의 시도입니다.


하지만 이 추격은 빅터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빅터 역시 크리처를 '자신의 흉측한 분신'이자 '지워버릴 수 없는 실패의 증거'로 여기며 증오하지만, 동시에 그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못합니다. 크리처가 빅터에게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것처럼, 빅터 또한 크리처를 파괴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죄의식)를 확인받으려 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증오하고, 함께할 수 없지만 영원히 서로를 좇을 수밖에 없는 거울 같은 운명에 묶인 것입니다. '연결'을 갈망하는 크리처의 몸부림은 그래서 더 슬프고 인간적입니다. 이제 크리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리고 빅터는 그 사랑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기에 그들의 비극은 더욱 커집니다.




빅터의 마지막: 오만인가, 혹은 참회인가?


빅터와 크리처는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추앙과 배신, 달의 앞면과 뒷면처럼 한 몸과도 같습니다.


빅터는 죽기 직전 크리처에게 용서를 구하며 말하죠. “네 존재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라.” 이 말은 표면적으로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크리처가 아닌, 빅터 자신을 향한 ‘고백’일 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은 빅터 자신이 평생 실패해 온 숙제였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억압으로 인해 자신이 ‘부서진 존재’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음을 극복하겠다’는 오만한 시도로 도피했습니다.


결국 빅터의 마지막 말은 크리처에게 남기는 유일한 유산입니다. “나는 내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해 괴물이 되었지만, 너는 너의 존재(괴물성이자 동시에 인간성)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잔인한 명령이죠.


빅터 자신은 부서진 채로 살아가는 법을 몰라 실패했지만, 크리처는 그 아버지의 실패마저 유산으로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이것은 무책임과 오만인 동시에 가장 절망적인 형태의 크리처를 향한 ‘구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크리처는 빅터의 억압과 폭력의 대물림을 스스로 끊어 버립니다.



가장 인간적인 괴물: 제이콥 엘로디


제이콥 엘로디가 연기한 크리처는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사랑을 갈구하며 관객들의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의 연기를 보다 보니 제가 어릴 때 봤던 팀 버튼 감독의 1990년 作 <가위손> 조니 뎁이 떠오르더군요.


두 인물 모두 고딕 로맨스 장르 안에서 '연결을 갈망하는 아웃사이더'이자, '가장 인간적인 괴물'의 계보를 잇습니다. 두 배우 모두 '육체의 끔찍함'을 '놀라운 신체 연기'로 표현합니다. 특히 제이콥 엘로디는 195cm가 넘는 거대한 체격을 위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갓 태어난 존재의 불안정한 걸음걸이와 '부서진 듯한 연약함'을 표현하는 데 사용합니다.


무엇보다 압권은 '눈빛 연기'입니다. 끔찍한 분장 사이로 보이는 크리처의 눈빛은 창조주에게, 부모에게 거부당한 아이의 슬픔, 그리고 사랑에 대한 순수한 갈망, 그 자체입니다. 이런 그의 연기는 결국 관객들이 크리처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게 만들죠.


제이콥 엘로디는 육체의 끔찍함과 고통 속에서도 우아하고, 한없이 연약하며, 깊이 있는, 인간적인 영혼의 순수함을 스크린에 각인시킵니다. 그리고 "진짜 공포는 꿰맨 살점이 아니라 연민의 부재에 있다"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바로 그 '관객의 연민'을 끌어냄으로써 온몸으로 증명해 냅니다.











모든 장면이 서사다: 델 토로의 상징과 미장센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이야기의 밀도보다는 압도적인 미장센으로 감정을 전달합니다. 그의 영화에서 색감 활용과 카메라 움직임은 그 자체로 감정을 말해주는 언어가 되고, 미장센은 그 자체로 이야기의 본질이 되죠.


그중에서 저는 4가지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붉은 베일이 휘날리다: 트라우마의 서막


영화 초반, 빅터의 유년 시절을 그리는 이 장면은 가장 델 토로다운 시각적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는 빅토리아풍의 거대하지만 차가운 저택을 비추고, 전체적인 색감은 델 토로 영화 특유의 억압적인 청록색 톤으로 가득 차 있죠.


어린 빅터와 그의 어머니가 냉혹하고 무정한 아버지를 맞이하는 순간, 어머니의 붉은색 베일이 아름답게 휘날립니다. 델 토로의 시각 사전에서 붉은색은 억압된 생명력, 피, 그리고 위험을 상징합니다. 이 붉은 베일이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을 가리고 아버지의 어두운 실루엣과 겹쳐지는 순간, 빅터가 아버지에 대해 갖는 오이디푸스적 긴장과 트라우마, 가부장적 억압을 암호처럼 펼쳐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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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마지막: 집착의 탄생


빅터 부모의 장례식 장면은 델 토로 감독 특유의 고딕적 장엄함과 비애가 극대화되는 순간입니다. 특히 어머니의 장례식은 빅터의 집착이 잉태되는 시각적 근원이 됩니다.


관에 실려 천천히 이동하는 빅터의 어머니를 담은 탑-다운 샷은 차갑고 푸른 색조로 가득합니다. 이 창백하고 비현실적인 청록빛은 슬픔을 신비롭고 탐미적인 대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차가운 대리석 관의 이미지와 얼굴을 둘러싼 붉은 꽃의 대비는 ‘죽음’의 아름다움을 전시하고, 바로 이 순간이 빅터가 죽음을 극복하려는 집착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됩니다. 빅터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아름다우면서도 자신이 정복해야 할 미지의 영역으로 각인되는 거죠. 델 토로는 이 ‘아름다운 죽음’의 이미지를 통해 ‘생명의 창조’라는 행위로 도피하려는 빅터의 집착에 명분을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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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의 마지막: 전복된 피에타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의 죽음은 원작을 가장 급진적으로 각색한 델 토로적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원작과 달리 크리처가 그녀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빅터가 크리처를 쏘려다 실수로 그녀를 쏘게 되죠.


영화의 가장 완벽한 아이러니입니다. '붉은 피'의 트라우마 속에서 평생 '흰 우유'로 상징되는 모성을 갈구하던 빅터가, 결국 자신의 손으로 '흰색'의 웨딩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마저 '붉은 피'로 물들이며 죽인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를 되살리려던' 빅터가, 결국 '제 손으로 어머니를 다시 죽인' 가장 비극적인, 상징적 파멸입니다.


델 토로가 이토록 원작을 뒤집으면서까지 말하려던 것은, 비극의 원인을 '크리처의 복수(원작)'에서 '빅터의 내면적 트라우마(영화)'로 완전히 옮겨오기 위함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연민의 부재' 속에서 자란 빅터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연민' 그 자체(엘리자베스)를 파괴합니다. 이로써 빅터는 생명을 스스로 '창조'하고 '소멸'시키는, 감히 신에 맞선 인간, 진짜 '괴물'이 된 것입니다.


한편, 총에 맞고 쓰러진 엘리자베스를 안고 천천히 결혼식장을 빠져나오는 크리처의 모습은 결혼식의 은유로 가득합니다. 마치 신랑이 신부를 안고 문턱을 넘는 것처럼 크리처는 엘리자베스를 안고 동굴로 들어갑니다. 크리처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엘리자베스는 마치 이제 막 사랑이 시작되는 것처럼 그에게 아름다운 고백을 하죠.


이 장면은 영화에서 ‘연약한 양심’이자 감정의 핵심인 엘리자베스가 크리처에게 마지막 인간적인 접촉을 허락하는 구원의 이미지, 즉 ‘피에타(Pieta)’로 완성됩니다. ‘피에타’는 본래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담은 종교 예술의 상징적인 구도를 의미하죠. 하지만 델 토로는 이 신성한 이미지를 ‘괴물’의 품에서 죽어가는 ‘인간’으로 바꿔, ‘누가 진짜 괴물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델 토로 감독만의 휴머니즘의 절정입니다.







크리처의 마지막: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이 모든 시각적 서사는 크리처가 홀로 세상의 끝을 거니는 마지막 장면으로 수렴됩니다. 델 토로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용서와 불완전함과의 화해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혔듯 영화는 원작의 완전한 파멸 대신 고통스러운 지속을 택합니다.


빅터는 죽음 직전 크리처와 화해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 버전의 크리처는 원작과 달리 ‘불멸의 존재’라는 게 암시되죠. 그는 창조주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은 결코 죽을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얼어붙은 지평선 위를 홀로 걸어갑니다. 이는 메리 셸리의 원작이 모든 등장인물에게 부여했던 완전한 파멸과 죽음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바로 생명, 살아가는 것, 지속되는 삶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 것이니,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And thus the heart will break, yet brokenly live on).”


이때 스크린을 채우는 것은 메리 셸리 작가의 친구이기도 했던 동시대 문인 바이런 경의 서사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3편 32절입니다. 이 시구 역시 메리 셸리가 원작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완성한 1816년에 쓰인 작품입니다.


델 토로 감독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 메리 셸리의 소설의 탄생을 직접 목도한 동시대 시인 바이런 경의 시구를 삽입함으로써 이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탄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또한, 바이런 경의 시구를 통해 델 토로 감독은 우리는 ‘어떻게 부서지는가’를 넘어, ‘어떻게 부서진 채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21세기의 실존적 질문을 던지며, 고통스럽고도 숭고한 휴머니즘의 서사시로 영화를 완성합니다.


결국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부서진 마음'을 안고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크리처의 운명을 통해, 모든 인물이 파멸했던 셸리의 원작 소설과는 다른 길, 즉 고통스럽고도 숭고한 휴머니즘을 이야기합니다. 원작에서 크리처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면, 델 토로가 부여한 이 '살아가라'는 운명, 즉 '자비'야말로 원작의 비극을 넘어서는 숭고한 휴머니즘의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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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과 <프랑켄슈타인>


매 세대마다 시대상을 반영한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된 프랑켄슈타인이 나오는데,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엠마 스톤이 프랑켄슈타인을 여성으로 바꿔 만들었던 2023년의 영화 <가여운 것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란티모스 감독은 엠마 스톤이라는 여배우를 통해 자신의 페르소나와 페미니즘적 탐구를 이어왔죠.


젊고 발칙하고 대담한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이 페미니즘에 좀 더 날카롭고 뾰족하게 각을 세워 초점을 맞췄다면,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은 보다 넓은 휴머니즘이라는 시야로 따뜻하게 품는 것 같습니다. 거장 영화감독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델 토로는 자신의 애정과 연민으로 엉망진창이 된 이 세상을 바라보죠.


<가여운 것들>의 벨라 백스터는 ‘여성’이라는 젠더 때문에 억압받지만, 델 토로의 크리처는 ‘괴물’이라는 외양 때문에 배척당합니다. 란티모스가 여성의 ‘내면적 성장’과 ‘해방’에 집중한다면, 델 토로는 ‘타자’를 배척하는 인간의 보편적 공포와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세대적 트라우마’에 집중합니다. 두 영화는 원작의 서로 다른 측면을 극대화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한 쌍의 걸작과도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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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시작: 메리 셸리의 ‘내 흉측한 자식’


<프랑켄슈타인>, 이 위대한 소설은 1816년, 비 내리던 여름 ‘유령 이야기’ 내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16년은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의 영향으로 ‘여름이 없던 해’라고 불릴 만큼 날씨가 춥고 궂었다고 합니다.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 별장에 갇힌 메리 셸리는 미래의 남편인 퍼시 셸리, 바이런 경 같은 당대의 문인들과 함께 며칠째 쏟아지는 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누가 가장 무서운 유령 이야기를 짓는지 내기를 했고, 이 음산한 모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괴물,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당시 18세였던 메리 셸리는 죽은 개구리 다리에 전기를 가하면 움직이는 당대의 과학 실험(갈바니즘)에서 소설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고딕 소설의 초자연적 마법을 ‘과학’으로 대체하며 사실상 SF 장르의 문을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동시에 그녀의 삶은 탄생과 죽음의 슬픈 교차,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를 낳자마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녀 자신도 첫 아이를 잃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모든 배경 속에서 18세 여성이 쓴 이 급진적인 이야기는, 19세기 사회가 '여성' 작가에게 가했던 보이지 않는 폭력을 증명하듯 처음엔 익명으로 출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간 당시 스무 살이었던 여성 작가가 감히 생명 창조, 과학의 오만, 신성 모독과 같은 거대하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우 부적절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녀의 이름이 밝혀졌다면,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진지한 철학적 경고는 무시당한 채, 그저 ‘어린 여자의 엽기적인 망상’으로 치부되었을 겁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대신 남편인 시인 퍼시 셸리의 서문을 빌려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독자와 비평가들은 당연히 퍼시 셸리가 소설을 썼을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출판사 역시 유명 시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판매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을 가능성 또한 높았죠.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창조물에게 끝내 이름을 주지 못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빅터 프랑켄슈타인처럼, 메리 셸리 역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에 스스로의 이름을 즉시 붙여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메리 셸리의 이름은 5년 뒤인 182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제2판에 비로소 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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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목소리


바로 여기서 거대한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빅터(남성)가 여성의 고유 영역(출산)을 침범하려다 실패한 바로 그 순간, 메리 셸리(여성)는 남성의 고유 영역이었던 ‘글쓰기’(특히 과학 소설)를 통해 불멸의 성공을 거둡니다.


셸리는 자신의 작품을 ‘나의 흉측한 자식’이라 불렀습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세상에서 금기시하는 주제를 다뤘다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식을 버리고 도망친 빅터와 달리 셸리는 자신의 ‘흉측한 자식’을 세상에 당당히 내놓았습니다. 그 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용기를 낸 거죠.


남성 감독들이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괴물’의 은유에 집중할 때 하이파 알 만수르 같은 여성 감독은 2017년 작,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을 통해 18세에 <프랑켄슈타인>을 쓴 여성, 메리 셸리의 삶을 조명하며 ‘창조자(어머니)’의 목소리를 복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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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역설: 남성 감독과 '아버지'의 불안


이는 <프랑켄슈타인>의 유산을 관통하는 흥미로운 역설을 제기합니다. 메리 셸리의 원작은 본질적으로 ‘여성의 출산 영역’을 침범하고 여성을 배제한 남성(빅터)의 오만과 그 실패를 다룬, 당대 최고의 페미니즘 소설로 꼽힙니다.


이 소설은 여성을 배제하고 남성/과학의 힘만으로 생명을 창조하려는 오만한 시도가 결국 그 창조물/생명을 통제하고 억압하며, 나아가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고 ‘괴물’로 낙인찍는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을 고발합니다. 즉, 창조주(부모/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고통을 통해 '배제된 창조'가 낳은 필연적인 파멸을 그린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들은 지난 200년간 여성들이 현실에서 마주해 온 많은 제약들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거장들은 1931년 고전 <프랑켄슈타인>을 탄생시킨 제임스 웨일부터, 1994년 원작의 부활을 시도한 케네스 브래너, 그리고 델 토로와 앞서 비교한 <가여운 것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남성 감독입니다.


왜 이 소설은 남성 감독들에게 이토록 매혹적일까요? 바로 이 소설이 남성성의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불안, 즉 ‘아버지’ 되기의 실패에 대한 공포와 ‘창조주(신)’가 되려는 지적 오만을 동시에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빅터는 ‘창조’에는 성공했으나 ‘양육’에는 처참히 실패한 ‘실패한 아버지’의 원형입니다. 남성 감독들은 이 ‘신이 되려는 야망’과 ‘아버지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남성 서사의 가장 극적인 긴장을 탐구하는 데 매력을 느낍니다.


반면 여성 감독들이 '괴물' 서사 자체에 상대적으로 덜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거대 예산이 드는 장르 영화에 여성 감독이 배제되어 온 산업적 장벽이 가장 현실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남성 감독들에게 이 이야기는 '실패한 아버지'라는 철학적 은유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많은 여성 감독에게 <프랑켄슈타인>의 핵심 문제의식은 탐구할 '재료'보다는 자신들의 '일상'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 시선'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19세기 고딕 소설을 빌려오지 않아도, 이미 자신들의 영화를 통해 그 비판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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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마음으로 사랑을 배우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자체보다 그 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터넷과 SNS, AI의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이 영화의 메시지가 절실하게 다가오죠.


영화 속 크리처는 빅터에게 “Not Something, Someone! I Think! I Feel!”라고 강변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스크린 너머에 ‘Something’이 아닌 ‘Someone’이 있다는 걸 망각하고, 타인을 아바타나 이모티콘 같은 추상적인 기호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오만과 독선으로 타인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면서도,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할 'Something'이라 여깁니다. 그러다 그 'Something'이 'Someone'이라는 진실이 드러나면 충격을 받고 잠시 반성하는 듯하다가, 이내 망각하고 과오를 되풀이합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연민의 부재'가 낳은 비극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그 '부재' 속에서 '사랑'을 배우는 크리처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상처받은 크리처가 고통 속에서 사랑을 배우고 마침내 그 억압의 순환을 스스로 끊어내는 모습을 통해, 우리도 세상에 연민을 가짐으로써 그 상처의 대물림을 멈출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서로에게서 인간성을 발견하기를 거부할 때, 즉 타인에 대한 이해를 잃어버릴 때 어떤 비극이 반복되는지 보여주는 시대를 초월한 경고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배움을 아직 끝마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프랑켄슈타인>이 다시 소환되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이 작품의 교훈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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