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소비하는가|넷플릭스 <자백의 대가>
(스포일러 있어요)
시린 겨울바람과 함께 넷플릭스 시리즈 <자백의 대가>가 공개되었습니다.
총 12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겉보기엔 미스터리 스릴러의 문법을 따르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안윤수(전도연)와 모은(김고은), 두 여성이 벼랑 끝에서 써 내려간 처절한 생존 일지이자 우리 사회의 환부를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이 놓여 있습니다.
<자백의 대가>가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드라마만큼이나 치열했습니다. 당초 송혜교와 한소희 주연으로 알려졌던 프로젝트는 제작 과정의 진통을 겪으며 전도연과 김고은, 그리고 이정효 감독의 체제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우여곡절은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영화 <협녀, 칼의 기억> 이후 10년 만에 재회한 두 배우는 단순한 연기 대결을 넘어, 실존적 파동을 일으키는 압도적인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저지른 살인죄보다 더 가혹한 비난을 받으며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 안윤수는 바로 그 뫼르소의 현신처럼 보입니다.
남편이 살해된 참혹한 현장, 그 피 비린내 속에서 윤수는 뜬금없이 “저 이거 CSI에서 봤어요”라며 헛웃음을 터뜨립니다. 전도연은 이 짧은 순간, 흔들리는 동공과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갈라지는 목소리를 통해 윤수의 내면이 붕괴되고 있음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합니다. 하지만 수사관들과 대중에게 그 미세한 진동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성 피해자에게 무결한 도덕성과 ‘가련한 미망인’이라는 전형적인 슬픔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가진 독보적인 서사를 마주합니다. 1999년 영화 <해피 엔드>에서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던 ‘최보라’를 연기하며 세기말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의 여성상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최보라’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 파국을 맞았다면, 25년 후 <자백의 대가>의 ‘안윤수’는 시스템의 폭력에 의해 수동적으로 파국에 내몰립니다. 하지만 전도연은 이번에도 전형성을 거부합니다. 윤수를 단순한 모성애의 화신이 아닌, “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대는 인간”으로 그려냅니다. 그녀의 기묘한 웃음은 슬픔을 강요하는 사회를 향한 본능적인 저항이자 처절한 생존 신호인 셈입니다.
한 번 ‘비행 청소년’이나 ‘범죄자’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그 사람은 사회가 규정한 이미지에 맞춰 행동하게 된다는 사회학의 ‘낙인 이론’. 김고은이 분한 ‘모은’은 이 이론이 낳은 슬픈 괴물입니다.
모은은 태생적 악마가 아닙니다. 과거 성범죄 피해자였던 동생이 언론에 의해 ‘비행 청소년’으로 매도당해 죽자, 그녀는 결심합니다. 세상이 나를 ‘마녀’라 부른다면, 기꺼이 ‘가장 무서운 마녀’가 되어주겠노라고. 김고은의 반삭 머리는 세상의 편견을 향해 세운 날 선 가시이자 갑옷입니다.
김고은의 연기는 ‘비움’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작은 아씨들>의 오인주가 감정을 투명하게 비추는 유리알이었다면, 모은은 모든 빛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입니다. 감정을 철저히 지워낸 건조한 표정, 하지만 텅 빈 눈동자 깊은 곳에는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자백의 대가>에서 전도연이 거대한 산처럼 극의 중심을 잡고 버틴다면, 김고은은 그 산을 휘감는 짙은 안개처럼 미스터리한 에너지로 화면을 장악합니다. 전도연은 인터뷰에서 김고은에 대해 “캐릭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힘이 대단하다”며, 그녀가 단순히 센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부서진 조각들을 치열하게 맞추어 냈음을 극찬했습니다. 김고은은 윤수를 이용하려는 냉혹함에서 시작해 점차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며 흔들리는 모은의 미세한 감정선을 아주 섬세하게 조율하며, 왜 자신이 동시대 최고의 배우인지를 다시 한번 증명해 냅니다.
<자백의 대가>가 그리는 공포의 실체는 연쇄 살인마가 아닙니다. 죄지은 기득권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만만한 약자는 악착같이 사냥하는 ‘시스템의 불평등’ 그 자체입니다.
‘유전무죄’의 비극과 죽음으로 내몰린 약자들
모든 비극의 시발점에는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이 있습니다. 유력가의 자식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초호화 변호인단을 통해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데 그칩니다. 그는 반성은커녕 피해자를 조롱했고, 법이 외면한 억울함 속에서 피해자와 그의 아버지는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맙니다. 드라마는 이 참혹한 인과관계를 건조하게 비추며 묻습니다. 법은 과연 만인에게 평등한가, 아니면 가진 자들의 죄를 씻어주는 세탁기인가. 윤수와 모은이 마주한 지옥은 바로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관료주의적 ‘악’과 기형적인 검찰 권력
백동훈 검사(박해수)는 “나는 결코 틀릴 리 없다”는 오만함으로 무장한 시스템의 파수꾼입니다. “안 해야 될 일을 한 겁니까, 해야 할 일을 안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문법적으로 어색한 이 대사는 그의 섬뜩한 자기 합리화를 보여줍니다. 그는 강압 수사를 ‘검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믿습니다. ‘과정의 정의’보다 ‘결과의 효율’만을 좇는 사법 권력의 끔찍한 나르시시즘입니다.
그는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보석으로 풀려난 윤수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괴롭힙니다. 그 와중에도 윤수는 백동훈 검사를 식당으로 데려가 밥을 먹이죠. 자신을 사냥하려는 포식자와 밥을 먹는 윤수의 이 기이한 행동은, 괴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는 그녀만의 투쟁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윤수의 무해한 본성입니다. 그리고 모은은 윤수의 그런 본성을 처음부터 알아본 유일한 사람입니다.
식사 도중 “도대체 왜 내 말은 안 믿느냐”고 항변하는 윤수에게, 백동훈은 덤덤하게, 그러나 섬뜩하게 본심을 털어놓습니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검사가 기소하는 근거가 ‘증거’가 아니라 개인적인 ‘믿음’과 ‘욕망’임을 자인한 순간, 윤수가 느꼈을 공포는 살인 누명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세상 전부가 잘못된 결론을 향해 광기의 질주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직관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순간 무너질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실’을 조각합니다. 드라마는 이를 통해, 검찰이라는 거대한 권력이 정의가 아닌 한 검사의 뒤틀린 신념에 의해 휘둘릴 때 평범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무력하게 난도질당할 수 있는지를 고발합니다.
친절한 방관자의 위선
백동훈이 자신의 신념에 갇힌 ‘확신범’이라면, 그 곁에서 “선배님”을 연호하며 따르는 여성 수사관은 가장 비열한 형태의 ‘방조자’입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윤수의 어린 딸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간식을 건네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좋은 사람’을 연기합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백동훈이 흘린 편향된 정보를 확대재생산하고, 강압적인 수사 상황을 “절차상 어쩔 수 없다”며 윤수 탓으로 돌리는 데 일조합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백동훈처럼 감정적이지 않은, ‘이성적인 중립’을 지키는 실무자라 믿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기계적 중립은 강자의 편에 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녀는 백동훈의 광기 어린 집착을 알면서도 “워낙 열정적인 분이니까”라며 무능하게 묵인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조직의 논리 뒤로 숨어버립니다.
드라마는 그녀를 통해 우리 사회의 뼈아픈 진실을 찌릅니다. 악은 거창한 뿔을 달고 오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간식을 쥐여주는 선량한 얼굴로, 불의 앞에서는 침묵하며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수많은 ‘친절한 방관자’들이야말로 죄 없는 윤수를 벼랑 끝으로 민 진짜 공범들입니다.
언론의 역겨운 두 얼굴
여기에 검찰과 유착한 언론의 자기모순적인 태도가 더해져 비극을 완성합니다. 언론은 초반에 검찰이 흘린 정보를 받아쓰며 윤수에게 ‘희대의 마녀’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붙여 여론재판을 주도했습니다. 대중의 분노를 부추겨 클릭 장사를 하던 그들은, 여론의 바람이 바뀌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태세를 전환합니다. “검찰의 무리한 과잉 수사가 낳은 참사.” 자신들이 마녀사냥의 선봉장이었음은 까맣게 잊은 채, 정의로운 비판자 행세를 하며 검찰을 공격하는 언론의 모습. 드라마는 진실에는 관심 없고 오직 ‘이슈’만을 좇아 말을 바꾸는 언론의 기회주의와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혐오 비즈니스와 공범이 된 우리들
보드리야르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거짓(이미지)이 현실을 대체하는 현상을 ‘시뮬라시옹’이라 정의했습니다. ‘가짜 뉴스가 진짜를 이기는 세상’이죠. 드라마 속 사이버 렉카가 윤수를 난도질하는 방식이 완벽한 예시입니다.
유튜버들이 교묘하게 편집한 윤수의 사생활 영상은 검찰이 고의적으로 언론에 유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상은 원본의 ‘맥락’을 소거한 채 자극적인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가 되어 온라인 세상에 퍼져나갑니다. 대중에게 중요한 것은 ‘진짜 안윤수(실재)’가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소비하기 좋게 가공된 ‘사이코패스 미망인(이미지)’입니다. 가짜 이미지가 진짜 현실을 압도하고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언론과 렉카는 이렇게 타인의 고통을 조작해 조회수로 환전하는 ‘혐오 비즈니스’의 상인들입니다. 그리고 더 뼈아픈 것은 그 비즈니스의 소비자가 바로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대중은 팩트 체크 없이, 이미지가 보여주는 대로 윤수를 욕하고 댓글창이라는 단두대에서 기꺼이 집행자가 되어 돌을 던집니다.
결국 윤수와 모은을 가둔 감옥은, 반성 없는 특권층, 오만한 검찰, 기회주의적인 언론, 그리고 이들이 만든 ‘마녀 사냥’에 기꺼이 참여하는 대중이 합작하여 만든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었던 셈입니다.
드라마는 인물들이 맺는 관계 속에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젠더 역학을 치밀하게 심어 놓았습니다. 남성 캐릭터들의 뒤틀린 욕망과 여성 캐릭터들의 실존적 연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서사를 관통합니다.
백동훈의 집착: “감히 여자가 나를 속여?”
백동훈 검사(박해수)의 윤수에 대한 집착은 묘한 기류를 형성하며 ‘사랑’을 의심케합니다. 하지만 이는 로맨스라기보다 ‘통제 욕구’에 기반한 사적인 집착에 가깝습니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백동훈의 이 대사는 그의 무의식을 대변합니다.
그에게 여성 피의자 안윤수는 ‘가련한 미망인’ 아니면 ‘사악한 마녀’, 즉 자신의 통제 가능한 프레임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윤수는 밥을 먹자고 하거나 기묘하게 웃으며 그의 예측을 끊임없이 벗어납니다. 그의 집착은 “내 이성(남성/검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이 여자를 기어이 굴복시켜,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수컷의 오기”입니다. 이는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정복하고 해답을 내려야 할 수수께끼로만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장정구의 무력함: 시스템에 부서지는 ‘선의’
안윤수의 국선 변호사 장정구(진선규)는 이 잔혹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얼굴’을 한 남성입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를 철저히 무력하게 그립니다. 스펙도 요령도 없는 그는 거대한 기득권 카르텔 앞에서 계속 패배합니다. 진선규 배우가 보여주는 그 땀 냄새 나는 처절함은 ‘법대로 하면 반드시 지는 세상’의 아이러니를 증명합니다.
그의 패배는 역설적으로 윤수와 모은이 왜 법 밖의 방식(사적 복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비극적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그는 윤수를 살인마가 아닌 사람으로 대우해 준 유일한 존재였지만, 기울어진 시스템 안에서 ‘착한 남성’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비극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진영인의 위선: ‘내 여자’를 지키기 위해 ‘남의 여자’를 지우다
반면, 모은의 변호사이자 진범인 진영인(최영준)은 가장 기만적인 형태의 ‘가부장적 폭력’을 상징합니다. 그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인을 저지른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은폐합니다. 여기에는 소름 끼치는 ‘여성의 급 나누기’가 작동합니다. 그에게 아내는 지켜야 할 ‘성역(내 가족/명예)’인 반면, 모은과 윤수는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이자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는 자신의 완벽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내 울타리 안의 여자는 보호하되, 울타리 밖의 여자는 철저히 착취한다.” 이 이중잣대야말로 한국 사회 기득권 남성들이 보여주는 ‘스위트홈’의 실체이자, 악의 평범성입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한 헌신적인 남편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아내)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지옥으로 밀어 넣은 괴물일 뿐입니다.
최수연의 실체: 무해한 얼굴을 한 ‘순수한 악’
남편 뒤에 숨어 있는 진범, 최수연의 존재는 이 드라마가 말하는 ‘괴물’의 정의를 다시 쓰게 합니다. 그녀는 안윤수나 모은처럼 ‘센 캐릭터’나 ‘마녀’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아하고, 연약하며,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무해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야말로 죄의식이 거세된 진짜 괴물입니다.
그녀의 살인에는 생존을 위한 절박함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기분, 자존심, 혹은 삐뚤어진 소유욕 같은 사소한 이유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그리고 마치 실수로 컵을 깬 아이처럼 남편 뒤로 숨어버립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감당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유아적 악’을 보여줍니다.
최수연이 진범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 백동훈 검사와의 취조 장면은 그녀의 오만함을 정점에서 보여줍니다. “당신의 살인 정황 증거가 충분하다”는 검사의 압박에,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되묻습니다. “안윤수도 이런 식으로 시작했죠?” 이 대사는 방어가 아닙니다. ‘증거’보다 ‘권력’이 위에 있음을 아는 자의 여유이자, 안윤수를 사냥했던 검찰의 실패를 비웃는 조롱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안윤수와는 다른 ‘계급’에 속해 있음을 확신합니다. 법은 안윤수 같은 약자에게만 가혹할 뿐, 특권층의 견고한 성벽 안에 있는 자신에게는 무력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는 억울한 윤수와 모은에게 ‘마녀’라는 낙인을 찍어 돌을 던졌지만, 진짜 마녀는 가장 안전하고 호화로운 성 안에서 ‘천사’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드라마는 최수연을 통해 특권층의 우아함 뒤에 숨겨진 도덕적 파산과, 자본이 만들어준 면죄부를 고발합니다.
모은의 연대: 이름을 공유한 퀴어(Queer)적 구원
이처럼 폭력(진영인)과 기만(최수연)으로 점철된 부부의 '악'의 반대편에, 모은이 보여주는 숭고한 연대가 있습니다. 모은이 그토록 윤수를 지키려 했던 동력은, 과거 자신에게 이름과 신분을 내어준 한 여성(과거의 모은)과의 기억에서 비롯됩니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정체성)’을 내어준다는 것은 육체적 사랑을 초월한 ‘영혼의 결합’을 상징합니다. 모은은 자신을 구원해 준 그 여성에 대한 사랑과 부채감을 윤수에게 투영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희생에는 사랑 이상의 비극적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과거 모은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피해자 유가족이었으나,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결국 사적 제재를 가하는 ‘가해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녀는 마지막 순간, 분노에 삼켜져 진영인을 죽이려는 윤수에게서 자신을 봅니다. 모은의 선택은 윤수가 자신처럼 피해자에서 살인자로 타락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자아를 공유한 여성들이, 자신들을 도구로 여기는 세상에 맞서 서로의 존엄을 지키고, 끝내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남게 하려는 필연적인 구원 서사로 완성됩니다.
물론 드라마가 성취한 주제 의식에 비해, 장르물로서의 완성도까지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냉정하게 말해 범죄 스릴러로서 <자백의 대가>는 치밀함보다는 허술함이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장르적 엄밀함을 기대한 시청자들에게는 개연성의 구멍들이 꽤나 크게 다가올 법합니다.
특히 후반부 반전의 핵심인 변호사 진영인(최영준)을 둘러싼 설정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자신의 범죄를 덮기 위해 피해자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이나, 모은이 곁에 있는 그가 진범임을 정말 몰랐는지에 대한 의문은 서사의 설득력을 떨어뜨립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 역시 두뇌 싸움의 쾌감보다는 기능적으로 급하게 봉합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이 ‘서사의 공백’은 역설적으로 배우들의 진가를 증명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전도연과 김고은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조차 눈빛과 호흡만으로 납득시켜 버립니다. 특히 김고은은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단 한 순간도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캐릭터의 감정선을 팽팽하게 유지합니다.
관객들이 헐거운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몰입할 수 있었던 힘은 온전히 두 배우에게서 나왔습니다. 전도연의 얼굴이 곧 개연성이었고, 김고은의 눈빛이 곧 서사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시청자들이 “두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가 대본의 구멍을 메우고, 납득시켰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입니다.
<로맨스가 필요해> <이두나!> <사랑의 불시착> 등의 전작들로 ‘로맨스 장인’이라 불리는 이정효 감독은 이 작품을 ‘겨울의 온도’로 채색했습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차가운 블루 톤과 교도소의 잿빛 콘크리트 벽은 두 여자가 처한 고립감을 피부로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감독은 그 차가운 공간 속에서도 두 배우의 눈빛 교환이나 미세한 손짓을 클로즈업하며, 마치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처럼 끊어지지 않는 감정의 온기를 포착해 냅니다.
여기에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을 작업한 남혜승 음악감독의 스코어가 덧입혀집니다. 긴박한 스릴러의 문법 대신 선택한 몽환적인 재즈 선율과 슬로우 템포의 음악은, 사건의 잔혹함보다 인물의 황폐한 내면을 파고들며 ‘지옥의 온도’를 완성합니다.
이들의 연대는 <델마와 루이스>의 낭만보다는 <친절한 금자씨>의 서늘함을 닮았습니다. 금자씨가 “너나 잘하세요”라며 홀로 복수의 길을 갔다면, 윤수와 모은은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지옥을 건넌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처음엔 서로를 이용하기 위한 비열한 거래로 시작했지만, 벼랑 끝에서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순간 그들은 타인의 지옥을 함께 견디는 처절한 생존 동맹으로 진화합니다. 감독은 과도한 기교 대신, 벽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두 배우의 눈빛과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통해, 이 지옥 같은 세상에 피어나는 유일한 온기를 포착해 냅니다.
드라마의 결말은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전복시키며 완성됩니다. 지라르는 “공동체는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무고한 희생양을 찾아 폭력을 전가한다”고 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윤수와 모은을 희생양 삼아 씹고 뜯었습니다.
그렇다면 2025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무엇을 감추기 위해 이 두 여자를 제물로 삼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시스템의 무능’과 ‘기득권의 부패’입니다. 검찰과 언론은 진범을 잡지 못한 공권력의 실패를 덮고 사회적 동요를 막기 위해, 빠르고 자극적인 먹잇감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피해자다움’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벗어난 윤수와 모은에게 ‘마녀’라는 딱지를 붙여 화형시킴으로써, 가부장적 질서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대중의 집단적 불안을 해소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결말부, 모은은 타의에 의해 죽는 수동적인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마지막 희생양’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그녀는 윤수를 살리기 위해 주체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짐으로써 이 광기 어린 세상의 폭력의 사슬을 끊어버립니다. 이는 시스템이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죽이려 했던 마녀가, 도리어 스스로를 희생해 또 다른 마녀(여성)를 살려냄으로써 야만의 사회에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숭고한 복수입니다.
살아남은 윤수가 딸과 함께 모은이 그토록 꿈꾸던 태국 치앙마이를 찾아가 그녀의 유품인 시계를 걸어놓는 장면은, 비극이 아닌 구원입니다. 그곳의 따뜻한 햇살 아래서 모은은 비로소 사회적 낙인을 벗고, 존엄한 ‘인간’으로 윤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정효 감독이 제목의 ‘대가’를 치러야 할 값(Price)뿐만 아니라, 큰 스승이나 대가(Master)라는 중의적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듯 이들이 치른 대가는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삶의 무게, 그 자체였습니다.
<자백의 대가>가 남긴 여운이 유독 길고 시린 이유는, 이 드라마가 2025년 지금의 한국 사회가 앓고 있는 병증을 정확히 찌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타인의 불행이 나의 도파민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클릭 몇 번으로 누군가의 삶을 난도질하는 사이버 렉카의 영상에 열광하고, ‘정의 구현’이라는 가면을 쓴 채 악플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상화된 ‘혐오의 알고리즘’ 속에 갇혀 있죠. 드라마 속 안윤수와 모은을 벼랑 끝으로 몬 것은 살인마 한 명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콘텐츠로 소비하며 즐거워했던 우리 사회의 민낯이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의 엔딩은 이 차가운 비극 속에서도 기어이 희망의 증거를 찾아냅니다. 살아남은 윤수가 모은이 그토록 원했던 치앙마이의 햇살 아래 섰을 때, 그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었습니다. 모은이 죽음으로 지켜낸 윤수의 삶은, 이제 그 자체로 모은이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음을 증명하는 영원한 기록이 됩니다. 윤수가 차고 있던 모은의 시계는 멈추지 않고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는 죽은 자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산 자가 짊어져야 할 기억의 의무를 상징합니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지만, <자백의 대가>는 정반대의 답을 내놓습니다. “홀로 견디면 지옥이지만, 함께 끌어안으면 그곳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다”라고 말이죠.
서로를 물어뜯어야만 내가 산다고 믿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 드라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타인의 지옥을 구경하며 즐기는 방관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기꺼이 그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 손을 잡아주는 구원자가 될 것인가.
결국 안윤수와 모은이 치른 ‘자백의 대가’란, 혐오와 차별로 얼룩진 이 세상에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대’라는 잊혀진 가치를 되돌려놓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숭고한 비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현실의 겨울은 여전히 춥습니다. 하지만 이 두 여자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한, 우리는 무심코 던지려던 돌을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그 멈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그 작은 다짐이야말로, 이 잔인한 겨울을 끝내고 봄을 불러올 유일한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