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과 폭탄 사이, 길 잃은 혁명을 다시 쓰다
2025년 9월, 폴 토마스 앤더슨(PTA)의 열 번째 장편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공개되었을 때, 전 세계 극장가는 기묘한 혼란과 열광에 휩싸였습니다.
무려 1억 7,500만 달러(한화 약 2,590억 원)라는 거대 자본이 투입된 이 영화는 2억 510만 달러(한화 약 3,035억 원)라는 수익을 올리며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그 속살은 블록버스터의 문법을 배반하는, 가장 난해하고 정치적인 텍스트로 채워져 있었죠.
다가오는 2026년 1월에 열리는 제8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영화 부문 최다인 9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큰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드라마 부문이 아닌 뮤지컬·코미디 부문으로 분류되어 경쟁합니다. 후보에 오른 부문은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음악상, 남우조연상입니다. 특히 남우조연상 부문에서는 숀 펜과 베니시오 델 토로가 같은 영화로 경쟁합니다.
감독은 토머스 핀천의 1990년 소설 <바인랜드(Vineland)>를 가져와, 원작이 다루었던 1980년대 레이건 시대의 풍경을 ‘오바마 시대의 초입’이던 16년 전의 희망에서, ‘트럼프 시대의 유산’이 지배하는 2025년 현재의 절망으로 강제 이식했습니다.
여기서 ‘레이건 시대’란 단순히 198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설가 핀천과 PTA 감독에게 그 시대는 60년대의 자유와 평화, 히피 문화가 ‘마약과의 전쟁’과 ‘강력한 보수주의’라는 국가 권력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고 거세당했던 ‘혁명의 무덤’이었습니다.
PTA 감독은 이 배신과 패배의 공기를 2025년으로 가져와, 과거의 ‘마약 단속’이 현재의 ‘이민자 단속’과 ‘데이터 감시’로 모습만 바꾸었을 뿐, 시스템의 폭력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줍니다.
거장 마이클 만 감독이 “현대 미국의 분열과 혼란이라는 위기를 포착했다”고 극찬한 반면, 폴 슈레이더는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밥’이나 숀 펜이 연기한 ‘록 조 대령’에게 일말의 공감도 느낄 수 없었다”며 혹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양극단의 반응이야말로,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불편한 질문, 즉 ‘끝없는 전투(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결국 폴 슈레이더가 느낀 ‘불쾌감’은 이 영화가 의도한 바이기도 합니다. PTA는 관객이 이 두 남성(과거의 낭만적 영웅과 현재의 파시스트) 중 그 누구에게도 공감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매력을 거세함으로써,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진정한 주인공인 딸 ‘윌라’와 실용적 조력자 ‘세르지오’에게로 옮겨가게 만듭니다. 즉, 슈레이더의 혹평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남성 중심 서사와 가부장적 세계를 얼마나 철저하게 해체했는지를 증명하는 셈입니다.
이 영화가 주는 시각적 압도감은 단순한 스펙터클이 아닙니다. 마이클 바우만 촬영감독은 1950년대 이후 상업 영화에서 자취를 감춘 35mm 비스타비전 포맷을 부활시켜, 스크린을 ‘후기 큐브릭적 우아함’으로 채웠습니다.
여기서 ‘후기 큐브릭적 우아함’이란 스탠리 큐브릭의 말년 작품들처럼, 강박적일 만큼 정교하게 통제된 미장센이 주는 서늘한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이 질식할 듯한 완벽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일반 필름보다 해상도가 월등히 높은 비스타비전을 선택한 거죠.
그 결과 스크린에 펼쳐지는 캘리포니아의 사막과 고속도로는 아름답다기보다 아스팔트 위 아지랑이처럼 물결치는 왜곡과 에너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를 통해 화면은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수평의 감옥’처럼 다가옵니다. 광활한 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추격 씬은 단순한 액션의 쾌감을 넘어,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무너지는 몽환적 경험을 선사하며, 이 세계가 무질서를 향해 붕괴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영화의 주 무대인 가상의 도시 ‘박탄 크로스’는 이러한 이중성을 공간적으로 구현합니다. 이곳은 겉으로는 불법 체류자들의 ‘피난처 도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데이터와 물리적 국경이 중첩된 ‘감시 사회의 최전선’입니다. 밥이 구형 아날로그 폰과 현금만을 고집하며 ‘오프 그리드’ 상태를 유지하려는 모습은, 이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이 자유가 아니라 시스템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을 찾아야 하는 막막한 전장(戰場)임을 보여줍니다.
감독이 원작 소설에 등장했던 UFO나 고질라 같은 ‘마술적 장치’들을 영화에서 모두 지워버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025년의 인물들에게는 이러한 ‘환상으로의 도피’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마주해야 할 것은 하늘을 나는 UFO가 아니라 머리 위를 맴도는 ‘감시 드론’이며, 고질라가 아니라 ‘파시즘’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괴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가 빚어낸 스코어가 얹어집니다. 그는 끝없이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셰퍼드 톤(Shepard tone)’을 사용하여, 영화 내내 해결되지 않는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이는 첩보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주면서도, 제목처럼 ‘결코 끝나지 않는 전투’의 피로감을 청각적으로 구현합니다. 특히 어머니의 부재를 다룬 트랙 ‘Perfidia Beverly Hills’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 인물이 어떻게 서사 전체를 유령처럼 지배하는지를 증명하며 영화의 정서적 기둥을 세웁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혁명 단체 '프렌치 75'는 1970년대 미국의 급진적 좌파 단체인 '웨더 언더그라운드(Weather Underground)'나 '공생해방군(SLA)'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프렌치 75'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강력한 야포(French 75mm field gun)이자 샴페인과 진을 섞은 칵테일의 이름이기도 하죠. 이는 이들의 혁명이 가진 두 가지 속성, 즉 '파괴력'과 '도취감'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영화 초반부의 플래시백은 이들의 활동을 뜨거운 혁명의 젊은 날로 묘사하며, 미 연방 건물을 폭파하고 이민자 수용소를 습격하여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들의 행동을 영웅적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밥(당시 팻)은 "계획이 불분명하다"며 혼란스러워하고, 폭탄을 제조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 확신하지 못합니다.
PTA는 프렌치 75의 실패를 통해 '이벤트로서의 혁명'이 가진 한계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화려하게 폭발하고 사라지는 불꽃놀이처럼 순간적인 해방을 추구했지만, 그 이후의 지속가능한 체제나 삶의 방식을 건설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혁명은 '순간'이었고, 그 순간이 지나간 뒤 남은 것은 기나긴 패배의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프렌치 75’가 남긴 것은 체제 전복이라는 거창한 위업이 아니었습니다. 대의를 위해 딸을 버렸으나 끝내 실패한 퍼피디아,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대마초 연기 뒤로 숨어버린 밥이 그렇죠. 이들의 모습은 혁명의 낭만에 취해 구체적인 삶과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를 증명합니다. 칵테일 잔을 들고 야포를 쏘려 했던 그들의 시도는, 시스템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자신의 삶만 파괴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을 뿐입니다.
이 실패가 뼈아픈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현재’의 실상은 1980년대 레이건 시대의 망령이 트럼프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반복되는 ‘유령의 시간’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결코 죽지 않고, 좀비처럼 되살아나 현재를 잠식합니다. 밥이 겪는 공포는 단순한 피해망상이 아니라, 청산되지 않은 역사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옥죄는지를 보여주는 ‘현대판 유령 이야기’인 셈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역설을 PTA 감독은 토마스 핀천의 원작 소설 《바인랜드》에 등장하는 '타나토이드(Thanatoid)' 개념에서 가져옵니다. 소설 속 타나토이드는 '죽음과 삶 사이에 갇힌 영혼'들로 텔레비전(The Tube)에 중독되어 시간을 보내며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시스템에 대한 원한을 갚지 못한 채 부유하는 존재입니다.
영화에서 PTA는 이 초자연적인 타나토이드 설정을 제거하고, 이를 은유적인 상태로 치환합니다. 밥은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타나토이드 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16년 전 혁명의 실패 이후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채 '죽은 듯' 살아왔습니다. 그에겐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가 역사적 주체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유령과 같은 '림보'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유령의 시간'은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이 개인을 무력화시키는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밥은 시스템의 감시를 피해 숨어 지내지만, 그 숨어 지내는 것 자체가 바로 시스템이 원하는 바, 저항하지 않는 무기력한 주체를 스스로 수행하는 꼴이 됩니다. 밥은 역사적 책무를 방기한 대가로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프렌치 75의 암구호 중 하나는 질 스콧-헤론(Gil Scott-Heron)의 ‘혁명은 방송되지 않을 것이다(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와 같은 낭만적인 노랫말입니다. 과거에는 피를 끓게 했던 이념적 구호가, 2025년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는 한낱 잊혀진 유행가 가사나 시 구절, 우스꽝스러운 농담처럼 무력해진 것입니다.
특히 집결지 정보를 얻기 위해 "지금이 몇 시냐?"라고 묻는 조직원에게 답할 암구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밥의 고군분투는 영화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영화에서 밥이 끝내 답하지 못한 그 암구호는 바로, "시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지배한다(Time doesn't exist, yet it controls us anyway)"입니다.
이 대사는 영화 전체가 다루는 시간의 모순과 혁명의 순환성, 노화와 이상의 퇴색, 미국의 정치적·사회적 싸움의 영속성을 상징합니다.
밥은 과거의 혁명가였지만, 16년이 지나면서 마리화나와 편집증, 알코올에 찌든 무능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이상(혁명)을 잊어버리고, "지금 몇 시냐?"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합니다. 그는 시간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지만, 그 시간으로 인해 그는 나이 들고, 과거의 실패를 되살리고, 딸 윌라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처럼 느껴지고,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살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역설을 극대화합니다.
PTA는 의도적으로 영화 속 시간대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과거 장면(혁명 초기)과 현재(16년 후)가 기술·복장·언어 등에서 완벽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경계를 허물어버림으로써 영화 전체가 '얼터너티브 2025'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과거 60~70년대 반문화 운동도, 현재의 반이민·반파시즘 투쟁도, 결국 같은 싸움의 반복일 뿐이라는 것이죠. 지금 이 순간도, 어쩌면 과거의 반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미래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시간은 이렇게 선형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순환하며,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PTA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지배한다"라는 암구호를 통해 "혁명은 한 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한 세대가 끝나도 계속되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던집니다.
밥이 암구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은 바로 그가 잃어버린 '시간'의 증거입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밥은 딸을 구하기 위해 다시 '혁명'의 불씨를 되살리고, 결국 외면하고 도망쳤던 시간의 무게를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시간은 우리를 지배하지만,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저항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뉘앙스 또한 밥의 성장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는 전통적인 영웅 서사를 해체하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주체들을 세웁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밥’은 우리가 환호하던 고전적 액션 영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과거 ‘게토 팻’이라는 별명의 혁명가였던 그는, 이제 가장 평범한 이름인 ‘밥’이 되어 피해망상 속에 숨어 지냅니다. 그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비상 상황 집결지를 알아내기 위한 암구호를 기억하지 못해 쩔쩔매는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낭만적인 이념의 언어는 2025년의 현실 앞에서 잊혀진 노랫말처럼 무력해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이폰 작동법을 배우려 애쓰고 지붕에서 미끄러지는 그의 모습은, 더 이상 허울뿐인 가부장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으며 오히려 딸에게 보호받아야 할 ‘돌봄의 대상’으로 전락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숀 펜이 연기한 ‘록조 대령’과 그가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하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CAC)’은 현대 파시즘의 우스꽝스러운 민낯을 보여줍니다. ‘하일 세인트 닉’을 외치며 인종 청소를 논하는 이들의 모습은 ‘악의 평범성’을 넘어 ‘악의 우스꽝스러움’을 전시합니다.
그는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흑인 여성인 퍼피디아에게 성적으로, 정서적으로 매혹되었습니다. 이는 혐오와 매혹이 공존하는 페티시적 집착에 가깝습니다. 퍼피디아의 조력으로 그녀의 혁명 동지들을 소탕하고 난 후, 꽃을 들고 그녀에게 가는 행위는 '로맨틱한 자신'에 심취한 나르시시즘적 행동입니다.
록조가 윌라를 보며 부성애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단정 짓기는 힘듭니다. 숀 펜의 연기에서도 윌라를 마주했을 때 찰나의 흔들림이 스쳐 지나갑니다. 하지만 그 미세한 감정은 더 큰 욕망에 의해 철저히 억눌립니다. 록조에게 윌라는 딸이기 이전에, 자신이 쌓아 올린 백인 우월주의자로서의 명성과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라는 권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시한폭탄입니다. 결국 록조 대령은 자신의 욕망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한때 사랑했던(혹은 집착했던) 여자의 딸이자 자신의 핏줄조차 지워버릴 수 있는 괴물입니다.
꽃다발을 든 그의 모습은 그가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라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그 감정을 잔혹하게 난도질할 수 있는 위선자이기 때문에 더욱 소름 끼치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바로 PTA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악의 평범성'과 '모순'입니다.
특히 록조가 자신이 흑인 여성 퍼피디아에게 ‘역강간’ 당했다고 주장하는 장면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가해자임에도 스스로를 피해자로 정체화하는 망상을 소름 끼칠 만큼 정확하게 포착합니다.
그의 최후는 이 망상의 끝을 보여줍니다. 록조는 자신이 숭배하던 백인 우월주의 집단에 가입했다고 믿는 순간, 가스실에서 처형당하고 소각됩니다. 파시즘은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도구마저 불순물로 여겨 제거한다는 ‘자기 파괴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체이스 인피니티가 연기한 ‘윌라’는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입니다. 흑인 어머니의 전투적 유산과 백인 아버지의 감성적 유대를 모두 물려받은 그녀는 인종과 젠더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냉혹합니다. 믿었던 젠더퀴어 친구가 생존 본능과 욕망 앞에서 그녀를 배신하는 장면은, ‘박탄 크로스’가 유토피아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이는 ‘정체성 정치’에 기반한 연대가 생존의 위협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윌라를 더 이상 낭만에 기댈 수 없는 고독한 투사로 성장시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부모 세대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습니다. 영화 후반부, 능숙하게 무기를 다루며 아버지의 “조심해라”라는 말에 “안 그럴 거야(I Won’t)”라고 선언하는 그녀는, 과거의 낭만을 거부하고 현실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맞서는 현대판 전사로 거듭납니다.
베니치오 델 토로가 연기한 ‘세르지오’는 낭만적 혁명이 실패한 자리에 들어선 실용적 대안입니다. 영화는 그를 “라티노 해리엇 터브먼(Latino Harriet Tubman)”으로 묘사합니다. ‘해리엇 터브먼’은 19세기 미국에서 탈출한 노예들을 비밀 조직망인 ‘지하 철도’를 통해 북부로 탈출시켰던 전설적인 흑인 여성 운동가입니다. 세르지오가 자신의 태권도 도장 지하에 물리적인 터널을 뚫어 이민자들을 탈출시키는 행위가, 과거 터브먼이 노예를 해방시켰던 ‘지하 철도’의 현대적 현현임을 명시하는 것이죠.
세르지오는 이 영화에서 가장 냉정함을 잘 유지하는 인물입니다. 밥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추적에 시달리며 편집증적인 불안 증세를 보일 때 세르지오는 상대방을 무장 해제 시킬 정도로 차분한 태도로 그를 돕습니다. 밥이 충전기나 무기 때문에 허둥지둥할 때도 세르지오는 묵묵히 라이플 위에 짧은 기도를 올리고 건네주는 등 마치 폭풍의 눈 같은 평온함을 보여줍니다.
세르지오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닌 도덕적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록조 대령과 같은 인물들이 폭력과 배제로 세상을 통제하려 할 때, 세르지오는 무술 스승다운 규율과 지역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이에 저항합니다.
그의 혁명은 거창한 ‘체제 전복’이 아닙니다. 거창한 선언문을 읽으며 폼을 잡는 대신, 억압받는 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안전한 도주로를 열어주는 것이 세르지오식 혁명입니다. 시스템의 감시망을 피해 사람을 살려내는 구체적인 ‘생존’이자 ‘인프라’입니다.
경찰 앞에서도 춤을 추듯 “맥주 몇 잔 마셨다”며 농담을 던지는 그의 태도는, 공포를 먹고 자라는 파시즘을 유머와 여유로 무력화시키는 가장 우아한 저항입니다.
테야나 테일러의 ‘퍼피디아’는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조니 그린우드의 불안한 스코어를 통해 서사 전체를 유령처럼 지배하는 ‘부재하는 중심’입니다. 실존했던 흑인 해방군(BLA)의 전설 ‘아사타 샤커’를 연상시키는 그녀는, 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해 갓 태어난 딸을 버리고 떠났으나 끝내 실패하고 정부의 증인이 되어 ‘밀고자’라는 오명 속에 갇혀버린 인물입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딸에게 남긴 편지를 통해 드러난 진실은 관객을 숙연하게 합니다. 그녀의 배신은 단순한 변절이 아니라, “죽거나, 수감되거나, 혹은 타협하거나”라는 가혹한 운명 앞에서 생존을 위해 택해야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웅 서사 이면에 감춰진 여성 혁명가의 딜레마와 모성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반면 레지나 홀이 연기한 ‘디안드라’는 밥이 대마초 연기 뒤에 숨어 편집증에 시달리는 동안, 윌라를 구출하고 보호하는 실질적인 ‘행동대장’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녀는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누비지만, 그 공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디안드라의 존재는 혁명 운동 내에서조차 흑인 여성이 짊어져야 했던 ‘돌봄 노동’과 ‘위험 부담’의 불균형을 묵묵히 증명합니다. 그리고 화려한 남성 영웅 서사에 가려져 있던 여성 혁명가의 ‘보이지 않는 희생’을 스크린의 전면으로 소환합니다.
영화의 제목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단순히 화려한 액션 장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앤더슨 감독은 이 제목을 통해 우리가 싸워야 할 전장이 내면, 이웃, 그리고 국가라는 세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전투는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주인공 밥은 록 조라는 악당과 싸우기 전에, 먼저 자신의 내면을 잠식한 과거의 트라우마와 겁쟁이 같은 자아를 이겨내야 했습니다. 반면 딸 윌라는 ‘평범한 십 대’로 남고 싶은 마음과 ‘전사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며 성장합니다.
두 번째 전투는 ‘우리’ 안의 싸움입니다. 영화 속 피난처인 ‘박탄 크로스’는 겉보기엔 평화로운 공동체 같지만, 그 안에서도 생존을 위해 누군가는 배신을 하고(젠더퀴어 친구), 누군가는 의심을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믿을 수 있는가? 영화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불신이 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지만 PTA는 이 불신 속에서도 기어이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의 전작 <부기 나이트>나 <매그놀리아>가 그랬듯, 혈연으로 맺어진 정상 가족이 붕괴된 자리에는 상처 입은 자들이 서로를 보듬는 ‘유사 가족’이 들어섭니다. 무능한 아빠 밥, 행동대장 디안드라, 그리고 지하의 안내자 세르지오까지. 이 오합지졸이 윌라를 중심으로 모여 만들어낸 엉성한 울타리야말로 시스템의 감시를 뚫고 생명을 지켜내는 가장 현실적인 요새임을 영화는 역설합니다.
마지막 전투는 바로 ‘국가’라는 거대 시스템과의 싸움입니다. 록조와 이민자 단속반은 단순히 나쁜 개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시스템의 얼굴들입니다.
결국 영화는 말합니다.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자는 시스템과 싸울 수 없고, 이웃과 연대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끝없는 전투’란, 이 세 가지 싸움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끊임없이 돌아가는 우리의 인생 그 자체인 것입니다.
‘프렌치 75’의 실패가 ‘무의미한 헛발질’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PTA는 잔인할 만큼 냉정하게 과거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그 폐허 위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놓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이데올로기가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가족)을 지키지 못하는 무력함 속에서도 퍼피디아의 투쟁적인 유산과 밥이 보여준 (비록 무능했지만), 끝까지 딸을 지키려 했던 감성적 유대, 이 두 가지는 다음 세대인 윌라에게 계승되어 비로소 완성됩니다. 윌라는 부모 세대가 저지른 ‘낭만적 도취’와 ‘가족의 방기’라는 오류를 반면교사 삼아, 현실을 직시하고 구체적인 연대를 실천하는 새로운 주체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윌라가 밥과 아반티, 세르지오, 디안드라 등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수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생존하는 과정은 기성세대의 갈등과 증오 속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살아남아 자립하는 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혁명임을 시사합니다.
결국 밥과 퍼피디아의 실패는 윌라라는 존재를 통해 ‘수정되고 개선된 저항’으로 진화합니다.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가 온다”는 말은, 앞선 세대의 패배가 있었기에 다음 세대의 전투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역설적인 희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혁명은 당대에는 실패했으나, 윌라의 “I Won’t”라는 선언을 잉태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계보를 잇는 필수불가결한 거름이 된 것입니다.
영화의 엔딩에서 밥은 딸 윌라에게 어머니 퍼피디아의 편지를 전합니다. 편지를 읽은 윌라가 오클랜드 시위 현장으로 차를 몰 때, 톰 페티(Tom Petty)의 노래 ‘American Girl’이 울려 퍼집니다. 백인 남성 록 밴드의 노래가 흑인 혼혈 소녀의 결의에 찬 얼굴 위로 흐르는 순간, ‘아메리칸 걸’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새로운 주인을 만납니다.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던 그 노래를 윌라가 자신의 것으로 가져와, 그녀야말로 이 시대가 기억해야 할 진짜 ‘미국 소녀’임을 선언하는 짜릿한 순간입니다.
영화의 제목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비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가 온다’는 삶의 리듬을 받아들이는 자의 단단한 태도입니다. 록조는 죽었지만 그를 고용했던 시스템은 건재하기에 지금, 우리의 혁명은 승리로 끝나는 단판 승부가 아니라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의 일부이자 끝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PTA는 이 영화를 통해 낡은 체 게바라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세르지오의 터널’과 ‘윌라의 자동차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혁명의 낭만은 끝났지만,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조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한, 삶과 저항은 계속될 것입니다.
진정한 혁명은 세상을 뒤집는 거창한 폭력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잡아 탈출을 돕고, 내 아이를 지켜내며, 위선적인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개인의 도덕적 선택의 총합입니다. 결국 이 영화의 제목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하나의 전투 뒤에 이어지는 또 다른 전투)'는 정치적 전쟁뿐만 아니라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매일 치러야 하는 개인적인 투쟁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PTA가 혁명의 폐허에서 길어 올린 희망의 서사시이자 삶의 당위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