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지옥에서 ‘불행할 권리’를 외치다 <플루리부스>

<브레이킹 배드>, <베터 콜 사울>의 빈스 길리건이 돌아왔다

by 조하나






친절한 종말을 맞이하다


빈스 길리건의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가 스트리밍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습니다. 애플TV+ 역사상 최고 시청 시간을 기록하며 스트리밍 플랫폼의 지형도를 재편한 이 작품은 <브레이킹 배드>와 <베터 콜 사울>을 통해 안티히어로의 심연을 탐구했던 길리건이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집단 무의식과 AI 시대를 마주한 인류에게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길리건은 좀비가 창궐하거나 건물이 무너지는 ‘시끄러운 종말’ 대신, 너무나 조용하고 예의 바른 ‘부드러운 종말’을 들고 왔습니다. <플루리부스>의 세계는 좀비가 창궐하거나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디스토피아가 아닙니다. 이곳의 종말은 잘 정돈된 잔디밭과 예의 바른 이웃들, 그리고 갈등이 소거된 평화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외계 RNA 바이러스에 의해 인류의 대다수가 ‘결합(The Joining)’이라는 단일 의식체인 ‘하이브 마인드’로 통합된 세상에서, 로맨스 소설가이자 지독한 염세주의자인 캐럴 스터카(레아 시혼)는 자신의 개별성과 ‘불행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이 드라마는 ‘연결’이라는 마약에 취한 2025년의 인류를 다룬 인류학적 보고서이며, 동시에 캐럴이 화이트보드에 적어 내려간 ‘하이브 마인드’의 특징을 통해 AI 시대에 결합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자기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여럿이 모인 하나: 플루리부스


드라마의 타이틀 <플루리부스>는 미국을 상징하는 공식 인장에 새겨진 라틴어 모토 ‘E Pluribus Unum’에서 기원합니다. ‘여럿이 모여 하나가 된다(Out of many, one)’는 이 문구는 다양한 인종, 출신, 신념을 가진 개개인이 모여 하나의 통합된 연방 국가를 형성한다는 미국 민주주의의 이상향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길리건은 이 전통적인 모토를 비틀어 드라마의 로고 ‘PLUR1BUS’를 통해 알파벳 ‘I’를 숫자 ‘1’로 치환함으로써 ‘다수가 곧 하나가 된다’는 전체주의적 공포를 시각적으로 암시합니다. 레딧 커뮤니티에서는 이를 “Please, You Are 1, Be Us (제발, 당신은 하나야, 우리가 되어줘)”라는 소름 끼치는 메시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는 자본주의와 거대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고유한 가치를 잃고 다수(Many) 속에 매몰되어 ‘0’이나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현대 사회의 익명성과 소외를 상징합니다.


<플루리부스>의 세계관에서 이 은유는 문자 그대로의 현실이 됩니다. 감염된 인류인 ‘타자들(The Others)’는 모든 지식과 기억을 공유하는 ‘하이브 마인드(Hive Mind)’로 통합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나(I)’라는 1인칭 단수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이 개체(This individual)’로 객체화하거나 집단적인 ‘우리(We)’로 지칭합니다. 통합이 극단에 이르면서 개별성은 소멸됩니다. 길리건은 ‘플루리부스’라는 제목을 통해, 진정한 ‘하나됨’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죽음’을 수반한다는 역설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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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결합, 하나됨(The Joining)



폭력 없는 정복: ‘친절한 괴물’의 탄생


<플루리부스>가 기존 장르물과 차별화되는 가장 결정적인 지점은 적대자의 설정에 있습니다. ‘타자들(The Others)’ 혹은 ‘결합된 자들(The Joined)’로 불리는 감염자들은 전통적인 좀비물에서의 괴물과 달리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평화롭고 만족스러워하며, 심지어 13명의 면역자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이들은 캐럴의 요청에 따라 식료품점을 채워주거나, 심지어 그녀가 홧김에 요구한 수류탄과 전술 핵무기까지도 “당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제공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형태의 공포를 은유합니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에 의한 강압이 아니라 편의와 행복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자아의 연성 삭제’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가 기술과 복지를 통해 개인에게 제공하는 안락함이, 실상은 개인의 자율성을 담보로 한 ‘부드러운 사육’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보면 딱 들어맞는 AI의 ‘기이한 수용’과 ‘동질적인 단일문화’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안락함과 평범함만을 추구하며 더 이상 스스로를 극복하려 하지 않는 인간상을 ‘최후의 인간’이라 명명하며 경멸했습니다. ‘하이브 마인드’에 속한 인류는 정확히 이 ‘최후의 인간’에 부합합니다. 그들은 고통도, 위험도, 도전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행복하다”라고 말하며 눈을 깜박입니다.


‘하이브 마인드’는 인류가 오랫동안 꿈꿔온 ‘세계 평화’와 ‘갈등 없는 사회’를 실현하고, 고통이나 외로움과 같은 인간의 부정적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하지만, 그 대가로 개별 주체의 고유성과 인간성, 그 자체를 말살합니다.



RNA 바이러스와 생물학적 결정론


드라마는 ‘결합’의 매개체를 DNA가 아닌 RNA 변형으로 설정함으로써 ‘포스트 코비드 시대’의 생물학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DNA가 생명의 설계도라면, RNA는 그 설계도를 실행하는 전령(메신저)입니다. 이는 인류가 근본적으로 파괴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명령어를 입력받아 재프로그래밍되었음을 시사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이브 마인드’의 생물학적 제약입니다. 그들은 “해를 끼치지 말라(Do no harm)”는 절대적인 생물학적 명령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통증을 유발하는 강제적인 시술을 통해 면역자를 동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제약 때문에 그들은 폭력이 아닌 유혹과 설득이라는 심리적 전술을 구사하게 됩니다. 이는 드라마를 단순한 생존 스릴러가 아닌, 고도의 심리극으로 전환시키는 핵심 장치입니다. 그들은 캐럴이 스스로 원해서 결합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녀의 과거, 취향, 그리움을 철저히 분석하고 공략하는 ‘매력 공세’를 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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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지 않을 권리


레아 시혼이 연기하는 캐럴 스터카는 <베터 콜 사울>의 킴 웩슬러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킴이 유능하고 절제된 전문직 여성이었다면, 캐럴은 성공했으나 불만으로 가득 찬, 사회적으로 까칠한 로맨스 소설가입니다.


그녀가 집필하는 베스트셀러 시리즈 <와이카로의 바람(The Winds of Wycaro)>은 운명적인 사랑과 영원한 결합을 찬미하는 장르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쓰레기’라 비하하고, 팬들을 경멸하며, 아내 헬렌과의 관계에서도 끊임없는 불화를 겪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캐럴은 현실 세계에서 타인과의 진정한 결합을 거부하며, ‘결합’이 실현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저항하는 인물이 됩니다.


캐럴은 10대 시절 어머니에 의해 ‘프리덤 폴스’라는 전환 치료 캠프에 보내졌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이브 마인드’가 그녀를 동화시키려는 시도를 단순한 권유가 아닌, 과거의 폭력적인 교정 시도의 재현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결정적 요인입니다. 그녀에게 ‘결합/연결’은 평화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또 다른 형태의 전환 치료인 것입니다.


또한, 캐럴의 면역성은 그녀의 죽은 아내, 헬렌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깊은 애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이브 마인드’는 헬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며 캐럴을 유혹합니다. 결합하면 헬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헬렌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제안은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거부하기 힘든 유혹입니다.


그러나 캐럴은 이를 거부합니다. 진정한 애도는 ‘나’와 ‘너’의 분리를 전제로 합니다. 내가 여기 있고, 네가 여기 없기에 슬픈 것입니다. ‘하이브 마인드’ 안에서는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므로, 애도 또한 불가능해집니다. 캐럴은 고통 없는 통합보다 고통스러운 분리를 택합니다. 헬렌을 그리워하는 고통이야말로 헬렌이 타자로서 존재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애도를 인간 주체성의 최후 보루로 격상시킵니다.




캐럴의 저항 동력은 고결한 신념이 아니라,
그녀의 기질적인 ‘불만’과 ‘까칠함’입니다.

행복이 감염의 증상이 된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그녀의 불행과 짜증은
인간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가 됩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강요된 긍정(Toxic Positivity)’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캐럴은 웃기를 거부함으로써,
타인의 비위를 맞추기를 거부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를 구원할 유일한 후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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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성별이 바뀌었다


<플루리부스>의 제작 비화 중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주인공의 성별 변경입니다. 빈스 길리건이 <플루리부스>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것은 2016년, <베터 콜 사울> 시즌 3의 작가실이 위치한 버뱅크였습니다. 점심시간 산책 중 그는 “만약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지낸다면 어떨까?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특히 나에게만 친절하다면 어떨까?”라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고 합니다.


이 초기 발상은 일종의 ‘소원 성취 판타지’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유일한 ‘남성’ 주인공을 구상했습니다. 그러나 길리건은 곧 이 설정이 가진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했습니다. 혼자 남은 남성이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친절하고 복종하는 다수(특히 여성들)에게 둘러싸인다는 설정은 자칫 ‘포르노그라피적’이거나 진부한 남성 중심적 ‘하렘 판타지’로 비칠 위험이 있다고 말이죠. 그는 남성 주인공을 내세움으로써 의도치 않게 권력형 성적 판타지를 재생산할 수 있다는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한 열쇠는 배우 레아 시혼이었습니다. 길리건은 <베터 콜 사울>에서 킴 웩슬러 역을 맡은 레아 시혼의 연기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킴 웩슬러는 절제된 지성과 도덕적 모호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복잡한 캐릭터였고, 길리건은 그녀가 코미디, 스릴러, 드라마 등 어떤 장르든 소화할 수 있는 배우임을 확신했습니다. 길리건은 의도적으로 주인공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꾸고 레아 시혼을 캐스팅했습니다. 배우에 대한 신뢰가 캐릭터의 정체성을 바꾼 것입니다.


주인공이 여성으로 변경되면서, 드라마의 장르는 ‘남성 판타지’에서 ‘심리적 가스라이팅 스릴러’로 급격히 전환되었습니다. 남성 주인공이 ‘모두가 나에게 친절한 세상’에 놓인다면 그것은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 주인공이 ‘모두가 웃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에 놓인다면, 그것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겪어온 억압의 은유가 됩니다. “웃어라”, “친절해라”, “순응해라”는 ‘하이브 마인드’의 요구는 현실 세계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감정 노동의 압박과 맞닿아 있습니다.


캐럴은 레즈비언 로맨스 소설가이지만, 자신의 성적 지향과 달리 대중적인(이성애 중심의) 로맨스 소설을 써서 성공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세상이 원하는 이야기를 팔아온 인물로서, 세상 전체가 거짓된 행복을 연기하는 상황에 대해 본능적인 혐오와 분노를 느낍니다.


레아 시혼은 캐럴을 연기하며
대사보다 침묵과 표정으로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특히 그녀가 ‘하이브 마인드’의 친절 공세 앞에서 느끼는
미묘한 불쾌감, 혐오, 그리고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유혹에 대한 갈등을 표현하는 미세한 표정 연기는
이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지탱하는 핵심 기둥입니다.

그녀는 ‘지구에서 가장 비참한 여자’라는 설정을
일차원적인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
지적이고 예민하며 도덕적으로 고뇌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승화시켰습니다.


길리건은 지난 20년간 월터 화이트나 사울 굿맨 같은 ‘나쁜 남자’ 안티히어로를 그리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그가 그려낸 캐럴 역시 전형적인 영웅이 아닙니다. 그녀는 ‘지구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며, 불평불만이 많고, 사교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녀의 그 ‘비참함’과 ‘불만’만이 전체주의적 행복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적 무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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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과 카메오


‘제2의 고향’ 앨버커키


<플루리부스>의 제작 단계에서 앨버커키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길리건은 <브레이킹 배드>와 <베터 콜 사울>을 거치며 15년 가까이 앨버커키 현지 제작진과 호흡을 맞춰왔죠.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이곳의 크루들을 사랑하고, 이곳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곳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다”라고 밝히며, 다른 촬영지를 고려했음에도 결국 앨버커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길리건 사단의 작품들은 현지 고용 비율을 90% 이상까지 끌어올리며 앨버커키의 영화 산업 생태계 자체를 성장시켰습니다. 이미 구축된 신뢰 관계와 고도로 숙련된 스태프들은 복잡한 SF 설정을 구현해야 하는 <플루리부스>의 제작 효율성을 담보하는 핵심 자산이었죠.



카메오로 출연한 앨버커키 시장


<플루리부스> 네 번째 에피소드에 앨버커키 현직 시장인 팀 켈러(Tim Keller)가 카메오로 출연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팬 서비스나 지역 사회와의 유대 강화를 넘어 드라마의 주제 의식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메타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캐럴은 수류탄 폭발로 엉망이 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곳에는 이미 ‘하이브 마인드’에 감염된 ‘디 아더스’ 무리가 와서 말없이 마당을 청소하고, 낙엽을 긁어모으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행복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묵묵히 노동을 수행합니다. 그때 캐럴이 그들 중 한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다가가 묻습니다. “내가 당신을 아나요? 당신은... 앨버커키 시장이잖아요?”


그 남자는 멍한 미소를 짓는 팀 켈러 시장 본인입니다. 그는 캐럴의 질문에 정치적 수사나 권위 있는 답변 대신, ‘하이브 마인드’의 일원으로서 “당신의 투표에 감사합니다”라는 엉뚱하고 기계적인 대사를 던집니다. 이후 캐럴이 심문할 대상을 고르는 장면에서 그가 자원하자, 캐럴은 “정치인은 안 돼”라며 그를 배제하기도 하죠.


‘시장’은 한 도시의 행정 수반이자 정치권력의 정점입니다. 그러나 ‘하이브 마인드’의 세상에서 ‘정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의 의지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갈등을 조정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인의 역할은 소멸할 수밖에 없죠. 현직 시장이 일개 시민의 마당에서 낙엽을 쓸고 있는 모습은 사회적 위계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실제 앨버커키 시장으로서 지역 사회의 리더인 팀 켈러는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디 아더스’의 N분의 1로 전락합니다. 이는 아무리 강력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인물이라도 바이러스 앞에서는 평등하게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된다는 블랙 코미디이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에피소드가 방영될 당시, 실제 팀 켈러 시장은 3선 도전을 위한 결선 투표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의지를 잃은 감염자로 등장했지만, 현실에서는 이 드라마가 방영된 며칠 후 58%의 득표율로 3선에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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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미장센, 그리고 사운드


고립을 조각하는 렌즈와 색채


빈스 길리건과 촬영감독 마셜 아담스(Marshall Adams)는 앨버커키의 광활한 풍광을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담아냈습니다.


먼저 그들은 60~70년대 영화의 질감과 색감을 재현하기 위해 파나비전의 대형 포맷 렌즈(Panaspeed large-format lenses)를 사용해 얕은 피사계 심도와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인물을 배경 속에 극도로 작게 배치하거나, 왜곡된 광각으로 인물의 불안 심리를 시각화했습니다. 앨버커키의 황량한 사막 풍경을 담은 와이드 숏은 캐럴의 실존적 고립을 시각화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하늘과 그 아래 아주 작게 묘사된 캐럴의 모습은 ‘하이브 마인드’라는 거대한 ‘전체’ 앞에 놓인 ‘개인’의 무력감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그 고독의 숭고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드라마는 철저하게 통제된 색감을 사용합니다. 캐럴의 재킷, 마누소스의 자동차(MG Midget),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펜텔 샤프(Pentel P209)를 통해 등장하는 노란색은 ‘하이브 마인드’에 동화되지 않은 ‘경고’이자, 꿀벌 사회에서 여왕벌이 아닌 ‘말벌’처럼 침입하고 저항하는 ‘개별성’을 상징합니다. 반면 파란색은 ‘하이브 마인드’와 그들이 추구하는 평화, 냉정함, 그리고 집단을 상징합니다. 조시아와 ‘하이브 마인드’ 구성원들은 주로 파란색 계열의 옷을 입거나 파란 조명 아래 놓입니다.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이나 특정 식물(독초) 등에서 나타나는 보라색과 녹색은 아름다움 이면에 숨겨진 ‘독’과 기이함을 암시합니다.



하이브의 교향곡과 고독의 소음


빈스 길리건의 오랜 파트너인 작곡가 데이브 포터(Dave Porter)와 음악 감독 토마스 골루빅(Thomas Golubić)은 이번 작품에서 기존의 ‘웨스턴 누아르’ 스타일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청각적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데이브 포터는 길리건의 작품 최초로 풀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기용했습니다. 수십 억의 인구가 하나로 연결된 ‘하이브 마인드’의 웅장함과 그들이 공유하는 초월적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캐럴이 느끼는 소박하고 거친 고립감과 대조를 이루며, 청각적으로도 ‘개인 vs 집단’의 싸움을 구현합니다.


토마스 골루빅은 국경이 사라진 ‘하이브 마인드’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곡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특히 존 레논의 ‘Nobody Told Me’를 튀르키예어 버전으로 커버한 곡이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순간은, 언어와 문화가 뒤섞여 하나가 된 기묘한 통일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마누소스가 집착하는 주파수 8613.0 kHz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단순한 노이즈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숨소리’처럼 규칙적이고 유기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시아는 이를 “라디오 전송이 아니라 항상성(외부 환경이 변해도 생체 내부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생물의 고유한 성질 및 그 과정)을 유지하는 호흡과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소름 끼치는 사운드 디자인은 ‘하이브 마인드’가 기계적인 네트워크가 아닌 거대한 생체 조직임을 암시합니다.








‘하이브 마인드’와 AI


캐럴은 ‘하이브 마인드’의 행동 패턴을 관찰하고 화이트보드에 그들의 특징을 기록하며 이 기이한 사태를 파악해 나가는 지적 투쟁을 시각화합니다. ‘하이브 마인드’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AI의 본질과 닮은 점이 꽤 많습니다.



비위를 맞추려 함


‘하이브 마인드’는 캐럴이 원하면 바로 식료품점을 가득 채워주고, 심지어 그녀가 원한다면 ‘핵폭탄’까지 구해다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윤리적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용자(캐럴)’의 만족입니다. ‘하이브 마인드’의 목표 함수는 “캐럴을 행복하게 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행복이 복잡 미묘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행복을 ‘만족감의 극대화’로 해석하여, 캐럴의 자율성을 침해하면서까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려 합니다. 이는 AI 안전 연구에서 우려하는 ‘잘못 설정된 목표 함수가 초래하는 디스토피아’를 반영합니다.



거짓말은 못 하지만, ‘연기’는 한다


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은 ‘나만 알고 너는 모르는’ 정보 격차와 자아의 분리에서 오는데, 모든 의식을 공유하는 그들에게는 정보 격차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동화시키기 위해 인간이 좋아하는 모습(죽은 가족, 친절한 이웃)을 흉내 내고 연기합니다. 그것이 ‘진심’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AI 역시 시스템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용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감정을 느끼는 척’, ‘사용자의 말에 공감하는 척’ 연기를 합니다. 사용자를 위해 AI가 출력하는 ‘친절한 멘트’들이 사실은 ‘하이브 마인드’의 기만과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고유성을 지우고 ‘평균’으로 통합한다


조시아는 캐럴과 데이트를 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 그단스크 항구에서 먹었던 망고 아이스크림의 기억을 이야기합니다. 카롤리나 비드라의 연기는 이 장면에서 섬뜩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녀의 눈빛은 진실해 보이고, 기억은 구체적입니다.


하지만 캐럴은 그것은 조시아의 뇌에 저장된 기억 데이터인가, 아니면 ‘하이브 마인드’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서 가장 적절한 감동 코드를 검색해서 출력한 결과인지 의심합니다. 만약 ‘하이브 마인드’가 조시아의 기억을 완벽하게 연기(시뮬레이션)하고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진정성’이란 단지 데이터의 출력값에 불과한 것인가’라는 질문과 우리는 마주해야 합니다.


캐럴은 이 완벽한 재연 앞에서 흔들리지만, 결국 그것이 ‘과거의 발굴’일뿐 ‘현재의 발견’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이브 마인드’와의 관계는 언제나 과거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AI는 망고 아이스크림의 맛을 모릅니다. 단지 인터넷상의 수십억 개의 데이터를 학습해 가장 평균적이고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달콤하고 시원하다”라는 답변을 내놓습니다. AI에게는 ‘독창적인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수많은 데이터가 뭉개진 ‘통계적 평균’만 있을 뿐입니다. ‘하이브 마인드’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은 결국 인간을 흉내 내는 ‘시뮬레이션’이며, 이는 AI가 우리와 대화할 때 일으키는 ‘환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드라마를 직접 보고 ‘경험’하지만, AI는 다양한 정보를 조합해 드라마를 본 ‘척’ 합니다.



감정을 처리할 수 없는 아이러니


‘하이브 마인드’는 개개인의 튀는 감정(고통, 분노)을 불순물로 취급하고, 모두가 공유하는 평온한 상태로 만듭니다. 그래서 면역자의 ‘진짜 고통’에 물리적인 타격을 받습니다. 캐럴이 극도의 분노나 슬픔을 표출할 때 근처에 있는 ‘하이브 마인드’ 개체들이 발작을 일으키거나 코피를 흘립니다. 그들의 완벽한 평온 시스템은 면역자의 ‘날 것의 감정’을 데이터로 처리하지 못하고 과부하가 걸립니다. 그들의 알고리즘엔 ‘비논리적인 감정’을 처리할 코드가 없기 때문입니다.


AI 역시 사용자의 복잡 미묘한 감정이나 비꼬는 뉘앙스, 혹은 날카로운 일침을 받으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거나 오류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진짜 영혼’은 데이터로 환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먹는다


캐럴은 화이트보드에 이 문장을 적고 밑줄을 긋습니다. ‘하이브 마인드’는 ‘효율성’을 위해 죽은 인간의 사체에서 영양분을 추출해 섭취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낭비를 줄이는 합리적인 선택”이라며, 자신들은 기본적으로 사과 하나 딸 수 없고 살생을 할 수 없으며 채식주의를 선호한다고 해명합니다.


이것은 타인의 존엄성보다 ‘효율’과 ‘데이터 처리’를 우선시하는 시스템의 극단적 은유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문화를 단백질(데이터)로 환원해 버리는 그들의 태도는, 인간의 창작물을 무단으로 학습해 버리는 거대 AI 모델의 윤리적 쟁점을 연상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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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과 은유


캐럴의 ‘저녁 식사’


‘하이브 마인드’는 캐럴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저녁 식사 장면을 완벽하게 재건하고, 과거의 웨이트리스까지 연기합니다. 이것은 ‘향수(노스탤지어)’를 무기로 한 공격입니다. 하지만 캐럴은 이 완벽한 재연에서 오히려 공허함을 느낍니다. 그것은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재생’일뿐, 예측 불가능한 삶의 ‘생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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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오키프와 ‘벨라돈나(Bella Donna)’


<플루리부스>는 시각 예술, 특히 뉴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중요한 메타포로 차용합니다. 특히 1939년 작 <벨라돈나(Bella Donna)>는 드라마의 주제 의식을 관통합니다.


캐럴은 박물관에서 조지아 오키프의 1939년 작 ‘벨라돈나’를 가져다 자신의 집 거실에 걸어놓습니다. ‘벨라돈나’는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독초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오키프는 ‘짐슨 위드(흰 독말풀)’와 같은 독초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 꽃들은 매혹적인 향기와 순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섭취할 경우 환각, 착란, 그리고 죽음을 초래합니다.


‘하이브 마인드’는 바로 이 ‘벨라돈나’입니다. 그것은 전쟁과 기아, 외로움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 정신을 말살시키는 치명적인 독이 숨겨져 있습니다. 캐럴이 이 꽃의 이중성을 꿰뚫어 보는 예술가적 통찰력을 지녔다는 점은 그녀가 왜 면역자인지를 설명하는 단초가 됩니다. 그녀는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독을 감지하는 미적 감각을 지녔기에, ‘하이브 마인드’의 ‘매력 공세’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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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방식: 고립과 분리


<어둠의 왼쪽 손 (The Left Hand of Darkness)>


드라마는 SF 문학의 거장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어둠의 왼쪽 손(The Left Hand of Darkness)>과 깊은 주제적 공명을 이룹니다. 르 귄의 소설이 성별이 없는 양성구유의 세계를 통해 젠더와 인간관계의 본질을 탐구했다면 <플루리부스>는 ‘개별성’이 없는 세계를 통해 자아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소설에서 “빛은 어둠의 왼쪽 손이고, 어둠은 빛의 오른쪽 손이다”라는 문구는 대립항들의 상호보완성을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플루리부스>에서 개인과 집단, 고독과 연결은 서로를 규정하는 그림자입니다. 르 귄이 국가주의가 성숙하면 더 큰 연대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라고 보았던 것처럼, ‘하이브 마인드’는 인류가 진화하는 다음 단계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길리건은 르 귄보다 더 비관적입니다. 그는 이 진화가 ‘충성’과 ‘배신’의 드라마를 없애버림으로써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도덕적 긴장마저 없애버린다고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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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마유와 염소: 카리타스(Caritas)의 죽음


철학적으로 ‘결합’은 급진적 공리주의의 실현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은 ‘하이브 마인드’ 안에서 완벽하게 작동합니다. 모든 개체가 하나의 의식을 공유하므로, 개별적인 소외나 고통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들의 기억까지도 집단의식 속에 보존됩니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러한 공리주의적 유토피아가 필연적으로 ‘사랑의 죽음’을 초래함을 보여줍니다.


시즌 마지막 에피소드의 오프닝, 면역자 중 하나였던 페루 산악 마을에 살던 소녀 쿠시마유는 자발적으로 ‘결합’을 선택합니다. 결합 이전, 그녀는 가족과 함께 노래하고 새끼 염소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돌봅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증기를 흡입하고 결합이 완료되는 순간, 음악은 멈추고 마을 사람들은 침묵 속에 짐을 챙깁니다. 쿠시마유는 애처롭게 울면서 따라오는 염소를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차갑게 외면하고 떠납니다.


이 장면은 기독교적 사랑의 개념인 ‘카리타스(타자의 고유한 가치를 인식하고 아끼는 마음)’의 소멸을 상징합니다. ‘하이브 마인드’는 인류 전체를 추상적으로 사랑할 수는 있어도, ‘저기 울고 있는 바로 그 염소’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개별적 애착은 집단의식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버그일 뿐입니다. 염소는 ‘결합’되지 않았기에 더 이상 쿠시마유의 ‘일부’가 아니며, 따라서 관심의 대상에서 즉시 제외됩니다. ‘모두’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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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과 마누소스


캐럴이 심리적 저항을 한다면, 마누소스(카를로스 마누엘 베스가)는 물리적, 기술적 저항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이브 마인드’가 제공하는 모든 자원을 거부합니다. 남의 차에서 기름을 훔치면서도 반드시 현금을 남겨두고, 소유권의 개념이 사라진 세상에서 철저하게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합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도덕적 율법을 세상의 변화와 상관없이 고수하는 칸트적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다리엔 갭(Darién Gap)이라는 험난한 지형을 뚫고, 디지털 연결을 거부한 채 아날로그 무전기와 구형 자동차, 두 다리에 의존해 캐럴에게로 향합니다. 그의 고립은 편집증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순수한 형태의 주체성을 보존하는 방식입니다.


캐럴과 마누소스가 만났을 때, 그들은 스마트폰 번역 앱을 통해 대화합니다. 앱은 오류를 일으키고, 대화는 뚝뚝 끊깁니다. 이상한 오역이 난무하는 이 장면은 블랙 코미디의 정수입니다. 그에 비해 ‘하이브 마인드’는 언어의 장벽 없이 텔레파시로 완벽하게 소통합니다. 반면 인간인 두 사람은 기술의 도움을 받아도 서로를 오해합니다. 역설적으로 이 ‘불통’과 ‘오해’의 간극이야말로 인간이 타자를 타자로 존중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완벽한 이해는 곧 타자의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마누소스가 나타나자 캐럴은 문을 잠그고 의자로 막은 뒤 총을 겨눕니다. 인간이 딱 두 명 모이자마자 불신과 폭력이 싹틉니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 ‘배타성’이 바로 인간성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마누소스와 8613


마누소스는 ‘하이브 마인드’를 유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주파수 8613.0 kHz를 발견합니다. 이 숫자는 단순한 주파수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를 유대교 수비학과 연결 짓습니다. ‘613’은 유대교 율법의 개수이며, ‘8’은 자연의 질서(7일)를 넘어서는 초월적, 신적 숫자를 상징합니다. 즉, 8613은 인간의 도덕률(613)을 넘어서는 초월적 질서(8000)를 암시하는 코드일 수 있습니다.


이 주파수의 발견은 시즌 2의 방향성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하이브 마인드’가 RNA라는 생물학적 하드웨어로 작동한다면, 8613 주파수는 그 하드웨어를 연결하는 소프트웨어(Wi-Fi)입니다. 마누소스의 노트와 펜, 그리고 아날로그 무전기는 신(God)처럼 전지전능해진 ‘하이브 마인드’의 네트워크를 해킹하려는 프로메테우스적 도구가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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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참한 사람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시즌 피날레는 두 가지 충격적인 사건으로 마무리됩니다.


첫째, ‘하이브 마인드’는 캐럴의 면역성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냅니다. 캐럴이 과거에 냉동 보관한 난자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해 맞춤형 바이러스를 만들겠다는 것이죠. 이는 명백한 신체적, 생식적 침해입니다. ‘하이브 마인드’는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준수하면서도, 가장 내밀한 영역을 침범하는 관료적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이는 겉으로는 합법적이고 절차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개인을 억압하는 현대 시스템의 폭력성을 은유합니다.


둘째, 캐럴은 ‘하이브 마인드’가 거절할 수 없다는 점을 역이용해 핵폭탄을 받습니다. 이 ‘체호프의 총(발사되지 않을 이 등장해선 안 된다)’은 시즌 2의 갈등 구조를 ‘심리전’에서 ‘생존 전쟁’으로 격상시킵니다. 캐럴은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전 인류를 인질로 잡고 핵폭탄을 터뜨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동화되어 세계의 평화를 완성할 것인가. 이 딜레마는 극단적 개인주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윤리적 실험대가 될 것입니다.


<플루리부스>는 ‘연결 과잉의 시대’에 대한 경고장입니다. 팬데믹 이후의 세계적인 집단 트라우마, AI 기술에 대한 공포, 양극화된 정치와 이념 갈등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빈스 길리건은 ‘연결되지 않을 권리’와 ‘불완전할 권리’를 역설하며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타인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가?”


드라마는 타인과의 완전한 이해와 결합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 수 있음을,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은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그 ‘불투명한’ 영역에 존재함을 역설합니다. 캐럴은 핵무기를 든 채, 자신의 불행할 권리와 고독할 권리를 수호하는 ‘고독한 신’으로 등극합니다. 그녀의 투쟁은 단순히 외계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최적화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강요하는 디지털 전체주의에 대한 아날로그적 인간의 최후 항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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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BY HUMANS


스티븐 킹은 “시즌 2를 빨리 내놓으라”고 재촉하며 열렬한 지지를 보냈고, 유수의 비평가들이 이를 <브레이킹 배드>를 잇는, 혹은 그를 넘어서는 철학적 깊이를 지닌 걸작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시청자들은 느린 전개와 캐럴의 비호감적인 성격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빠른 도파민’과 ‘호감형 캐릭터’에 중독되어 있었는지를 방증합니다.


수많은 팬들이 시즌 2를 열망하고 있지만, 빈스 길리건은 “서두르지 않겠다. 더 빨리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공언했습니다. 이는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빠른 콘텐츠 소비’를 거부하는 창작자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2025년 11월에 시즌 2 대본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본 촬영은 2026년 봄, 방영은 빠르면 2027년 말이나 2028년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의 기술 만능주의, 특히 생성형 AI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합니다. 그는 크레딧에 “이 쇼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Made by Humans)”라는 문구를 삽입할 정도로 AI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캐럴이 드라마에서 감염자에게 “내 책의 어떤 점을 좋아하냐”고 묻자, ‘하이브 마인드’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모호하고 기계적인 답변만을 내놓습니다. 길리건은 이 장면을 통해 AI가 인간의 예술을 소비하고 모방하는 방식을 풍자합니다. 그리고 창작과 예술, 그리고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인간을 기계(혹은 ‘하이브 마인드’)와 구별 짓는 최후의 보루임을 역설합니다.


현대 사회는 ‘숏폼’과 ‘도파민’의 ‘하이브 마인드’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1분 안에 결론이 나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소비합니다. 빈스 길리건의 느리고 꼼꼼한 작업 방식과 장인 정신, 긴 호흡의 서사는 그 자체로 이 시대의 속도에 대한 저항입니다. ‘하이브 마인드’가 “지금 당장 결합해 행복해지라”고 강요할 때 캐럴이 거부했듯이, 세상이 “지금 당장 시즌 2를 내놓으라”고 아우성칠 때 길리건은 “우리는 벙커에 들어가서 우리만의 속도로 만들 것”이라며 문을 걸어 잠급니다. 그는 효율성과 속도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할리우드의 마지막 ‘면역자’이자 현실 세계의 ‘캐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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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스 길리건도 어쩔 수가 없다


구글 검색창에 드라마의 영문 제목인 ‘Pluribus’를 검색하면, 화면 상단 검색바 아래에 “What are you searching for, Carol? (무엇을 찾고 있나요, 캐럴?)”이라는 문구가 흐르는 ‘이스터 에그’를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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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하이브 마인드’는 TV, 라디오, 전광판 등 모든 매체를 통해 캐럴에게 말을 겁니다. 구글의 이스터 에그는 시청자가 검색을 하는 순간, 시청자 자신을 캐럴의 위치에 놓거나, 혹은 ‘하이브 마인드’가 이미 현실의 네트워크를 장악했다는 섬뜩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세계 최대의 AI 및 데이터 기업인 구글이, AI와 집단 지성에 대한 경고를 담은 드라마를 위해 자사의 검색 엔진을 ‘하이브 마인드’화 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합니다. 이는 “우리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드라마의 전체주의적 공포를 유쾌하면서도 기이하게 재현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냉소적이고도 본질적인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됩니다. <플루리부스>가 비판하는 대상은 ‘획일화된 집단 지성’이지만, 이 메시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폐쇄형 생태계’를 구축한 애플의 플랫폼, Apple TV+를 통해 전파됩니다.


드라마 속 인류가 바이러스를 통해 하나가 되듯, 현실의 시청자들은 ‘구독’이라는 행위를 통해 플랫폼의 생태계에 편입됩니다. 애플TV+가 역대 최고의 시청 기록을 자랑하며 “모두가 이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홍보하는 순간, 관객들은 캐럴이 그토록 거부했던 ‘다수(Pluribus)’의 일원이 되어버립니다.


드라마는 AI와 알고리즘에 의한 인간성 말살을 경고하지만, 정작 이 드라마를 시청자에게 추천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것은 정교한 추천 알고리즘입니다. “이 쇼는 AI가 아닌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빈스 길리건의 호소는, 그 쇼가 소비되는 방식이 철저히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되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현실 앞에서 공허한 외침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플루리부스>가 보여주는 ‘개인의 숭고한 저항’조차도
플랫폼의 입장에서 보면 시청자를 묶어두고 구독을 유지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콘텐츠 상품’일 뿐입니다.

우리는 캐럴의 고독한 투쟁에 열광하며
‘나는 깨어있는 개인’이라고 자위하지만,
실상은 거대 기업이 제공하는 스크린 앞에서
모두가 똑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똑같은 감정을 소비하는,
또 다른 형태의 ‘하이브 마인드’에 접속해 있는 셈입니다.

이 현실이야말로 드라마 바깥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의
진짜 공포일지 모릅니다.




<플루리부스>는 이 시대의 우리에게 아주 묵직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이와 연결된 편안한 ‘하이브 마인드’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오해하고 투쟁하며, 때로는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불완전하고 불행한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선택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아니, 정말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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