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 화살은 유재석을 향해 휘어지는가
최근 배우 이이경이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와 <슈퍼맨이 돌아왔다> 하차 과정에서 겪은 부당함을 토로했다. 사건의 발단은 한 여성이 제기한 사생활 폭로였다. 현재 이 폭로가 조작된 허위 사실임이 밝혀지고 있지만, 그 짧은 소동에 대한 이이경의 대가는 가혹했다. 방송국은 진실을 가려 피해자를 보호하기는커녕, ‘논란이 일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를 프로그램에서 하차시키는 길을 택했다.
이이경은 하차 이후 겪은 마음고생을 털어놓으며, 특히 대중의 뇌리에 깊이 박힌 ‘면치기 논란’조차 본인의 의사가 아닌 제작진의 연출 지시였음을 시사했다. 이는 방송 권력이라는 ‘갑’이 출연자라는 ‘을’을 어떻게 소모품으로 취급하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다. 필요할 땐 자극적인 연출의 도구로 쓰고, 리스크가 생기면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꼬리를 자르는 방송계의 비정한 생리다.
그런데 대중의 분노는 흥미로운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건의 원인인 ‘허위 폭로자’나 직접 그를 내친 ‘제작진’을 넘어 프로그램의 간판 출연자인 유재석에게로 그 화살이 휘어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유재석이 하차시킨 것도 아닌데 왜 그를 탓하는가”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나는 이 현상을 단순한 화풀이로 보지 않는다. 이는 유재석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통해 폭력적인 시스템 앞에서 무력하게 배제당해 본 ‘을’들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다.
왜 그 화살은 하필 유재석을 향해 휘어졌을까.
유재석은 과거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아니 우리보다 더 처절한 ‘을’이었다. ‘메뚜기’ 캐릭터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강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구르던 그의 서사는 대중에게 깊은 동질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다르다. 그는 <유 퀴즈 온 더 블럭>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성공’을 거둔 이들의 서사를 완성해 주고, 그들의 노력을 신성시하며, ‘실패’나 ‘과정’이 아닌 오직 ‘결과’만을 미화하는 위치에 섰다. 대중에게 그는 더 이상 ‘우리들의 친구’가 아닌, 견고한 ‘시스템의 정점’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이경의 폭로는 대중에게 비단 연예계 뉴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회사에서, 조직에서 우리가 매일 겪는 강요된 희생과 편집된 진실의 기억을 소환하는 버튼이었다. 이것이 대중이 느끼는 기시감이다. 사람들은 힘없는 이이경에게서 상사의 지시로 욕먹을 짓을 하고도 침묵해야 했던 자신의 비루한 모습을 본다.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부당한 공격을 받을 때 조직은 진실을 규명하기보다 ‘조직의 안위’를 위해 개인을 희생양 삼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침묵하는 리더들이 있다. 부조리한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위에서 결정한 일이라 어쩔 수 없다”, “일단 네가 조용히 있는 게 낫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점잖게 방관하는 우리 회사의 사장님, 혹은 믿었던 상사들의 얼굴이 침묵하는 유재석의 얼굴에 겹쳐진다.
얼굴 없는 PD나 거대 방송사라는 추상적인 권력보다 우리가 믿고 사랑했던 유재석이라는 구체적인 인물에게 따져 묻는 것은 대중의 훨씬 본능적인 반응이다. “당신도 힘들게 그 자리에 갔으면서, 왜 우리와 같은 ‘을’을 보호하지 않는가?”라는 무의식적인 외침인 셈이다.
나의 기억도 다르지 않다. 조직 생활을 하며 성비위를 포함한 온갖 부조리를 마주했을 때, 나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가해자의 뻔뻔한 표독스러움이 아니었다. 같은 여성으로서, 혹은 존경받는 상사로서 힘을 실어줄 거라 믿었던 힘 있는 리더의 침묵이었다. 그녀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시스템의 논리’ 뒤로 숨던 그 비겁한 순간은 가해자의 악행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점잖은 침묵’을 목격한다.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 건립을 건의했다가 정치 세력으로부터의 살해 협박과 교육청의 감사까지 받게 된 삼척의 한 교사, 그리고 기괴한 ‘계엄 놀이’ 갑질을 폭로했음에도 “나서지 마라”는 핀잔을 들으며 폐쇄적인 공무원 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는 양양의 환경 미화원들까지.
사실 이이경이 거대 방송 권력인 제작진을 향해 날을 세운 건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견고한 방송 카르텔 안에서 소위 ‘괘씸죄’로 낙인찍힌 그를 선뜻 섭외할 제작진은 앞으로도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다시는 공중파 예능의 중심에 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묵직하다. 그는 자신에게 닥칠 배제와 외면을 예감하면서도 침묵을 깼다.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는 없지만, 적어도 깨진 계란은 그 매끈한 바위를 더럽힐 수는 있다. 무결점의 권력에 ‘부끄러움’이라는 끈적한 얼룩을 남기는 것. 이이경은 그 얼룩을 남기기 위해 자신을 던졌다.
결국 이 논란은 한국 사회가 ‘성공한 결과’보다 ‘공정한 과정’과 ‘책임지고 공감하는 권력’을 얼마나 갈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증명이다. 이이경이라는 ‘을’의 호소에 대중이 유재석이라는 ‘권력’을 소환한 이유는, 우리가 그토록 믿고 싶었던 ‘선한 권력’마저 방관자로 남는 현실에 대한 깊은 실망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살은 유재석을 향해 휘어졌지만, 그 화살이 겨누고 있는 진짜 표적은 따로 있다. 약자의 고통에 침묵함으로써 유지되는, 우리 사회의 견고한 ‘성공 카르텔’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