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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제로섬 게임’에 갇힌 교실과 아이들

2025년 대한민국의 몸은 1980년대의 정신에 갇혀 있다

by 조하나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 하고, 너의 권리가 높아지면 나의 권위는 추락한다.”


2025년 12월 16일,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서울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이 국민의힘 주도로 서울시의회에서 또다시 가결됐다.


이번에 가결된 폐지안은 주민조례발의안 형식이지만, 내용은 지난해 4월 의원 발의로 시의회를 통과했던 폐지안과 사실상 같다. 이에 교육청은 집행정지를 신청했고, 대법원은 지난해 7월 이를 인용해 조례 폐지 효력을 정지시켰다. 본안 판단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울시의회가 1년 반 만에 동일한 취지의 폐지안을 다시 처리하면서 ‘사법부의 판단을 무시한 의결’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무책임한 어른들의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정치적 승패의 논리가 교육 현장마저 집어삼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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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인권이 교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은 일면 타당해 보일 수 있다. 서이초 사건 이후 무너진 교권의 현실 앞에서 교사들은 절규했고, 일부 정치인과 그 지지자들, 그리고 교육 전문가들은 그 원인으로 학생인권조례를 지목했다.


그러나 13년간 서울 교육의 한 축이었던 제도를 충분한 숙의 없이 ‘폐지’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도려낸 것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라기보다 갈등을 ‘섬멸’하려는 폭력에 가깝다.


여전히 ‘절대 빈곤의 생존 본능’과 ‘군사독재의 트라우마’가 짙게 드리워진 한국 사회는 언제나 ‘공존’보다 ‘절멸’을 택한다.


오늘날 의사결정권을 쥔 기성세대는 ‘내가 먼저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결핍의 시대를 살았다. 한정된 파이를 두고 벌인 처절한 경쟁은 ‘약자를 배려하면 내 몫이 줄어든다’는 공포를 DNA에 새겼다. 여기에 학교가 곧 병영(兵營)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더해진다. 제식 훈련과 체벌이 일상이었던 그 시절, 폭력은 ‘사랑의 매’로 미화되었고 통제는 곧 효율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경험은 ‘맞으면서 커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생존자 편향을 낳았고, 자신이 겪었던 억압을 후세대에 전가하는 비극적 대물림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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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타적 생존 본능’은 학생인권조례의 ‘차별 금지(성별, 종교, 장애, 출신국가, 임신·출산, 성적 지향, 학업성취도 등)’ 조항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조항의 본질은 특정 성향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을 당하거나 왕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마치 장애인 차별 금지가 장애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듯, 이 또한 마찬가지다.


반대 측은 “학교에서 이를 교육하면 아이들이 따라 한다”며 눈과 귀를 막으려 한다. 하지만 이는 위험한 착각이다. 학교가 침묵한다고 해서 아이들의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빈자리는 왜곡된 음란물과 자극적인 알고리즘이 채우게 된다. “가르치지 않으면 순수해질 것”이라는 믿음은, 아이들을 정보의 바다에 면역력 없이 내던지는 무책임한 방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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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명백한 시대적 퇴행이다. UN 인권이사회는 이미 한국 정부에 “학생 인권 조례 폐지는 국제 인권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선진국들은 ‘폐지’가 아니라 ‘정교한 균형’을 택한다. 미국 뉴욕시는 ‘권리 및 책임 장전’을 통해 학생의 권리만큼이나 타인의 학습권을 침해하지 않을 책임을 강조한다. 영국과 독일은 교사에게 수업 방해 학생을 분리하거나 제재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확실히 부여한다. 그들은 시스템을 보완해 ‘윈-윈’을 모색했지, 제도를 없애 ‘제로섬’을 만들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하드웨어적으로는 2025년의 선진국이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1980년대식 ‘찍어 누르기’에 머물러 있다.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갈등을 모두 ‘밥그릇 싸움’으로 치환해 버리는 사회적 풍토가 교실까지 침투한 것이다.


무엇보다 뼈아픈 문제는, 교육이 정치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였으나, 지금의 한국 교육은 선거 임기에 휘둘리는 ‘오년지소계’가 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시의회의 다수당이 바뀔 때마다, 교실의 규칙은 손바닥 뒤집듯 바뀐다.


교실 안의 문제는 학생과 교사, 학부모라는 당사자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합의해야 할 영역이다. 그러나 지금은 교실 밖 ‘외부자’들이 정치적 이념의 잣대를 들고 들어와 현장을 난도질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그저 이념 전쟁의 대리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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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로섬 게임을 멈춰야 한다. 대안과 해법을 ‘제도 섬멸’이나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시스템의 교체’에서 찾아야 한다.


첫째, 심판과 선수를 분리해야 한다. 교사는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고, 생활지도와 징계는 전담 교사나 시스템이 맡아 교사가 ‘악역’을 맡지 않도록 완충지대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응보적 정의’에서 ‘회복적 정의’로 나아가야 한다. 잘못한 학생을 처벌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행동이 공동체에 어떤 피해를 줬는지 직면하게 하고 책임을 지게 하는 교육적 절차가 필요하다. 셋째, ‘파이’를 키워야 한다. 콩 한쪽을 나눠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나 이기적이 된다. 학급당 학생 수 감축과 상담 인력 확충을 통해,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권이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교권을 세우는 승리의 열쇠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직도 ‘민주적 갈등 해결’에 실패하고 있다는 패배의 증명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네가 이기려면 남을 밟아야 한다”는 야만의 법칙이 아니라, “서로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나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연대의 문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가 교실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교육의 존엄을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 2025년의 서울,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어른들이 해야 할 진짜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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