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으려는 의지'와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
미네소타의 겨울은 잔인하리만치 춥다.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아스팔트 위, 살을 에는 칼바람이 들이치는 갓길 차량 안에서 르네 굿(Renee Good)이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붉은 피는 차가운 눈발에 섞여 검게 얼어붙고 있었고,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의 거친 발걸음 소리와 사이렌,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황량한 공기를 찢고 있었다.
전 세계로 퍼진 그 현장 영상을 보며 섬뜩한 명제 하나를 떠올린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 문장은 본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는 죽음의 비가역성을 뜻하는 슬픈 관용구였다. 그러나 2026년 오늘, 이 세계에서 이 말의 의미는 변질되었다. 이제 그것은 산 자들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사실을 난도질하고, 죽음의 맥락을 소거하여 거래하는 '정치적 기회'와 동의어가 되었다. 죽은 자의 입이 닫히는 순간, 권력을 쥔 산 자들의 혀는 더욱 현란하게 춤을 춘다.
최근 유출된 르네 굿 사살 당시의 현장 영상, 정확히 말해 미 국토안보부(DHS)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잘라내고 싶어 했던 그 '원본'에는 충격적인 진실이 숨 쉬고 있었다. 총아를 당긴 ICE 요원 조나단 로스가 본인의 개인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의 도입부, 르네 굿의 혼다 세단 뒷좌석 창문 너머엔 그녀의 반려견이 타고 있었다.
정부가 '급진 좌파 테러리스트'라고 낙인찍은 인물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위대한(?) 테러 작전을 수행하러 가면서 사랑하는 반려견을 뒷좌석에 태우고 갔다는 말인가? 이 짧은 장면은 정부가 쌓아 올리려는 거창한 시나리오의 기반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그것은 테러리스트의 작전 차량이 아니라, 아내와 반려견을 태우고 6살짜리 막내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일상을 영위하던 평범한 생활인의 차였다.
국토안보부가 공식 배포 영상에서 이 장면을 삭제한 이유는 자명하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권력은 대상을 타자화하고 악마화할 때만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개가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대중은 르네 굿을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개를 키우는 우리 이웃'으로 인식하게 된다. 개의 존재는 그녀를 괴물에서 인간으로 복원시킨다.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인류 역사상 정보 통신 기술이 정점에 달했다는 2026년 지금, 역설적이게도 20세기 냉전 시대에나 썼을 법한 유치하고 투박한 가위질로 진실을 편집했다. 초고화질 8K 영상이 난무하는 시대에 진실은 저해상도로 뭉개졌다. 슬프게도 그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조지 오웰이 경고했듯,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조작된 과거를 기꺼이 믿고 싶어 하는 대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만적인 국가의 행태와 맹목적인 대중의 광기는 비단 남의 나라, 먼 미래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며 성수대교가 끊어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물리적 참사를 목격했다. 그러나 내가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절망, 소위 '악마'의 민낯을 본 것은 건물이 무너졌을 때가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광화문 광장에서였다.
진상을 규명해 달라며 굶고 있는 유가족들의 텐트 앞에서, 일베 회원들은 피자와 치킨을 시켜 먹으며 소위 '폭식 투쟁'을 벌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단장의 고통 앞에서 그들은 음식 냄새를 풍기며 낄낄거렸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의 대상이 아닌, 조롱거리이자 유희의 도구로 소비하며 자신들의 비루한 존재감을 확인했다. 그 순간, 한국 사회를 지탱하던 도덕적 마지노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염치는 붕괴했다.
그 후 한국을 떠났던 내가 10여 년 후 또다시 마주한 비극은 이태원 참사였다. 변한 것은 없었다. 아니, 상황은 더욱 교묘하고 악랄해졌다. 세월호 때 혐오를 주도한 것이 민간의 극우 세력이라는 일탈적 집단이었다면, 이태원 참사에서는 국가가 직접 그 혐오의 선봉장에 섰다.
정부는 159명의 젊은이가 길 위에서 스러져간 그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대신 뜬금없는 마약 검사를 언급했다. "놀러 가서 죽은 것"이라는 프레임을 은밀히, 그러나 조직적으로 유포했다. 국가라는 시스템이 국민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기를 포기하고, 희생자들에게 '부도덕'의 낙인을 찍어 자신들의 책임을 희석하려는 비열한 셈법이었다. 이는 국가가 악플러가 되어 국민을 공격한 꼴이나 다름없었다.
변성현 감독의 영화 <굿뉴스>에는 통찰력 있는 대사가 나온다. "1. 일어난 사실, 2. 약간의 창의력, 3. 믿으려는 의지." 지금 전 세계 권력과 미디어는 이 공식을 충실히, 그리고 악의적으로 따른다. 르네 굿이 그 도로 위에 있었다는 건조한 '사실'에, 테러리스트라는 '창의력(조작)'을 섞는다. 그리고 대중에게 '믿으려는 의지'를 강요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 번째, '믿으려는 의지'의 품질이다. 대중을 선동하는 자들이 요구하는 믿음은 사유하지 않는 맹목과 편향이다. 하지만 진정한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믿으려는 의지'에는 자신의 양심과 철학, 그리고 인격이 투영되어야 한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 결과가 가져올 파장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엄중한 선언이어야 한다.
그러나 르네 굿의 반려견을 지운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 국토안보부도, 세월호 앞에서 피자를 먹던 청년들도, 이태원 유가족을 모욕하며 마약 수사를 운운한 관료들도 결코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은 죽은 자의 영원한 침묵 뒤에 숨어 자신들의 알리바이를 조작할 뿐이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우리에게는 무거운 의무가 남는다. 밀란 쿤데라는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라 했다. 우리는 그들이 기필코 잘라내려 했던 영상의 앞부분을, 뒷좌석에서 떨고 있던 반려견의 눈망울을, 세월호와 이태원 희생자들의 평범하고 찬란했던 일상을 끈질기게 기억해야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진실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다. 산 자들이 사실을 조작하고 흥정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저항은 그들이 만든 '창의적인 거짓'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책임을 걸고, 기어이 감춰진 진실을 찾아내 믿으려는 그 고단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이 이 야만의 시대를 건너는 우리의 슬픈, 그러나 마땅한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