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은 파괴됨으로써 그 쓸모를 다한다
잡지사 에디터로 밥벌이를 하며 수많은 ‘스타’들을 만났다. 렌즈 앞에서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빛나던 그들이, 카메라가 꺼지면 얼마나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인지 목격하는 일은 내게 일상이었다. 인터뷰 도중 화장실로 달려가 소속사가 먹인 다이어트 약을 게워 내던 여자 아이돌, 매니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우울증을 고백하던 남자 아이돌, 극심한 결핍과 불안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배우들. 나는 그들의 비명을 기사로 쓰지 않았다. 대중은 환상을 샀고, 나는 그 환상을 깨뜨려서는 안 되는 침묵의 거래자였으니까.
끝내 그 판의 동조자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잡지사를 나오며 얻은 결론이다. 좋아하되 추앙하지 말 것. 재능과 인격을 혼동하지 말 것. 나의 결핍과 구원을 그들에게 투사하지 말 것.
배우 조진웅이 언론사의 보도가 나온 지 하루 만에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대중은 그가 연기했던 우직하고 정의로운 형사 ‘이재한’을 사랑했지, 불완전한 인간인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 ‘아버지의 이름’을 쓴다는 그 서사에 매료되었던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이상향(정의, 우직함, 낭만)을 투사했고, 끝내 그 거울이 깨지자 참을 수 없는 멀미를 앓았다.
‘환멸(幻滅)’이란 문자 그대로 ‘환상의 커튼이 걷힌다’는 뜻이다. 신화가 사라진 세계는 너무나 건조하고 시시해서, 우리는 그 낙차를 견디지 못하고 분노한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느낀 것은 짙은 기시감, 그리고 섬뜩한 광기다.
언론과 대중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를 단죄의 제단 위에 올렸다. 언론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소년범’이라는 키워드를 문장 맨 앞에 내세워 기사를 줄 세웠고, 댓글창은 마치 작업이라도 한 듯 ‘이재명 소년범’과 같은 유언비어와 정치적 음모론의 내용으로 도배됐다. 너무나 딱딱 맞아떨어지는 이 기묘한 흐름은 누군가가 짜놓은 판 위에서 놀아나는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보였다.
배우는 소년범 처벌 사실은 인정하되 성범죄 의혹은 명확하게 부인했지만, 진실 따윈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대중은 이미 그를 성범죄자라고 믿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사법 시스템이 무너진 시대, 다들 서로가 정의로운 사적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적 제재가 불법인 이유는 개인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역량과 시스템에 접근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그 권한을 공권력(검찰, 경찰, 사법부)에 위임했다.
하지만 요즘 사법부가 신뢰를 잃은 탓인지, 온 국민이 직접 판사가 되기로 작정한 것 같은 깊은 광기가 느껴진다. 영화 <굿뉴스>에 나온 것처럼 대중은 ‘일어난 사실 + 약간의 창의력 + 믿으려는 의지’라는 위험한 공식으로 타인을 단죄한다.
조진웅은 진실과 상관없이 성범죄자로 낙인찍혔고, 이미 배우 이선균을 잃은 기억을 떠올리며 이성을 갖고 살피자는 사람들에겐 “피해자의 심정을 헤아려야 한다. 네 딸과 아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봐라”라는 저주 섞인 비난이 일었다. 그토록 정의로운 그들만의 공감은 아이러니하게도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기반한 집단 린치의 무기가 되었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범죄 피해자에 예민하고 경각심이 높은 줄 미처 몰랐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하루 평균 약 100여 건 이상의 성범죄가 발생하고, 처벌은 여전히 솜방망이에,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2차 가해도 심각하다. 최근 법원 판결에 의하면 9세 여아를 성폭행한 60대 남성은 고작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았고, 전자발찌 부착도 기각됐다.
그런데 왜 유독 이 사건에만 이토록 뜨거운가? 만약 후에 조진웅이 성범죄자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익명의 판사를 자처했던 일부 대중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가?
부디 그 정의로운 인민 판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성범죄와 피해자, 말도 안 되게 낮은 양형 기준에도 똑같이 분노하고 목소리 내길 바란다.
‘공익’과 ‘알 권리’를 위함이라며 불법으로 취득한 연예인의 사적 정보를 폭로(소년범 기록 공개는 명백한 개인정보법 위반이다)한 <디스패치>는 상대가 이에 대해 반박하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기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예상을 깨고 앞으로 남은 그의 연기 인생까지 포기해 버렸다. <디스패치>는 주사위 게임을 하자고 덤볐는데, 배우는 주사위를 아예 던져버린 셈이다. 이로써 ‘게임의 법칙’은 깨졌다. <디스패치>는 당황했을 것이고, 대중은 허무해졌다. 배우는 자신으로 상징화된 우상을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최근 본 유명인 중 유일하게 책임을 지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남기고 퇴장했다.
배우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탁현민이 기획한 행사에 자주 등장하고,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에 참여하고,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한 목소리를 내며, 올해 국회 광복절 행사에도 등장했다. 아무리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 국민의 상식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해도, 어느새 양극으로 갈라져 버린 대한민국의 현재 정치 상황에서 자신이 특정 진영의 정치적 상징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배우가 정치적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건 그만큼 치를 대가가 크다는 걸 본인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변명 한마디 없이 사과하고 은퇴하는 것이 자신이 정치적 신념을 표한 진영에 대한 책임이라 여겼을 것이다.
현실은 비극적인 모순으로 가득하다. 우리 사회는 서로를 감시하고 단죄하는 데에는 유능하지만, 정작 거악(巨惡)과 시스템에는 무기력하다.
연예인 비난은 간단하고 쉽다. 눈앞에서 치워버리면 즉각적인 효능감이 든다. ‘내가 목소리를 내니 저 스타가 사라지는구나!’ 하지만 정치나 시스템을 바꾸는 일은 더디고 지루하며 스펙터클 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만만한 연예인에게는 성인군자의 도덕성을 요구하면서, 정작 사과하지도, 반성하지도, 은퇴하지도 않는 정치인과 판사, 기업인들에게는 관대하다.
연예인은 ‘공인(公人)’이 아니다. 그저 ‘유명인’일뿐이다. 공인도 아닌 이들에게 들이대는 그 서슬 퍼런 칼날을 우리 사회의 ‘진짜 공인’들에게 겨눴다면, 대한민국은 진작에 선진국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우상은 파괴됨으로써 비로소 그 쓸모를 다한다. 배우 조진웅은 스스로를 파괴하며 배우로서의 쓸모가 다 했다고, 우리에게 작별을 고했다.
한바탕 굿판이 끝나고 나면 찾아오는 것은 허무뿐이다. 우리는 그 허무함을 견디지 못해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돌을 집어든다.
대한민국은 오늘도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아니, 어디서 보아도 잔혹극이다. 굿뉴스도 배드뉴스도 아닌, 그저 ‘나의 뉴스’만이 진실이 되는 세상. 이 소란스러운 환멸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필요한 건 뜨거운 광기가 아니라 차가운 이성, 그리고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둘 줄 아는 성숙함이다. 이 허무를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조금 더 건조하지만, 훨씬 더 정확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자, 이제 사과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고, 은퇴하지도 않는 정치인과 판사, 기업인들에게 눈을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