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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이탈리아인’ 알베르토 몬디

피해자의 고통 앞에서 논하는 ‘가해자의 입장’이라는 오만

by 조하나


말은 때로 칼보다 깊숙이 뼈를 벤다. 특히 그 말이 ‘이해’나 ‘입장’이라는, 겉보기에 합리적이고 온건한 포장지에 싸여 있을 때 그 베임의 깊이는 더욱 아득하다.


알베르토 몬디. 한국인보다 더 유려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며, 우리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알차장’이라 불리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일제 침탈의 역사에 대해 던진 발언은 그래서 더 깊은 파문을 일으킨다.


가해자에게도 “입장이 있다”는 말,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봐야 한다”는 말. 그것은 언뜻 지성인의 균형 감각처럼 들린다. 하지만 압도적인 폭력의 역사 앞에서 취하는 기계적 중립은 중립이 아니라, 가해자의 논리에 대한 암묵적 동조일 뿐이다.


알베르토는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이 아니다. 그는 2007년부터 무려 1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국이라는 토양에 뿌리내려 명성을 얻고 부를 축적했다.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변했을 그 세월은 한 사회가 지닌 집단적 트라우마의 냄새를 맡고, 그 아픔의 결을 이해하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다. 그랬기에 한국인의 정서라는 보이지 않는 공기 속에서 20년 가까이 호흡해 온 그가 내뱉은 “일본이 나쁜 게 아니다”라는 취지의 말은 단순한 실수가 아닌, 뼛속 깊이 내재된 역사 인식의 부재로 다가온다.


대중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지자 뒤늦게 내놓은 제작진과 당사자의 사과문은 “방송 편집 과정에서 맥락이 생략되어 오해가 생겼다”며 청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고, 여전히 식민 지배를 두고 ‘객관적인 역사관’을 운운했다.






강도가 들어와 가족을 유린했는데, 아이에게 “강도의 입장도 들어봐야 객관적인 사람이 된단다”라고 가르치는 것을 과연 교육이라 할 수 있는가?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 쪽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피해자가 충분히 사과받고 치유된 후에야 비로소, 아주 조심스럽게 꺼낼 수 있는 영역이다. 그것을 제3자가, 그것도 과거 일제와 ‘동맹’이었던 나라의 사람이 섣불리 입에 올리는 것은 명백한 오만이자 폭력이다. 그것도 20년 가까이 한국에 살며 한국 관련 콘텐츠로 국내외에서 돈을 버는 알베르토가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인을 타겟으로 제작한 영상에서 한 발언은 분명히 잘못됐다.


그는 끝으로 “한국을 사랑한다”는 감성적인 방패 뒤로 숨었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18년의 세월 동안 그가 사랑한 것이 한국의 ‘역사’와 ‘아픔’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이 주는 ‘달콤한 열매’뿐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 개인의 역사 인식은 그가 나고 자란 사회의 토양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발언과 사과문을 곱씹다 보면, 문득 그의 모국인 이탈리아가 걸어온 현대사의 그림자가 겹쳐 보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일본, 독일과 함께 추축국의 일원이었다.


이 지점에서 국제 사회가 냉정하게 박아놓은 ‘못’ 하나를 상기한다. 바로 UN 헌장의 ‘적국 조항’이다. UN 헌장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적이었던 국가들, 즉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을 ‘적국’으로 규정한다. 이 조항은 이들 국가가 다시 침략 징후만 보여도 UN 안보리의 허가 없이 군사적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역사가 패전국들에게 보내는 영원한 경고장이다.


알베르토의 발언이 단순한 말실수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가 바로 이 ‘적국 조항’의 대상이었던 나라, 즉 과거 제국주의의 향수와 파시즘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탈리아는 독일처럼 철저한 과거사 청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을 종종 받는다. ‘착한 이탈리아인’이라는 신화 뒤에 숨어 자신들의 전쟁 범죄를 독일의 강요 탓으로 돌리거나 희석해 온 역사가 그들에게는 있다. 가해자의 입장을 헤아려야 한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무의식 중에 내재된 ‘책임 회피’의 DNA가 발현된 것은 아닐까.


물론 시대가 변했다. 1995년 UN 총회에서는 적국 조항 삭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현재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는 가장 강력한 명분으로 이 조항을 다시 꺼내 들고 있다는 점이다. “너희는 여전히 잠재적 적국이며, 우리는 너희를 감시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인 셈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리고 그 반복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역사의 온도를 잊지 않는 것이다. 차가운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뜨거운 기억과 감시만이 비극의 재현을 막을 수 있다. UN 헌장 구석에 박제된 줄 알았던 ‘적국 조항’이 21세기에 다시 소환되는 현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는 결코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모습으로, 때로는 알베르토의 기계적 중립과 변명 섞인 사과문처럼, 때로는 국제 정세의 긴장처럼 끊임없이 우리 곁을 배회한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 예민해져야 한다. ‘이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망각의 시도를, ‘객관’이라는 가면을 쓴 가해자의 논리를 우리는 뼈저리게 경계해야 한다. 한국에서 보낸 20년 가까운 세월이 증명한 것은 그가 한국을 잘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시간만으로는 결코 역사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는 서글픈 진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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