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의 '분열된 제국' 미국을 읽는 세 개의 예언서
2026년, 지금의 미국을 바라보며 우리는 더 이상 '연합(United)'이라는 단어를 쉽사리 떠올리지 못합니다. 지도 위에는 여전히 50개의 주가 하나의 국경 안에 존재하지만, 그 거대한 연방의 내면은 이미 총성 없는 전쟁, 즉 '심리적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한 균열은 단순한 느낌이 아닌 명확한 지표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퓨 리서치 센터의 데이터를 비롯한 여러 통계는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층 사이의 비호감도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를 단순한 정치적 경쟁자가 아닌, 반드시 제거해야 할 '국가의 위협'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 양극화는 사회를 지탱하던 시스템마저 마비시켰습니다. 사법부의 판단, 언론의 보도, 선거의 결과는 당파성에 따라 철저히 부정당하고 있으며, '하나의 팩트'가 사라진 자리에는 각자의 믿음만이 진실로 둔갑하는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가 고착화되었습니다.
대화가 멈춘 곳에는 폭력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정치적 신념을 이유로 한 혐오 범죄와 물리적 충돌이 일상으로 스며들었고, 낙태권이나 총기 규제와 같은 첨예한 이슈를 두고 벌어지는 주 정부 간의 법적 갈등은 연방의 권위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위태로운 '분열된 제국'의 초상은 하루아침에 그려진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원죄가 쌓여 현재의 비극이 되었고, 이것을 방치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미래가 도래할지도 모릅니다.
여기, 혼돈에 빠진 미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섬뜩한 미래를 관통하며 지금의 사태를 해부하는 세 편의 작품이 있습니다.
지금의 미국을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알리 아바시 감독의 <어프렌티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970년대 뉴욕의 뒷골목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도널드 트럼프라는 전직 대통령의 전기 영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현대 미국 정치를 지배하는 '승자 독식'의 논리가 어떻게 잉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악의 기원'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영화는 도널드 트럼프(세바스찬 스탠)가 악명 높은 변호사 로이 콘(제레미 스트롱)을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유약한 청년 트럼프는 로이 콘이라는 '어둠의 멘토'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세 가지 절대 법칙을 전수받습니다. "첫째, 공격하라. 둘째, 절대 혐의를 인정하지 마라. 셋째, 패배하더라도 승리했다고 주장하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것은 2020년대 미국 정치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사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린 트럼프식 화법의 원형이자 헌법입니다. 영화는 스승 로이 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괴물이 되어가는 제자의 모습을 통해, 욕망이 도덕을 삼키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어프렌티스>가 섬뜩한 이유는 트럼프 개인의 서사를 넘어, 미국이라는 사회가 어떻게 '수치심'을 잃어버렸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과정의 정당성보다 결과의 승리만이 추앙받는 사회, 진실보다 더 큰 목소리가 힘을 얻는 사회. 영화 속 1980년대의 화려하지만 부패한 뉴욕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2026년 미국의 거울상입니다. 로이 콘이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병(에이즈)을 부정하고 거짓된 강함을 연기했듯, 지금의 미국 역시 내부가 곪아 터지는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We are Number One"을 외치는 기이한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 모순의 씨앗이 언제, 어떻게 뿌려졌는지를 증언하며, 현재의 혼란이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라 예견된 인재였음을 웅변합니다. 트럼프는 원인이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와 승리지상주의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입니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시빌 워>는 '만약에'라는 가정을 지워버린 채, '언젠가 닥칠' 현실을 다큐멘터리처럼 들이밉니다. 영화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연합한 '서부군'이 워싱턴 D.C.로 진격하는 내전 상황을 그립니다. 정치적 이념이 정반대인 두 주가 손을 잡았다는 설정부터가 지독한 아이러니이자 블랙 코미디입니다.
감독은 내전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가 '선'이고 '악'인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총성이 울리고, 이웃이 이웃을 쏘고, 쇼핑몰 주차장이 처형장으로 변한 지옥도를 건조하게 전시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현재의 미국을 꿰뚫는 방식입니다. 이유는 사라지고 혐오만 남은 시대.
영화 속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은 총격전이 아닙니다. 군인이 주인공 일행에게 총을 겨누며 "어떤 종류의 미국인이지? (What kind of American are you?)"라고 묻는 순간입니다. 같은 여권을 가진 국민을 '종류'로 나누어 생사를 결정하는 이 장면은, 현재 미국 사회에 만연한 '정체성 정치'의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발현입니다. 내가 공화당 지지자인지 민주당 지지자인지, 어느 주 출신인지에 따라 적과 아군이 갈리는 현실. 영화는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의 이웃을 '같은 시민'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고 있는가?
주인공인 종군 기자들은 무너져가는 미국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백악관으로 향합니다. 그들의 렌즈에 비친 것은 영웅적인 투쟁이 아니라, 허무하고 끔찍한 살육뿐입니다. 링컨 기념관이 폭파되고 백악관이 점령당하는 클라이맥스는 카타르시스가 아닌 깊은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시빌 워>는 현재 미국인들이 느끼는 잠재적 공포, 즉 '이대로 가다간 정말 나라가 쪼개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시각화한 악몽입니다. 영화는 경고합니다. 대화가 멈춘 곳에서 정치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직 전쟁뿐이라고. 그리고 그 전쟁터는 먼 중동이나 아프리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앞마당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분열과 내전으로 기존 시스템이 붕괴한 후, 그 폐허 위에는 무엇이 들어설까요? 마거릿 애트우드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은 혼란을 틈타 들어선 신정 독재 국가 '길리어드'를 통해 가장 암울한 미래를 예언합니다. 환경오염과 출산율 저하라는 국가적 위기를 빌미로, 극우 종교 집단은 미국의 헌법을 정지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몰수합니다.
여성을 '걸어 다니는 자궁'으로 도구화하여 '오브프레드(Offred, 프레드의 것)'라 부르는 설정은, 국가가 개인의 신체와 사상까지 소유하겠다는 파시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상징합니다. 현실의 미국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되고, 공권력이 개인의 가장 내밀한 선택권에 개입하기 시작한 현상은 길리어드의 악몽이 이미 현실의 문턱을 넘었음을 시사합니다. 통제의 시작은 여성이었을지 모르나, 그 칼끝은 결국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전체의 목을 겨눕니다.
주인공 준의 "우리는 깨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늦어버렸다"는 독백은 뼈아픕니다. 독재는 언제나 대중의 공포와 무관심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지도상에서 '미국'이라는 이름이 지워지고 잔존 세력과 길리어드가 대치하는 형국은, 앞서 소개한 영화 <시빌 워>가 끝난 직후의 풍경처럼 서늘한 기시감을 줍니다. 붉은 옷을 입은 시녀들의 행렬은 여성의 비극을 넘어, 자유를 방관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를 묻는, 우리 코앞까지 다가온 전체주의의 경고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