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라는 환각
정규직은 높고,
비정규직은 낮고,
하청은 더 낮으며,
여성은 거기서 더 낮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부당하게 좋은 혜택을 받는 자리를 만들어 놓고,
시험 잘 봤다고 그 자리를 차지해 특권을 누리는 것.
이것이 공정한가?
최근 고용노동부 업무보고에서 나온 대통령의 작심 발언은 우리 사회의 환부를 정확히 찔렀다.
공정(公正). 본래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탄생한 이 따뜻한 개념이,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공격하는 서로를 찌르는 흉기가 되었다.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할 공정이, 이제는 인간을 겨누는 칼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2030 세대를 중심으로 분출되는 공정 담론은 납작하고 선택적이다. 사람들은 "시험 룰을 지켰는가?"라는 절차적 투명성에만 집착하며,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된다고 느끼는 순간 맹렬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군 가산점 폐지' 논란이 대표적이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결을 내린 결정적 이유는 단지 '여성' 때문이 아니었다. 신체적 사유로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또 다른 남성(장애인 등)'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 판결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 진실은 교묘하게 소거되었다. 오직 "여성 때문에 내 혜택이 사라졌다"는 식의 선동만이 남아, 혐오를 부추기는 불쏘시개로 악용되고 있다. 정작 OECD 가입 이래 부동의 1위를 기록 중인 성별 임금 격차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왜곡한다. "능력 차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며 구조적 차별을 묵살해 버리는 것이다. '유리천장'과 '경력 단절'이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은 외면한 채, 오로지 결과 성적표만을 들고 우월감을 드러내는 태도. '천박한 능력주의'라고 이름 붙여야 할 것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경고한 '능력주의의 폭정'은 한국 사회를 집어삼켰다. 샌델은 능력주의가 승자에게는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나의 노력 덕분"이라는 '오만(Hubris)'을, 패자에게는 "나의 실패는 내가 못난 탓"이라는 '굴욕(Humiliation)'을 심어준다고 지적했다. 승자의 오만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괴물을 만들고, 패자의 굴욕은 시스템에 대한 분노 대신 자기혐오나 더 약한 존재를 향한 혐오를 낳는다.
진짜 문제는 거대한 수익을 독점하는 산업 구조와 원청의 횡포에 있다. 그러나 화살은 엉뚱하게도 정규직 vs 비정규직, 남성 vs 여성이라는 약자들 간의 혐오와 갈등으로 향한다. 본질적인 파이는 그대로인데, 부스러기를 두고 누가 더 정당한 자격을 갖췄는지 싸우게 만드는 구조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잔인한 생존 경쟁을 '정의'라고 착각하게 되었을까. 이 철학적 빈곤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1945년, 해방의 공간이 나온다. 대한민국의 첫 단추는 잘못 끼워졌다.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과 친일 경찰의 폭력 앞에 무릎 꿇었던 그날, 이 땅에는 무시무시한 생존의 법칙이 각인되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 정의를 지키려는 자는 배제되고, 힘 있는 자에게 줄을 선 기회주의자가 기득권을 쥐는 광경을 목격하며 대중은 도덕 대신 생존을 택했다.
1968년은 또 한 번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서구 사회가 68 혁명을 통해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개인의 자유와 상상력을 외칠 때, 우리는 박정희 정권 아래서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해야 했다. 일제 강점기의 잔재인 전체주의적 병영 문화는 학교와 공장을 거대한 군대로 만들었다. 우리는 스스로 사유하는 '시민'이 되는 법을 배우는 대신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효율적인 '산업 전사'가 되는 훈련을 받았다. 질문이 거세된 채 시키는 대로만 하면 떡고물이 떨어지던 시절, 우리는 몸집만 비대해진 철학적 미숙아로 성장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받아 든 참담한 성적표다. OECD 자살률 1위. 노인 빈곤율 1위. 성별 임금 격차 1위. 그리고 세계가 경악하는 합계출산율 0.6명. 이 수치들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다. "쓸모가 다하면 가차 없이 버려진다"는 것을 목격한 노인들의 빈곤, "이 지옥을 대물림할 수 없다"는 청년들의 출산 파업, "패자부활전은 없다"는 절망이 부른 자살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철학이 부재한 사회, 인간의 존엄보다 기능적 가치가 우선시되는 사회가 맞이한 필연적 파국이다.
한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정'이라는 개념에 대해 본질적, 철학적으로 사유하거나 토론하여 사회적 합의에 이른 적이 없다. 공정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가 없는 상태에서 서로 자기가 맞다고 우기기만 하니, 대화는 단절되고 혐오만 증폭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국정 보고에서 대통령이 직접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뒤틀린 능력주의의 폐해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곪을 대로 곪은 상처를 직시하고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 시스템이 과연 공정한가?
'진정한 공정'은 시험 점수로 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공정'은 단순히 룰을 지키는 게 아니라,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구조적인 불평등을 바로잡는 것이다. '운'과 '배경'의 작용을 인정하는 겸손함이며,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도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바닥을 다지는 연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번 기회에 사회 구성원들이 '천박한 능력주의'를 걷어내고,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는 본질적인 공정의 철학을 다시 세우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한다. 그것만이 소멸해 가는 대한민국을 구할 유일한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