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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스템은 고장 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을 위해서만 작동했을 뿐

by 조하나


12월 3일, 첫눈이 내렸다. 자연은 정직하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에는 어떤 위선도, 숨겨진 의도도 없다.


하지만 1년 전 오늘, 그 밤의 공기는 달랐다. 자연의 바람이 아닌, 살의(殺意)를 품은 인공의 바람이 불었고, ‘헌법’이라는 얇은 외투 하나로 버티기엔 너무도 혹독한 한파였다. 그제야 우리는 오랫동안 무심했던 내 나라의 안부를 물었다.


그날 밤, 우리는 국가라는 시스템이 멈췄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의 심장이 일시 정지되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12·3 내란 이후 지난 1년의 궤적을 복기하며 우리는 진실을 마주한다. 시스템은 고장 나지 않았다. 오직 ‘그들’만을 지키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하고 기민하게, 필사적으로 작동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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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국회였다. 계엄 해제라는 상식 앞에서는 일부 여당 의원들이 잠시 멈칫하는 척했으나, 이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상정되자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 105인은 국민의 대리인이기를 포기하고 ‘내란범의 사병’으로 전락했다. 본회의장에서 집단 퇴장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헌법 기관의 존엄이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소리를 들었다.


이 틈을 타 검찰이 등판했다. 경찰과 공수처가 내란 수사에 속도를 내려 하자,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수사 지휘권’을 발동해 사건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법리 검토 중”이라는 핑계로 수사를 지연시켰다. 압수수색 영장은 반려하고 소환 조사는 미루며, 내란범들에게 증거를 인멸할 ‘골든타임’을 선물한 것이다. 그들에게 수사권은 진실을 밝히는 칼이 아니라 권력자를 지키기 위한 방패였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 아래서 검찰은 정의를 구현하는 기관이 아닌, 범죄를 세탁하는 거대한 세탁소가 된 지 오래였다.





어디 그뿐인가. 체포 영장 집행을 위해 공권력이 서초동으로 향했을 때, 금배지를 단 의원들이 ‘인간 방패’를 자처하며 벌인 그 기이한 육탄전. “나를 밟고 가라”는 그들의 비명은 민주주의 수호가 아닌, 범죄 피의자를 은닉하기 위한 가장 추악한 스크럼이었다. 법은 권력의 문턱 앞에서 멈춰 섰고, 그들은 승리감에 도취해 스크럼을 풀었다.





탄핵 소추안 1차 표결이 여당의 집단 퇴장으로 부결되자, 그들은 더 대담한 도박을 감행했다. 12월 8일 오전, 한동훈 당시 여당 대표와 한덕수 국무총리가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섰다. 그들은 “대통령을 직무에서 배제하고, 자신들이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선언했다.


명백한 ‘헌법 파괴’였다. 헌법 어디에도 당 대표가 행정부 수반의 권한을 나눌 수 있다는 조항은 없다.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입법부 수장과 행정부 2인자가 야합하여 초법적 기구를 만든 셈이다. 시민들은 광장에서 “제2의 내란이다”라고 절규했으나, 그들은 이를 ‘질서 있는 퇴진’이라 포장했다. 결국 자존심 센 윤석열 대통령이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날뛰는 바람에 촌극으로 끝났지만 말이다.





시민들의 분노에 밀려 일주일 뒤 탄핵안이 기어이 가결되고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지만, 바통을 이어받은 한덕수 권한대행은 헌정 질서를 수호하는 대신 또 다른 지연 작전을 폈다. 그는 ‘식물 헌재 만들기’에 올인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3인이 공석인 상황에서 국회의 추천조차 무시하며 임명을 차일피일 미뤘다. 이는 심판 정족수 미달을 유도해 내란범에게 시간을 벌어주려는 노골적인 ‘침대 축구’였다. 국정 공백을 메워야 할 권한대행이 도리어 공백을 볼모 삼아 헌법 재판을 무력화하는, 지독한 모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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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란의 질주에 법원은 ‘법복을 입은 자객’처럼 굴었다. 대법원은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던 야당 대표 이재명의 재판을 이례적으로 빠르게 파기 환송했다. “계엄을 한 대통령도 문제지만, 야당 대표도 유죄일 수 있다”는 양비론을 퍼뜨리기 위한 비열한 판결이었다.






반면,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해서는 전례 없는 ‘시간 계산법’을 동원해 석방시켜 주었다. 사법부의 법리는 야당 대표를 잡는 그물이었고, 내란범을 풀어주는 비상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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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수라장의 정점은 여당의 대선 후보 교체 쇼였다. 평생을 기회주의적 관료로 살아온 한덕수는 새벽 4시에 당비 2만 원을 내고 기습 입당해 대선 후보 자리를 바꿔치기를 준비했다. 압권은 그 직후의 행보였다. 그는 광주 5·18 묘역으로 달려가 유족들 앞에서 뻔뻔하게 외쳤다. “저도 호남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란에 동조하고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던 그가, 계엄 피해자들의 땅에서 ‘사랑’을 운운하는 모습은 코미디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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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서 최상목 권한대행(경제부총리)은 더 기괴한 짓을 벌이고 있었다. 국가 비상사태 속에서 그가 챙긴 것은 민생이 아니라 ‘의전’과 ‘때깔’이었다. 의전 차량을 대통령급으로 격상시키고, 청년 구직 행사장에서 한가롭게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으며 흡족해했다. 엄동설한 광장에서 시민들이 울분을 토할 때, 나라의 리더라는 자는 거울 앞에서 자신이 ‘여름 쿨톤’인지 ‘가을 웜톤’인지를 확인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차라리 한 편의 그로테스크한 블랙 코미디였다.


군과 행정부 수뇌부는 ‘아이히만’이 되어 “위에서 시켰을 뿐”이라며 증거를 인멸했고, 언론은 기계적 중립을 가장해 내란 세력에 지속적으로 마이크를 쥐어 주며 스피커 노릇을 했다. 그들이 펜대와 마이크로 가스라이팅을 하는 동안, 정작 ‘V0’라 불린 김건희와 비선 실세들(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등)은 장막 뒤로 완벽하게 숨어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 난리 통에도 어둠 깊숙한 곳에서 잔을 부딪치며, 자신들을 위해 완벽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더 용감하게 싸우지 못한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비겁한 자들은 그 화려한 권력의 중심에서, 헌법과 법전, 그리고 가면을 쓰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춤추던 그들이다.


1년 전 오늘, 시민들은 총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으나, 권력 기관은 시민이 아닌 내란범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날 밤, 대한민국의 시스템과 그들만의 견고한 카르텔은 건재했다. 그 시스템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작동했는지, 그리고 누가 그 시스템의 부품이 되어 우리를 배신했는지, 여전히 가려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지겨워하면 안 된다. 지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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