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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이웃’이라는 완벽한 반어법

경찰 캠과 CCTV만으로 제작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완벽한 이웃>

by 조하나


911의 음성, 그리고 감독의 애도


영화는 칠흑 같은 어둠 속, 한 통의 전화 음성으로 시작됩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완벽한 이웃>의 포문을 여는 것은 다급한 비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이할 정도로 침착하고 자기 확신에 찬 항변입니다.


“나는 ‘완벽한 이웃’이에요.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아요.”


이 목소리의 주인공 수잔 로린은 이 전화를 건 직후, 문을 두드리던 이웃 아지케 오웬스를 향해 총을 발사합니다.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명명하는 가해자의 이 자기 인식은, 역설적이게도 이 다큐멘터리가 해부하고자 하는 거대한 비극의 서막입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지타 간디르 감독에게 이 사건은 사회 고발 그 이상이었습니다. 희생자 아지케 오웬스는 감독의 시누이와 가장 친한 친구였죠. 가족과도 같은 이의 비극을 접한 감독은 이 죽음을 여느 범죄물처럼 선정적으로 소비하지 않겠다고, 대신 국가적 트라우마와 법의 모순을 파헤치는 ‘인본주의적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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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의 미학: 진실이라는 방패와 투명성의 역설


감독은 이러한 연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파격적인 형식을 선택했습니다. 영화는 매끈하게 연출된 재연이나 전지적 시점의 해설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경찰관의 거친 호흡이 담긴 바디캠, 순찰차의 대시캠, 그리고 911 녹취록과 같은 파편화된 디지털 기록들입니다.


많은 관객이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타인의, 그것도 가해자의 영상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공개해도 법적 문제는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플로리다주의 독특한 법적 환경인 ‘선샤인 법’에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도 가장 강력한 정보 공개를 보장하는 이 법에 따라, 수사가 종결된 경찰의 모든 기록물은 ‘공공 기록’이 되어 대중의 접근이 가능해집니다. 제작진은 이 법적 근거를 통해 은폐될 뻔한 사건의 '날것'을 합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수잔 로린은 옥중에서도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며 소송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진실’은 명예훼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어 수단입니다. 영화에 담긴 로린의 인종차별적 발언과 모순된 진술은 제작진의 편집이 아닌, 경찰의 공적 기록에 박제된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바디캠과 CCTV만을 고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법정 제시형 서사입니다. 로린은 끊임없이 “나는 공포에 떨던 연약한 피해자”라고 주장합니다. 감독은 이에 맞서기 위해 가장 객관적이고 차가운 증거들을 관객 앞에 들이밉니다. 가해자가 흑인 이웃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불렀던 공권력의 시선(카메라)과 보안 장치들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민낯, 즉 아이들에게 인종차별적 욕설을 퍼붓고 위협하는 모습을 폭로하는 진실의 목격자로 전복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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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실종: 놀이터가 전장이 되기까지


플로리다 오칼라의 주택가, 로린에게 집 앞의 공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피어나는 공유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자신의 평온과 재산권을 위협하는 침입자들의 점령지였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백인 공간’의 방어 기제로 읽어냅니다. 흑인 아이들의 존재 자체를 ‘오염’이나 ‘위협’으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경찰에 신고하며 공권력을 사적 통제의 도구로 삼는 행위라는 것이죠.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국 사회의 독특한 현상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자신의 백인 특권을 이용해 사소한 이유로 유색인종 이웃을 감시하고, 경찰을 불러 통제하려는 백인 여성을 미국에서는 멸칭으로 ‘캐런’이라 부릅니다. 로린은 바로 이 ‘캐런’의 전형적인 행태를 보입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신고하고 인종차별적 욕설을 퍼부으며, 이웃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닌 제거해야 할 이질적인 존재, 즉 ‘타자’로 규정해 버립니다. 심리학적으로 ‘타자화’란 상대를 나와 같은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 보지 않고, 오직 ‘위협’이나 ‘혐오의 대상’으로만 분류하여 심리적 거리를 두는 폭력적인 과정을 뜻합니다. 로린에게 오웬스의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들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위험 요소’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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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허용한 살인


이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미장센은 바로 로린의 ‘닫힌 문’입니다. 사건 당일, 아이에게 롤러스케이트를 던진 로린에게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오웬스는 비무장 상태로 문을 두드렸습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은 살인을 금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 연약함이 우리에게 ‘이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로린은 굳게 잠긴 문 뒤에 숨어버렸습니다. 그녀는 문을 잠금으로써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것을 거부했고, 그 윤리적 호소를 차단해 버린 것입니다. 얼굴이 지워진 ‘단절의 벽’ 너머로, 그녀는 망설임 없이 총을 발사했습니다.


이 끔찍한 살인을 가능케 한 진짜 공범은 플로리다의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Stand Your Ground)’ 법입니다. “위협을 느낀다면 물러설 의무 없이 맞서 싸우라”는 이 법은 로린과 같은 개인의 ‘주관적 공포’에 살인 면허를 주었습니다. 통계는 더욱 잔혹한 진실을 말해줍니다. 백인이 흑인을 쏘았을 때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확률은 흑인이 백인을 쏘았을 때보다 무려 11배나 높습니다. 법이 ‘합리적 공포’라는 중립적인 언어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 실체는 우리 사회 깊숙이 내재된 ‘인종적 편견’을 법적으로 승인하고 증폭시키는 장치였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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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 판결이 남긴 씁쓸한 안도감


로린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결과에 안도할 수 있을까요? 로린의 정당방위 주장이 기각된 결정적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잠갔던 그 ‘문’ 때문이었습니다. 견고하게 잠긴 문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오웬스가 ‘즉각적인 위협’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하는 물리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재판부는 그녀가 “공포가 아닌 분노로 행동했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는 사법 시스템이 정의롭게 작동했다는 증거라기보다 로린의 행위가 법이 제공하는 인종 편향적 보호막조차 뚫고 나갈 만큼 너무나 명백하고 극단적인 ‘예외’였음을 시사합니다. 만약 문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었다면, 통계가 가리키는 대로 그녀는 ‘무죄’라는 면죄부를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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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아이들의 죄책감과 희망의 연대


영화에서 가장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은 법정 밖, 남겨진 네 아이들입니다. 피해자 아지케 오웬스는 네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비극의 시발점은 로린이 오웬스의 10살 아들에게 롤러스케이트를 던진 사건이었고, 오웬스는 오직 내 아이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그 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9살 난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이 참혹한 인과관계 속에서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씻을 수 없는 죄책감과 마주하게 됩니다. “나 때문이다”라는 가정법이 아이들의 생애를 짓누를지도 모릅니다. 엄마가 자신들을 보호하려다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숭고한 사랑의 증거인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평생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이 절망 속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영화는 오웬스의 죽음 이후 변화하는 공동체의 풍경을 비춥니다.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가던 파편화된 이웃들은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모으고, 이웃을 적으로 만드는 잘못된 법을 바꾸기 위해 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를 잃은 아이들을 품에 안는 것은 이제 ‘혈연’을 넘어선 ‘공동체’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 따뜻한 위로와 연대의 장면들은 차가운 법정 공방과 대비되며, 인간성이 상실된 시대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희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묵직하게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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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을 넘어선 파장


202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첫선을 보인 <완벽한 이웃>은 공개 직후 평단과 대중 양쪽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비평가들은 주로 이 영화가 취한 윤리적 태도에 주목했습니다. 영화 전문 매체들은 이 영화가 선정적인 재연 없이 바디캠과 같은 증거물만으로 공포의 실체를 건조하게 직시한 연출력을 높이 샀습니다. 기존 범죄 다큐멘터리가 빠지기 쉬운 가해자 서사화의 함정을 피하고, 철저하게 법정 제시형 서사를 구축함으로써 다큐멘터리의 사법적 기능을 확장했다는 평가입니다.


대중의 반응은 분노와 현실적 공포로 요약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놀라운 다큐멘터리”라는 반응과 함께, 영화 속 로린의 모습에서 자신의 이웃이나 지역 사회의 ‘캐런’을 떠올렸다는 고백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우리는 로린이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우리는 이미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 잘못된 신념과 법을 만났을 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수없이 목격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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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우리의 자세


<완벽한 이웃>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우리는 스크린 너머로 던져진 묵직한 질문과 마주합니다. 철학자 마사 너스봄은 ‘검증되지 않은 공포’야말로 민주주의를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공포는 눈앞에 닥친 실재하는 위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의 뿌리 깊은 편견과 불안이 타인이라는 스크린에 투사되어 만들어진 허상입니다. 수잔 로린이 그날 밤 문 너머에서 싸운 대상은 이웃 아지케 오웬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침입자’, ‘위협’, ‘통제 불가능한 타자’로 부풀려진 거대한 괴물과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공포는 인간의 합리적 사유를 마비시킵니다. 그것은 타인과 대화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상대를 ‘나’와 동등한 존엄을 가진 인간이 아닌, 제거하거나 격리해야 할 적으로 전락시킵니다. 너스봄은 이러한 심리적 기제가 필연적으로 ‘공격적인 타자화’로 귀결됨을 역설합니다. 로린이 굳게 닫은 문은 단순한 현관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살인을 ‘방어’로 둔갑시키는, 우리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혐오의 성채’였습니다.


감독은 친구를 잃은 슬픔을 ‘애도의 작업’으로 승화시키며 우리에게 묻습니다. 진정한 ‘완벽한 이웃’은 누구인가. 높은 담장과 감시 카메라 뒤에 숨은 자인가, 아니면 기꺼이 문을 열고 타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를 가진 자인가.


혐오가 법제화되고 불안이 상품화되는 이 시대에, <완벽한 이웃>은 억울하게 떠난 이를 기억하며 이제는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나와 서로의 손을 맞잡자는, 남겨진 자들을 향한 가장 슬프고도 간곡한 호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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