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가 아니라 감독의 ‘자아’가 잠겨버렸다
넷플릭스 영화 <대홍수>가 ‘비영어권 영화 글로벌 1위’라는 성적표를 들고 표류 중이다. 수치만 보면 ‘K-콘텐츠의 쾌거’라 자축할 법하다. 허나 그 화려한 순위표를 한 꺼풀만 벗겨내도 영화의 민낯은 처참하게 드러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가는 이렇다. 로튼토마토 팝콘 지수는 낙제점에 가까운 40%대를 맴돌고, IMDb 평점 역시 10점 만점에 5점대에 머물러 있다. 이는 1위라는 순위가 작품의 힘이 아닌, 알고리즘이 이끄는 무의미한 ‘클릭’과 시각적 ‘호기심’이 만들어 낸 착시임을 방증한다. 스크린 너머 전 세계 관객들은 환호가 아니라, “도대체 이게 무슨 장르냐”는 탄식과 함께 이른바 ‘헤이트 워칭(Hate-watching, 욕하면서 보는)’ 현상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총 제작비 300억 원.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이 결과물은 안타깝게도 ‘재난 영화’의 탈을 쓴 난해한 SF이자, 감독의 뒤틀린 ‘철학 강의’에 불과했다.
한국 관객들이 쏟아내는 분노의 핵심은 ‘장르적 배신감’이다. 예고편과 마케팅은 물이 차오르는 아파트에서 탈출하는 ‘재난 블록버스터’를 표방했다. 관객들은 당연히 <해운대>나 <엑시트> 같은 시원한 생존 스릴러를 기대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영화는 난해한 타임루프와 AI 시뮬레이션을 다루는 복잡한 심리극이었다. “재난물인 줄 알았더니 철학적인 SF였다”, “속았다”는 배신감이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디테일의 붕괴 또한 처참하다. 물이 턱밑까지 차오른 상황에서도 전기가 멀쩡히 들어오고 스마트폰이 터지는 등 재난 상황의 리얼리티는 실종됐다. 여기에 위급한 상황에서 말을 듣지 않는 아역 캐릭터와 비합리적인 선택을 반복하는 주인공은 관객에게 극한의 피로감을 안겼다. 고구마를 백 개쯤 삼킨 듯 답답한 캐릭터와 개연성 없는 전개는 초반의 압도적인 비주얼이 준 몰입감마저 갉아먹으며 전형적인 ‘용두사미’의 결말을 자초했다.
김병우 감독은 <더 테러 라이브>를 통해 한정된 공간을 지배하는 탁월한 ‘테크니션’으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그러나 이번 <대홍수>에서 그는 기술자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거장’의 반열에 오르고자 했던 것 같다. 상업적 재미라는 그릇에 철학적 깊이라는 무게를 동시에 담아내고 싶은 욕망, 그것이 그가 감독으로서 꿈꾸던 이상향이었으리라.
그의 시선은 분명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 같은 명작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놀란 감독은 웜홀과 상대성 이론이라는 복잡한 물리학을 다루면서도, 그 모든 것을 결국 ‘부성애’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인간에 대한 깊은 탐구와 감정이 본질이고, 과학은 거들 뿐이었다.
반면 <대홍수>는 주객이 전도됐다. SF 설정이 주인이 되어 맹위를 떨치고, 감정은 기계적인 설정 틈바구니에 억지로 끼워 맞춘 부품처럼 겉돈다. 포장지가 아무리 화려한들, 그 안의 선물이 비어있다면 가치는 증명될 수 없다.
SF 장르가 관객과 호흡하는 최고의 미덕은 관객을 그 낯선 세계관 한복판에 던져놓고 오감을 통해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대홍수>는 관객이 느껴야 할 전율을 감독이 나서서 설명하고 가르치려 든다.
2025년의 관객들에게 타임 루프와 AI 시뮬레이션, ‘노아의 방주’ 메타포는 이미 익숙해진 클리셰다. 그럼에도 감독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안일한 설정을 택했다. 그 순간, 주인공의 죽음이나 위기는 관객에게 어떠한 긴장감도 주지 못하는 지루한 ‘게임 리플레이’로 전락했다.
영화는 관객이 감정을 쌓을 틈도 주지 않고 “이것은 시뮬레이션”이라며 몰입을 방해하고, 캐릭터의 입을 빌려 인류 리셋의 당위성을 ‘주입식 교육’ 하듯 읊어댄다. 관객은 영화를 ‘느끼는’ 체험자가 아니라, 감독이 출제한 난해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수험생의 신세가 되어버렸다. 관객과 영화의 거리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감독은 이 난해한 혼종을 ‘장르의 진화’라고 믿는 듯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중의 혹평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외로운 지성인’ 코스프레를 자처하는 일부 평론가들의 태도다. 그들은 결과물이 아닌 감독의 ‘의도’만을 높이 사며, 대중의 불호를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우매함”으로 치부하며 선민의식을 드러낸다.
분명히 해두자면, 관객은 지금 ‘마라탕에 생크림 케이크와 김치를 섞어 넣은 파격적인 조리법’ 그 자체를 탓하는 게 아니다. 그 결과물인 요리의 맛, 즉 본질이 먹을 수 없을 만큼 엉망이라는 사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내어 관객의 마음에 닿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고수의 영역이다. 감독의 머릿속에 아무리 거창한 우주가 들어있다 한들, 그것이 영상 언어로 제대로 번역되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오롯이 감독에게 있다.
관객들이 쏟아내는 혹평과 울분에 가까운 반응, 그리고 SNS를 달구는 조롱 섞인 화제성은 단순히 영화 한 편의 실패를 향한 것이 아니다. 이는 ‘위기’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현실 감각을 상실한 한국 영화계를 향한 한탄이기도 하다.
극장가는 말라 죽어가고 신인들은 기회조차 얻기 힘든 이 엄혹한 시기에, 선택받은 중견 감독이 넷플릭스라는 거대 자본에 의탁해 300억 원을 ‘자기만족적 실험’에 탕진했다는 사실. 관객들은 이 지점에서 ‘도덕적 해이’를 느낀다. 위기라면서 치열함은 없고, 돈 잔치만 남은 풍경. 이것이야말로 한국 영화가 처한 진짜 위기가 아닐까. 관객은 변하고 있는데,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아직도 과거의 영광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피는 잔칫집에서 흘려라’라는 말이 있다. 김병우 감독은 지금 넷플릭스 ‘글로벌 1위’라는 거대한 잔칫집에서 혹평이라는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
이 소란스러운 노이즈가 단순한 비난과 조롱으로 끝나기보다는 창작자로서의 비대해진 자아와 시스템의 안일함을 도려내는 아프지만 필요한 수술이 되어야 한다. 이 나쁜 피를 빼내는 과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국 영화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결국 300억의 물에 잠겨야 했던 건 아파트가 아니라, 관객 위에 군림하려 했던 감독의 ‘자의식’, 그리고 위기 속에서도 안주하려 했던 한국 영화계의 ‘오만’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