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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라는 이름의 중력

혼자 있는 시간의 밀도가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by 조하나


지금은 해와 달이 공존하는 시기. 낮의 길이가 줄어들고 밤의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이즈음, 숲길을 걷다 고개를 들면 한쪽엔 아직 퇴근하지 못한 하얀 낮달이, 반대편엔 출근을 서두르는 붉은 해가 동시에 떠 있는 기묘한 풍경을 마주한다. 서로 다른 시간의 주인이 한 하늘에 머무는 그 몽환적인 순간, 나는 낮과 밤의 경계, 여름과 가을의 경계, 그리고 도시와 숲의 경계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본다.



360_11월_마을_동네_산책_단풍_나무_갈대 (32).jpg 서로 다른 시간의 주인이 한 하늘에 머무는 순간, 그 경계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본다 ⓒ 조하나



하늘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더 짙고 깊은 파랑으로, 은행나무와 단풍은 질세라 더 짙고 화려한 노랑과 빨강으로 물든다. 파랑과 노랑, 이토록 선명한 보색의 대비라니! 자연이 빚어낸 이 경이롭고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멈춘다. 그 강렬한 색감 사이로 부는 가을의 찬바람엔 뚝뚝 흐르는 한여름에 대한 미련이 묻어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맹렬히 끓어오르더니, 어느새 짐을 싸서 쏜살같이 도망쳐 버린 여름에게 나는 묘한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눈치도 없이 생각보다 서둘러 도착해 버린 가을을 타박하며 옷깃을 여민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느끼는 이 서운함은 혼자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오는 감각과 닮았다.



154_11월_단풍_하늘_은행나무_산책_바람_나무 (9).jpg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느끼는 이 서운함은 혼자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오는 감각과 닮았다 ⓒ 조하나




숲속 생활을 궁금해하는 서울의 친구들이 안부 전화 끝에 조심스럽게, 그러나 반드시 묻는 질문이 있다. “거기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아?” “밤에 너무 깜깜해서 무섭지 않아?”


수화기 너머 그들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과 함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뉘앙스가 섞여 있다. ‘혼자’라는 상태는 곧 결핍이자 고립이며, 재빨리 탈출해야 할 비상 상황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칠흑 같은 숲의 어둠, 그 꽉 찬 밀도를 눈으로 더듬으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전혀. 오히려 서울에 있을 때보다 덜 외로운데?”


빈말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시리게 외로웠던 순간들은 텅 빈 방 안에 혼자 있을 때가 아니었다. 2호선 지하철, 빽빽한 시루 속 콩나물 중 하나로 끼어 있을 때 오히려 나는 가장 외로웠다. 금요일 밤, 수많은 인파가 물결치던 강남대로 한복판이나 시끄러운 파티장에서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음악 소리에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군중 속에 파묻혀 있던 바로 그 순간들.



154_11월_단풍_하늘_은행나무_산책_바람_나무 (4).jpg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시리게 외로웠던 순간들은 텅 빈 방 안에 혼자 있을 때가 아니었다 ⓒ 조하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고독한 군중>에서 “과거의 인간들이 전통이나 내면의 신념이라는 ‘나침반’을 가지고 살았다면, 현대 도시인들은 타인의 반응을 살피는 ‘레이더’를 달고 산다”고 말했다.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유행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끊임없이 스캔하는 삶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내 머리에 달린 레이더는 24시간 쉴 새 없이 돌아갔다. 타인의 취향을 내 취향인 양 착각하고, 무리에 끼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공포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다. 리스먼은 이렇게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사는 사람들을 ‘타인 지향형’ 인간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의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때 가장 큰 불안과 고립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레이더망에 수천 명의 사람이 잡히지만, 정작 내 고유한 신호를 깊이 해독해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상태. 수신되는 신호는 넘쳐나지만 해독할 수 없는 잡음뿐인 상태. 그것이 바로 군중 속의 고독, ‘도시형 외로움’의 실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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