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왜 모든 게 오디션 서바이벌일까?
“이영훈 같은 뮤지션이 왜 굳이 <싱어게인> 같은 오디션 프로에 나와야만 할까?”
오랫동안 인디 음악 씬을 지켜봐 온 지인들이 탄식하며 내뱉은 말이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분노, 그리고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나 역시 인디 음악 씬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한 사람으로서 <슈퍼스타K>와 <쇼미더머니>로 시작된 본격적인 ‘서바이벌의 시대’를 또렷이 기억한다. 단지, 그러한 형식이 음악이라는 본질적인 내용을 뒤덮고 이토록 오래 고착화되어 예술음악계를 잠식할 줄은 몰랐다.
음악에는 수많은 장르와 고유한 색깔이 존재하는데, 어째서 우리는 굳이 그들을 한 줄로 세워 점수를 매기고 나서야 비로소 ‘가수’로 인정하는 걸까.
사실 이것은 한국 문화계와 음악계만의 비극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우리의 서글픈 욕망이 투영된 결과다.
오늘날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현대판 콜로세움이다.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철학자 한병철이 지적한 ‘성과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착취한다. 시스템의 부조리나 무대의 부재를 탓하기보다,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간절함이 없어서” 탈락했다고 자책하며 기회를 얻은 것에만 감사해한다. 이는 타인의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자기 착취’이며, “할 수 있다”는 긍정의 구호가 역설적으로 패배자를 우울증과 소진(번아웃)으로 몰아넣는 비극의 시작이다.
한국의 채널을 돌려보면, 노래뿐 아니라 연애, 결혼, 이혼, 심지어 심리 상담 프로그램까지 모두가 서바이벌이다. 출연자들은 ‘누가 더 빌런인가’, ‘누가 더 불행한가’를 두고 경쟁한다. 시청자는 그들의 불행을 보며 ‘저 사람보단 내가 낫지’라는 위태로운 안도감을 얻거나, 출연자를 향해 돌을 던지며 스트레스를 푼다. 타인의 삶을 전시하고 채점하는 거대한 콜로세움,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대중이 이 잔혹극에 열광하는 이유는 마이클 샌델이 경고한 ‘능력주의의 폭력’과 맞닿아 있다. 복잡하고 고유한 예술적 가치를 단순한 점수로 환산해 줄 세우는 방식은, 불공정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정해 보이는 착시를 일으킨다. 한국 전쟁과 IMF를 거치며 ‘낙오되면 죽는다’는 생존 본능이 각인된 한국 사회에서, 평화로운 공존은 지루한 다큐멘터리일 뿐이다. 우리는 누군가 탈락하고, 울고, 기어이 살아남는 자극적인 드라마(서바이벌)에서만 도파민을 느낀다.
더불어 우리는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말한 ‘타자지향형’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내 내면의 취향을 믿지 못하고, 심사위원이 매긴 점수와 순위에 의탁하여 “검증된 것”만을 소비하려 한다. 평소 평가받는 ‘을’의 위치에 있던 대중은 투표권을 쥔 심사위원이 되어 참가자를 평가하며 일시적인 권력감을 맛본다. 이는 부르디외가 말한 ‘구별 짓기’의 욕망이 투영된 것으로, 결국 오디션 열풍은 예술을 즐기는 문화가 아니라, 생존과 서열을 확인하려는 사회적 병리 현상의 집약체인 셈이다.
혹자는 “경쟁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음악 시장은 유독 기형적인 ‘경쟁 과잉’ 상태다.
해외의 빌보드 차트가 데이터 ‘통계’라면, 한국의 음악 방송은 매주 생방송으로 등수를 매겨 1위에게 트로피를 수여하는 ‘시상식’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아티스트를 일주일 내내 일렬로 세워 성적표를 쥐어주는 나라는 없다.
서구권의 오디션이 시골의 원석을 발견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라면, 한국의 오디션은 이미 훈련된 연습생들이 데뷔라는 좁은 문을 뚫기 위해 서로를 밟고 올라가는 처절한 ‘검투사 경기’다.
일본이나 미국 시장이 ‘국민 1등’이 아니어도 록, 재즈, 인디 음악으로 먹고살 수 있는 ‘중산층 아티스트’의 생존을 허락하는 반면, 한국은 차트 100위 안에 들거나 방송에 나오지 못하면 곧바로 생존이 불가능해지는 ‘승자 독식’의 구조다.
한때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소속된 붕가붕가레코드는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을 모토로 내걸었다. 대박이 아니어도 좋으니, 우리끼리 즐겁게 음악 하며 먹고살자는 소박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 실험조차 결국 멈췄다. 한국의 살인적인 임대료와 물가, 그리고 압도적 1등이 아니면 기억하지 않는 대중 앞에서 ‘중간’이 설 자리는 없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결과 지상주의’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사례를 보자. 그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으로 ‘K-클래식’의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정작 그에게 한국은 그리운 고향이 아니었다.
최근 이탈리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이 그립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심지어 한국에서의 학창 시절을 “지옥 같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지목한 고통의 원인은 바로 ‘경쟁’이었다. 좁은 땅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치열한 경쟁 문화가 어린 예술가의 영혼을 파괴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가 겪은 ‘어른들의 탐욕’이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정치인과 사업가들이 찾아와 불필요한 압력을 가했다는 고백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에게 임윤찬은 존중해야 할 예술가가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줄을 세우고 이용해야 할 ‘트로피’였을 뿐이다. 세계적인 거장이 되어서도 “공연이 있을 때만 한국에 간다”며 거리를 두는 그의 모습은, 이 ‘서바이벌 공화국’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경고장이다.
다시 대중음악으로 돌아오면 현실은 더욱 처참하다. 국카스텐이 10년 넘도록 홍대 클럽에서 피를 토하듯 노래할 때는 외면하던 대중이, 경연 프로에서 1등을 하자 열광했다. 하지만 그 열광은 아티스트의 세계관(앨범)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경연에서 1등 한 그 순간'과 '남의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르는 기술'을 소비할 뿐이다.
“왜 <나가수>에서 불렀던 그 노래 안 불러줘요?” 오디션 프로그램의 성공 이후, 국카스텐 단독 공연장에서 들려오는 이 불평은 창작자를 거대한 ‘주크박스’로 전락시킨다. 자신의 철학이 담긴 곡은 외면받고, 경연에 참여했던 커버 곡만 반복해야 하는 현실은 창작자의 영혼을 갉아먹는 고문과도 같다.
더 씁쓸한 것은 ‘취향의 계급화’와 문화예술계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엘리트 카르텔’이다. 대중은 자신의 귀를 믿지 않는다. 대신 소위 ‘서울대 라인’으로 불리는 엘리트 뮤지션들이 “이 음악 참 좋다”고 보증을 서주면, 그제야 안심하고 그 취향을 소비한다.
우리가 열광했던 ‘장기하와 얼굴들’의 성공 이면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대중과 평단이 그의 ‘싸구려 커피’와 B급 정서에 환호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명문대 간판은 그의 찌질한 가사를 ‘궁상’이 아닌 고학력자의 ‘지적인 유희’나 ‘해학’으로 포장해 주는 안전한 보증수표가 되어주었다.
만약 고졸의 무명 뮤지션이 똑같은 노래를 불렀다면, 대중은 그것을 예술적 파격으로 받아들였을까? 슬프게도 한국 사회에서 ‘실패할 자유’나 ‘가난을 노래할 자격’조차 확실한 문화 자본(학벌, 인맥)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오디션에 나온 인디 뮤지션에게 “방송에 나갈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시스템의 부조리에 화를 내는 대신, 권력이 내려준 동아줄을 잡은 것을 영광으로 알라는 ‘자발적 복종’의 목소리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빛은 있다. 최근 세상을 떠난 대학로의 버팀목 故 김민기 선생은 평생을 후배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뒷것’으로 살았다. 등수도 경쟁도 없는 그의 소극장 ‘학전’에서 수많은 명곡이 탄생했다.
지금도 밴드 실리카겔이나 바밍타이거 같은 젊은 아티스트들은 방송의 간택을 기다리는 대신, 자신들만의 문법으로 시스템 밖에서 팬덤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은 증명한다. 남들이 매기는 점수판 위에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고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영훈이,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예술가들이 굳이 오디션이라는 링 위에 올라가 피를 흘리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 음악을 점수가 아닌 가슴으로 듣는 사회. 누군가 1등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마음을 울렸다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박수 쳐 줄 수 있는 사회.
그런 세상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TV 리모컨을 쥔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것은 음악인가, 아니면 타인의 생존 경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