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시대, 아름다워서 더 불쾌한 현실의 지옥
베니스와 토론토는 환호했습니다. 반면, 한국 관객은 침묵했습니다. 해외에서는 ‘미학의 정점’이라 찬사 받은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왜 유독 한국에서는 ‘불쾌한 경험’으로 남았을까요? 극명하게 엇갈린 반응의 간극, 그 속에 숨겨진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심연을 들여다봅니다.
박찬욱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 <어쩔수가없다>(I Can’t Help It)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독특하면서도 위태로운 지점에 서 있습니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2005년 작 이후 두 번째 영화화 사례이자, <헤어질 결심> 이후 박찬욱이 던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블랙 코미디입니다.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선정, 그리고 제50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 관객상 수상. 화려한 이력은 이 영화가 세계 영화계의 중심에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 성취와 달리, 국내 반응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엇갈립니다. 영화는 “박찬욱 미학의 정점”이라는 찬사와 “불쾌하고 작위적인 부조리극”이라는 혹평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타이틀 <어쩔수가없다>에는 맞춤법의 기본인 ‘띄어쓰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과감하게 띄어쓰기를 배제한 표기법에는,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치밀한 연출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영화는 해고된 제지 전문가가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어쩔 수가 없다’라고 띄어 쓰면 단어 사이에 ‘틈’, 즉 공간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를 모두 붙여 씀으로써, 영화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일말의 빈틈도 없으며 숨 쉴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절박한 상태임을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빽빽한 자간은 주인공을 옥죄는 심리적 압박감과 고립감을 대변합니다.
또한, 띄어 쓴 ‘어쩔 수가 없다’가 평범한 서술문이라면, 붙여 쓴 ‘어쩔수가없다’는 마치 하나의 고유명사나 확고한 개념처럼 다가옵니다. 이는 살인이라는 극단을 선택하면서도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상황 때문이다”라고 믿으려 하는 주인공의 자기 합리화를 반영합니다. 단순한 상황 진술이 아니라, 그가 처한 운명적 비극 그 자체를 상징하는 기호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띄어쓰기가 없는 문장은 독해의 호흡을 멈추거나 급하게 만듭니다. 이는 영화가 보여줄 주인공의 폭주, 그리고 멈출 수 없는 파국으로 향하는 속도감을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박찬욱의 전작들이 개인적 원한이나 금기된 욕망에 기반한 ‘복수’의 서사였다면, <어쩔수가없다>는 철저히 경제적 논리에 입각한 ‘생존’의 서사입니다. 주인공 유만수(이병헌)는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이자, 사랑스러운 아내 미리(손예진)와 두 자녀를 둔, 소위 ‘성공한 중산층’의 전형입니다. 그러나 구조조정이라는 파도는 그의 견고했던 낙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영화는 자본주의 시장을 냉혹한 ‘제로섬 게임’으로 규정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명제는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규칙입니다. 만수는 자신을 해고한 시스템에 저항하는 대신, 시스템이 남겨둔 단 하나의 의자(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옆 사람을 찌르는 길을 택합니다.
이는 조르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을 환기합니다. 법의 보호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존재, 즉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생명’. 실직은 단순히 소득의 상실이 아니라, 사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추방되어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잉여 인간’이 된다는 원초적 공포를 의미합니다.
만수는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타인을 먼저 제거하려 듭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의 모습은 그 역시 언제든 시스템에 의해 폐기 처분될 수 있는 부속품에 불과함을 더욱 비참하게 증명할 뿐입니다.
영화는 세 겹의 레이어를 겹쳐 놓습니다. 재취업을 위한 연쇄 살인이라는 ‘범죄/노동 드라마’의 외피 속에, 가장의 권위와 가족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가족 드라마’를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역사와 공간의 드라마’가 흐릅니다.
만수의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닙니다. 월남전 참전 용사였으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살인을 저지르는 만수, 그리고 훔친 아이폰을 묻는 아들. 이 3대의 비극은 집과 마당의 나무 아래 묻힌 범죄의 증거들을 통해 중첩됩니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번영이 누군가의 희생과 죽음 위에 위태롭게 세워졌음을 암시하는 은유이기도 합니다.
“어쩔수가없다.” 이 말은 만수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논리이자 견고한 방패입니다. 동시에 주체적 인간으로서 짊어져야 할 윤리적 책임을 기각하겠다는 비겁한 선언과도 같습니다.
만수는 사이코패스가 아닙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평범한 시민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살인을 ‘가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포장합니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연상시킵니다. 시스템이 강요한 상황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 사유(思惟)를 멈추고 기계적으로 악을 수행하는 태도입니다. 만수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되뇌며 애초에 다른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죄책감을 스스로 소거해 버립니다. 과연 만수에겐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요?
역설적이게도 만수는 영화 내내 누구보다 바쁘고 능동적으로 움직입니다. 경쟁자를 조사하고, 동선을 파악하고, 살인을 실행합니다. 이는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에서 통찰한 ‘자기 착취’의 전형입니다. 규율사회가 타인(주인)의 강제로 돌아갔다면, 성과사회인 지금은 “난 할 수 있어(Can), 해야만 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스스로를 채찍질합니다. 만수는 살아남기 위해 살인조차 하나의 ‘업무’처럼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그가 느끼는 피로는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이 스스로를 땔감으로 태워버리며 발생한 ‘번아웃(소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능동적 행위의 기저에는 ‘시스템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절대적인 무기력이 깔려 있습니다. 해고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연대하거나 저항하는 대신, 휩쓸리지 않기 위해 동료를 밟고 올라서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낳은, 그리고 대한민국 경쟁 사회가 길러낸 슬픈 괴물의 초상입니다.
영화의 결말은 이 무기력한 태도가 결국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합니다. 만수는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재취업에 성공하지만, 엔딩에서 공장의 불은 하나씩 꺼져갑니다. 인간의 개입 없이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AI 소등 시스템이 작동한 것입니다. 어둠에 잠기는 만수의 모습은, 그가 죽여 없앤 경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머지않아 자동화 시스템에 의해 ‘해고(제거)’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가 저지른 살인은, 결국 꺼질 불을 잠시 유예시킨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해외 비평가들의 찬사와 달리 한국 관객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현상, 이는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해부해야 할 흥미로운 텍스트입니다.
한국 관객에게 ‘중년 가장의 실직’과 ‘내 집 마련(부동산)의 사수’는 단순한 장르적 소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존이 걸린, 뼈아픈 현실 그 자체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처럼 한국인의 신경증과 맞닿은 소재를 블랙 코미디와 부조리극이라는 화법으로 풀어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가 붕괴합니다.
서구 비평가들은 감독의 과장된 유머와 부인 미리의 기이한 행동을 ‘브레히트적 거리두기’로 해석하며 환호했습니다. 관객이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의 모순을 냉철하게 직시하게 만드는 미학적 성취로 본 것입니다. 그들에게 만수의 비극은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자, 멀리서 관망할 수 있는 우화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한국 관객에게 이 ‘거리두기’는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찰리 채플린의 명언처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관객에게 스크린 속 실직과 살인은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롱숏)’가 아니라,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 즉 ‘클로즈업된 비극’입니다. 내 집이 불타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불타는 모양이 참 예술적이지 않냐”며 농담을 던질 때 느껴지는 불쾌함, 그것이 한국 관객이 느낀 당혹감의 실체입니다.
서구인들이 만수를 ‘자본주의 시스템의 표본’으로 분석할 때, 한국인들은 그에게서 ‘우리 아빠’, ‘내 남편’, 혹은 ‘나 자신’을 봅니다. 심리적 거리가 너무 가깝기에 풍자는 조롱으로, 미학적 시도는 현실 모독으로 오독될 여지가 큽니다. 박찬욱 감독이 해외 활동을 통해 체득한 ‘관찰자의 차가운 시선’이, 펄펄 끓는 현실을 사는 한국 관객에게는 차가운 이질감으로 다가온 셈입니다.
“미장센이 과하다”라는 비판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리얼리티가 생명인 ‘해고 노동자’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화면은 지나치게 탐미적이고 연극적입니다. 빗속의 살인 장면이나 제지 공장의 압도적인 기계 미학은 시각적 쾌감을 주지만, 관객은 만수의 고통보다 화면의 ‘때깔’이 먼저 들어오는 경험에 괴리감을 느낍니다.
봉준호의 <기생충>과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는 한국 자본주의의 그늘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이란성쌍둥이 같습니다. 하지만 <기생충>이 천만 관객을 홀린 반면, <어쩔수가없다>는 300만의 벽 앞에서 멈췄습니다. 이 차이는 갈등의 축과 욕망의 방향성에서 기인합니다.
첫째, ‘수직적 전쟁’과 ‘수평적 내전’의 차이입니다. <기생충>이 반지하와 대저택, 즉 하류층과 상류층 사이의 명확한 수직적 갈등을 그렸다면, <어쩔수가없다>는 비슷한 처지의 중산층 내부에서 벌어지는 수평적 갈등을 조명합니다. <기생충>의 기택네 가족이 신분 상승을 꿈꾸는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면, 만수는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몰락하는 부르주아’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말처럼, “<기생충>이 계급 간 전쟁이라면, 이 영화는 같은 닭장 안 닭들의 더 처절한 싸움”인 셈입니다.
둘째, ‘상승 욕구’와 ‘방어 욕구’의 차이입니다. <기생충>의 동력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욕망이며, 그 폭력은 우발적이고 폭발적입니다. 반면, <어쩔수가없다>는 현재의 삶을 잃지 않으려는 ‘하강 방어 욕구’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만수의 폭력은 냉혹할 정도로 계획적이고, 마치 밀린 업무를 처리하듯 사무적 효율성을 띱니다.
셋째,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결입니다. <기생충>은 빈부격차라는 명확한 적(혹은 구조)을 상정하여 약자에 대한 연민과 기이한 통쾌함(카타르시스)을 줍니다. 그러나 <어쩔수가없다>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동료를 해쳐야만 내가 산다는 불편한 진실을 찌릅니다. 이는 카타르시스 대신 짙은 ‘동족 혐오’와 도덕적 딜레마를 안겨주며, AI와 자동화로 인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현대인의 근원적 공포를 자극합니다.
이병헌은 유만수라는 인물을 통해 ‘가장(家長)의 무게’가 어떻게 평범한 인간을 괴물로 뒤틀어 놓는지 증명합니다. 그는 살인의 순간에도 킬러의 비장미 대신 직장인의 피로함을 드러냅니다. 엉성한 몸짓,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동공, 살인 후 몰려오는 헛구역질. 이병헌은 만수가 우리 주변의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회사원임을 끔찍할 정도로 성실하게 연기합니다.
손예진이 분한 미리는 한국 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난해하고 기이한 아내 캐릭터입니다. 남편의 범죄를 묵인하고 은연중에 종용하는 그녀의 태도는 현실 감각이 거세된 인물의 광기를 대변합니다. 손예진은 이를 연극적이고 과장된 톤으로 소화했는데, 제46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 후 이어진 평단의 갑론을박은 그녀의 연기가 관객에게 낯선 파격을 안겨주었음을 시사합니다.
영화의 백미는 만수 부부와 범모(이성민) 부부(염혜란)가 뒤엉키는 시퀀스입니다. 생존을 위해 서로를 물어뜯는 이들의 난투극은 비극을 넘어 희극적인 부조리극의 정점을 찍습니다.
특히 최선출(박희순)은 만수와 외모, 경력, 처지까지 판박이인 ‘거울 이미지’입니다. 그를 제거하는 과정은 만수가 자기 자신을 죽이는 듯한 자기 파괴적 뉘앙스를 풍깁니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경쟁자가 나와 비슷할수록 싸움은 더 치열해진다(미메시스적 욕망)”고 했습니다. 만수가 자신과 가장 닮은 꼴인 최선출을 죽일 때 유독 괴로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타인 살해가 아니라 사실상 자기 자신의 미래를 죽이는 끔찍한 자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조영욱 음악감독의 선곡은 청각적 아이러니를 통해 영화의 정서를 지배합니다.
클라이맥스, 중년의 가장들이 엉겨 붙어 서로를 물어뜯는 처참한 난투극 위에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흐릅니다.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라는 유년의 순수는 피 튀기는 살인 현장과 충돌하며 극심한 인지 부조화를 일으킵니다. 노래 속 ‘빙빙 도는’ 어지러움은 만수가 느끼는 도덕적 현기증과 공명하며, 이 비극이 개인의 악의가 아닌 시대를 잘못 만난 순응주의자들의 발작임을 강조합니다.
살인 후 뒷수습 장면에서 전곡 가까이 재생되는 김창완의 ‘그래 걷자’는 더욱 기괴합니다. 흙탕물과 시체라는 참혹한 미장센 위에 얹어진 덤덤한 포크 록 선율. ‘빗물에 쓸어버리자’는 가사는 죄책감마저 씻어 내리려는 만수의 무의식적 욕망을 대변합니다. 박찬욱에게 살인은 ‘고된 노동’에 가깝습니다. 땅을 파고 시체를 옮기는 만수의 육체적 고통 위로 흐르는 이 노동요는, 살인을 생존을 위해 감내해야 할 ‘힘든 야근’이나 ‘악천후’ 쯤으로 격하시킵니다. 관객은 살인마에게서 공포가 아닌 피로와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마랭 마레(Marin Marais)의 ‘르 바디나주(Le Badinage)’는 허무주의의 정점입니다. ‘가벼운 농담(Badinage)’이라는 제목처럼, 영화는 우아한 바로크 선율을 통해 만수의 치열했던 사투가 거대한 시스템(AI와 자본) 앞에서는 한낱 무의미한 몸짓, 즉 ‘농담’에 불과했음을 잔혹하게 비웃습니다.
박찬욱의 미장센은 이야기에 종속되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웅변하는 주체입니다. 이번 작품에서 ‘제지 공장’과 ‘숲’은 서사를 압도하는 시각적 모티브로 작동합니다.
거대한 롤러에 감기는 하얀 펄프의 질감은 유약하면서도 날카로운 중산층의 속성을 대변합니다. 종이는 쉽게 구겨지지만, 동시에 손을 베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는 인간 역시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언제든 갈려 나갈 수 있음을 시각화합니다. 또한, 안락한 보금자리여야 할 집이 시체를 숨긴 무덤으로 변모할 때, 프로이트가 말한 ‘언캐니(익숙한 두려움)’가 발생합니다. 가장 편안해야 할 공간이 감옥이자 범죄 현장이 되는 순간,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더 이상 ‘따뜻한 쉼터’가 아니라 떨어지면 죽는다는 공포 속에서 사수해야 할 ‘차가운 요새’로 전락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밖 감독의 태도입니다. 과거 박찬욱이 영화를 통해 ‘복수의 정당성’이나 ‘구원’ 같은 철학적 화두를 던졌다면, 이번에는 영화적 체험 그 자체, 즉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천착합니다.
특히 개봉 후 감독의 행보는 이례적입니다. 그는 다양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거대 담론보다 ‘물리적 살인의 디테일’이나 ‘구덩이를 파는 고된 노동’을 적극적으로 해명했습니다. 이는 관객의 문해력 저하와 요약 문화에 대응하여 감독 스스로 ‘해설자’를 자처한 것처럼 보입니다. 더 이상 관객을 계몽하려 하지 않고, 부조리한 풍경을 그저 스타일리시하게 전시하는 냉소적 관찰자. 이것이 2025년의 박찬욱입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포장된 우리 시대의 비겁함과 무기력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결과물입니다. 이병헌의 안면 근육에서 경련하듯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 그것은 시스템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우리 모두의 초상입니다.
이 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유독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왔다면, 그것은 감독 박찬욱의 개인적인 공포가 짙게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터뷰에서 밝혔듯, 만수가 직장을 잃는 공포는 감독이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느낄 존재론적 사망 선고와 맞닿아 있습니다.
특히 원작에 없던 ‘AI 소등 시스템’ 결말은 결정적입니다. 인간끼리 피 터지게 싸워 쟁취한 자리가 결국 AI가 소등해 버릴 공간이라는 아이러니. 감독이 ‘거대한 헛수고’라 표현한 이 결말은, 노동의 가치가 기술에 의해 무화(無化)되는 시대에 대한 허무주의적 고백입니다. 창작자조차 AI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안, 배우 박희순이 언급한 “언제 선택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영화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결국 <어쩔수가없다>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나는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박찬욱 스스로가 미리 쓴 반성문이자 공포의 기록입니다. 관객은 거장에게서 통쾌한 해답을 원했지만, 감독은 “나에게도 답이 없다”며 항복 선언을 한 셈입니다.
한국 관객이 느낀 불쾌함의 정체는 완성도의 부족이 아닙니다. 영화가 비추는 거울 속 내 모습이 너무나 적나라하고 흉측했기 때문입니다. 박찬욱은 그 처연한 지옥도를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고 잔혹하게 전시했습니다. 극장 문을 나서며 마주하는 찝찝함은, 스크린 속 만수의 텅 빈 눈동자에서 기어이 나의 얼굴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박찬욱이 펼쳐 보인 지옥도, 그 낭떠러지 끝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고 있습니다. 어쩔 수가 없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