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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홈랜드>의 히로인이 돌아왔다, 넷플릭스 시리즈 <내 안의 괴물>

by 조하나


괴물이라는 시대정신

최근 몇 년간 전 세계 콘텐츠 시장을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화두는 단연 ‘괴물’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괴물은 고질라나 드라큘라처럼 기이한 외형을 가진 판타지 속의 존재가 아닙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과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듯 이제 카메라는 “누가 진짜 괴물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2025년 11월 13일 공개된 넷플릭스 리미티드 시리즈 <내 안의 괴물>은 이러한 괴물이라는 시대정신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합니다. <홈랜드>와 <24>를 통해 현대 사회의 불안을 포착해 온 거장 하워드 고든이 총괄하고, <홈랜드>의 클레어 데인즈와 <더 아메리칸즈>의 매튜 리스라는 걸출한 배우들이 결합한 이 8부작 심리 스릴러는 장르적 쾌감을 넘어 2025년의 우리가 마주한 공포를 정면으로 관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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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매혹 사이

공개 직후 <내 안의 괴물>에 쏟아진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뜨겁습니다. 먼저 로튼 토마토 신선도 88%, 메타크리틱 76점이라는 수치는 이 작품의 완성도를 방증합니다. <가디언> 등 주요 매체는 클레어 데인즈의 신경증적인 에너지와 매튜 리스의 소시오패스 연기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결투에 찬사를 보냅니다.


“멈출 수 없는 몰입감”이라는 호평과 “피로할 정도의 긴장감”이라는 대중들의 반응도 흥미롭습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인물의 병리적 심리는 일부 시청자들에게 피로감을 주기도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2025년 현재, 현대인이 느끼는 내면의 불안을 정확히 대변한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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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스틱 누아르와 프로이트: 오물이 역류하는 집


이 드라마는 ‘도메스틱 누아르’라는 장르에서 출발합니다. 보통 ‘누아르’라고 하면 어두운 뒷골목과 갱스터를 떠올리지만, 도메스틱 누아르는 범죄의 현장을 우리가 매일 잠드는 침실과 부엌, 즉 ‘가정’으로 옮겨옵니다. 가장 안전하고 따뜻해야 할 집이 가장 숨 막히는 공포의 공간으로 변할 때, 인간의 심리는 벼랑 끝으로 내몰립니다.


주인공 애기 위그스(클레어 데인즈)의 넓은 저택은 이 장르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린 아들의 비극적 죽음 이후 은둔해 버린 그녀에게, 고립된 대저택은 안식처가 아니라 무너진 내면을 형상화한 화려한 감옥입니다. 특히 드라마 초반, 집 배관에서 오수가 역류하여 바닥을 적시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기억이나 욕망, 죄책감을 무의식 속에 억지로 묻어둔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묻어둔 감정은 썩고 부패하여, 언젠가는 왜곡된 형태(증상)로 반드시 다시 튀어 오른다는 것이죠. 마치 배관 속에 억지로 밀어 넣은 오물이 결국 역류하여 집안을 더럽히듯 애기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삶을 침범하고 있음을 이 장면은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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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괴물: 트라우마와 권력의 충돌


이처럼 트라우마로 가득 찬 ‘집’이라는 무대 위에서 드라마는 두 명의 주인공과 그들 내면에 도사린 두 종류의 현대적 괴물을 대립시킵니다.


내면의 괴물(애기 위그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애기는 ‘상실’과 ‘자기 파괴’라는 괴물에 갇혀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은 그녀를 세상과 단절시켰지만, 새로운 먹잇감이 나타나자 그녀의 괴물성은 광적인 ‘집착’으로 진화합니다. 그녀는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작가적 본능을 빙자하여 타인을 사냥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잊으려 하는, 또 다른 의미의 피에 굶주린 ‘포식자’입니다.


사회적 괴물(나일 자비스): 애기의 옆집으로 이사 온 억만장자 나일(매튜 리스)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입니다. 아내 살해 용의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와 권력으로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갑니다. 그의 괴물성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소시오패스적 폭력성이자, 시스템 위에 군림하는 특권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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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건 아름답다


안토니오 캄포스 감독은 이 두 괴물의 대결을 시각화하기 위해 ‘데칼코마니’ 기법을 영상 언어로 채택했습니다.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폈을 때 나타나는 대칭 무늬처럼 카메라는 집요할 정도로 화면을 좌우 대칭으로 구성하거나 유리와 거울을 통해 인물을 이중으로 비춥니다. 이는 두 사람이 단순히 ‘추격자’와 ‘도망자’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상이자 도플갱어임을 암시합니다.


이 기묘한 유대감은 음악을 통해 폭발적인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특히 다섯 번째 에피소드 ‘광란의 밤’에서 나일이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명곡 ‘Psycho Killer’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시리즈의 미학적 정점입니다. 가사 속 화자처럼 현실 감각이 해리된 채 춤을 추는 나일과 이를 공포가 아닌 흥미로 지켜보는 애기. 두 사람이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서로의 야수성을 확인하며 공모하는 이 순간은 이 작품에서 가장 공포스럽고도 서늘하고, 한편으론 애잔한 장면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춤은 토킹 헤즈의 신경증적인 독백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같은 에피소드의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흐르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Let’s Dance’는 이 기괴한 유대를 완성하는 또 다른 열쇠가 됩니다.


‘붉은 구두를 신고 우울을 춤추자(Put on your red shoes and dance the blues)’라는 가사는 절망 위에서 펼쳐지는 쾌락, 즉 죽음 위의 춤을 상징합니다. 보위가 수많은 페르소나를 통해 자신을 숨기고 드러냈듯 나일은 ‘매력적인 억만장자’라는 가면을 쓰고, 애기는 ‘애도와 비통함에 잠긴 작가’라는 가면을 쓴 채 서로를 탐색합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비극, 즉 ‘아들의 죽음’과 ‘아내의 살해’라는 무덤 위에서 가장 화려하고 위태로운 왈츠를 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아름다움과 예술이 야수성과 폭력성과 불가분으로 얽혀 있음을 은유합니다. 우리가 범죄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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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생태계: 공모와 방관의 얼굴들


이 시리즈의 괴물은 나일 자비스만이 아닙니다. 드라마는 나일을 둘러싼 인물들을 통해 거대 자본과 권력이 어떻게 시스템을 무력화하고 개인을 파멸시키는지 정교하게 그려냅니다.



올리비아 베니테즈: 이상주의의 좌절

젊은 시의원 올리비아 베니테즈(앨리스 섀넌)는 나일의 부동산 개발 사업에 반대하며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열정 가득한 젊은 정치인입니다. 그녀는 ‘사회적 괴물’에 맞서는 법과 시스템의 희망을 상징하지만, 나일에게 그녀는 제거해야 할 장애물일 뿐입니다. 올리비아의 고군분투와 좌절은 자본이라는 괴물 앞에서 정치적 이상이 얼마나 쉽게 무력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브라이언 애벗와 에리카 브르통: 썩어버린 방패

FBI 요원들의 운명은 이 드라마의 가장 비관적인 지점입니다. 나일의 전처 실종 사건을 집요하게 쫓던 브라이언 애벗(데이비드 라이온스) 요원은 정의를 갈망하지만, 알코올 중독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실패한 영웅’입니다. 그는 애기에게 나일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진실에 다가가려 하지만, 결국 나일의 분노 앞에서 무참히 살해당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의 동료이자 연인인 에리카 브르통(헤티엔 박) 요원입니다. 그녀는 브라이언을 감시하고 나일 측에 정보를 흘리는 내부의 배신자입니다. 공권력인 FBI조차 나일의 자본과 권력에 포섭되어 피해자(애기)가 아닌 가해자(나일)를 보호하는 ‘괴물의 경호원’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줍니다.


브라이언 애벗의 죽음과 에리카 브르통의 방조는 정의가 권력으로 무장한 폭력을 이길 수 없다는 현시대의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선언과도 같습니다.



릭과 니나: 침묵의 대가

나일의 삼촌이자 해결사인 릭(팀 귀니)은 감정을 거세한 채 “충분하다(Enough)”라는 실용주의적 논리로 가족마저 살해하는 시스템의 관리자입니다. 반면, 나일의 아내 니나(브리타니 스노)는 안락함을 위해 진실을 외면해 오다 뒤늦게 각성하지만, 결국 나일이 남긴 핏줄(아기)을 안고 평생 공포 속에 살아가야 할 운명에 처하죠.









“Karma's a Motherfu*ker”


<내 안의 괴물>의 결말은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경고한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명제를 넘어 우리 모두를 이 거대한 쇼의 관객이자 공모자로 끌어들입니다.


시리즈에서 애기는 나일의 범죄를 폭로해 베스트셀러 작가로 재기합니다. 그녀는 괴물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괴물의 서사’를 상품화하여 성공한 또 다른 ‘포식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타인의 비극을 콘텐츠로 소비하는 현대 미디어의 모습입니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 살아남은 니나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며 애기의 내레이션이 흐릅니다.


“Karma's a motherfu*ker.”


여기서 카르마는 인과응보의 윤리가 아니라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거부할 수 없는 생물학적 유산을 의미합니다. 괴물(나일)은 육체적으로 소멸했으나, 그가 남긴 폭력성과 죄악은 아이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짊어져야 할 유전자이자 운명이 되었습니다. 괴물은 죽었지만, 그 업보는 가장 순수한 생명인 아기를 통해, 그리고 그 이야기를 소비한 우리를 통해 끈질기게 유전될 것입니다.


<내 안의 괴물>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괴물을 혐오하는가, 아니면 안전한 유리벽 뒤에서 괴물의 춤을 구경하고 싶은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 작품조차, 결국은 우리가 넷플릭스에서 가장 열렬히 소비한 매혹적인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기의 시선을 빌려 괴물을 사냥하는 스릴을 즐겼지만, 드라마가 끝난 후 꺼진 화면에 비친 것은 어쩌면 괴물의 이야기를 배불리 먹고 난 우리 자신의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드라마는 막을 내렸지만, 우리 안의 거울은 아직 깨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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