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공범 카르텔'의 나라, 그리고 침묵하는 진보
"이것은 남성들에게 전하는 나의 메시지입니다. 이 싸움은 단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남성들이 이 투쟁에 직접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마초 문화'를, 벽돌 한 장 한 장 뜯어내듯 반드시 해체해야 합니다.이것은 단지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여성은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며, 오직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 아이들이 이해하도록 교육하는 문제입니다. 브라질이 치르고자 하는 유일한 전쟁은 굶주림, 그리고 불평등과의 전쟁뿐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투자와 교육입니다."
지난 2월 4일, 브라질의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여성 살해 방지 협약식’에서 토해낸 일성이다. 지구 반대편의 지도자는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경제’나 ‘주가 부양’이 아닌, 남성성의 근본적인 개조와 가부장제의 해체를 선언했다.
룰라의 이 비장한 선언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브라질의 현실은 여성들에게 ‘전쟁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브라질 공공안전포럼(FBSP)의 통계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6시간마다 1명꼴로 여성이 살해당한다. 2015년,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가 ‘페미사이드(Femicide·여성 살해)법’을 제정해 처벌 수위를 높였지만,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는 뿌리 깊은 ‘마초 문화’가 법 위에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룰라의 발언은 거대한 사회적 함의를 갖는다. 그는 ‘여성을 보호하자’는 시혜적 태도를 넘어, 문제의 원인이자 가해의 주체인 ‘남성’에게 뼈아픈 성찰과 변화를 요구했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그것도 남성 대통령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문화를 해체하자”며 남성 연대의 카르텔을 내부에서부터 타격한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을 동등한 존엄을 가진 시민으로 대우하지 않는 나라는, 그 어떤 경제 지표가 좋아져도 결국 내부로부터 썩어 문드러질 수밖에 없음을.
하지만 시선을 돌려 지금 우리의 대한민국을 본다. 세계 최저의 출생률로 국가 소멸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음에도 정치권은 여전히 ‘집값’과 ‘지원금’ 타령만 하고 있다.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가 고작 ‘돈’ 때문이라고 믿는(혹은 믿고 싶은) 저 게으른 관료들의 나태함 뒤에는, 본질을 마주하기 두려워하는 비겁함이 숨어 있다.
그 비겁함의 증거는 명백하다. 브라질이 ‘여성 살해’를 국가적 의제로 격상시켜 통계로 관리하고 싸우는 동안, 한국은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별도의 통계조차 내지 않는다. 스토킹, 가스라이팅,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교제 폭력 및 살인이 만연해 있지만, 국가는 이를 단순 개인 간의 문제로 치부하며 수치조차 가늠하지 못하게 만든다. 통계가 없으니 문제도 없다는 식이다.
이토록 투명하게 은폐된 폭력에 가려진 본질은 바로, 이 나라가 거대한 ‘남성 공범 카르텔’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프리 엡스타인의 범죄 파일은 미국식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어떻게 결탁하여 괴물을 낳았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설계도다. 전용기를 타고 개인 섬을 드나들며 전 세계 미성년자를 유린한 ‘롤리타 익스프레스’ 탑승객 명단에는 전직 대통령, 현직 대통령, 왕자, 과학자, 그리고 월가의 거물들이 빼곡하다. 하지만 지금 감옥에 갇힌 사람은 누구인가? 오직 한 사람, 엡스타인의 조력자이자 관리자였던 여성, 기슬레인 맥스웰뿐이다.
이 기묘한 광경은 역사적으로 되풀이된 ‘가부장적 꼬리 자르기’의 전형이다. 성 착취 구조에서 권력을 쥔 남성 ‘오너’들은 언제나 시스템 뒤에 숨는다. 그들은 법과 자본이라는 방패 뒤에서 안전하게 쾌락을 소비하고, 문제가 터지면 그들을 위해 여성을 공급했던 ‘마담(여성 관리자)’을 제물로 바친다. 대중은 맥스웰이라는 ‘마녀’가 화형 당하는 것을 보며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아이들을 사냥했던 진짜 포식자들은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 사건의 본질이 단순한 성범죄를 넘어선다는 점이다. 엡스타인의 뒤에는 모사드와 CIA, 그리고 피터 틸의 ‘팔란티어’로 대표되는 정보 권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들이 수집한 권력자들의 성적 치부책은 국가 기밀과 맞바꿀 수 있는 무기였을 것이다. 이것은 안보의 민영화이자, 국가 시스템의 타락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이 거대한 카르텔을 건드리는 대신, 맥스웰 한 명을 감옥에 보내는 것으로 서둘러 사건을 종결지으려 한다.
한국의 미디어, 특히 진보를 자처하는 대형 유튜브 채널들이 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더욱 절망적이다. 그들은 맥스웰이 아버지 로버트 맥스웰과 연인 엡스타인에게 길들여진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복합적인 맥락을 거세한다. 대신 그녀에게 ‘희대의 악녀’, ‘포주’라는 딱지를 붙여 악마화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이는 그들이 민희진이나 강미정 같은 여성들을 ‘건방지고 나대는 여자’로 프레임 씌워 마녀사냥했던 방식과 소름 끼치도록 동일하다. 거대 엔터테인먼트 자본(하이브)의 불합리한 구조에 맞서 목소리를 냈던 민희진은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탐욕스러운 마녀’나 ‘히스테릭한 미친년’으로 조리돌림당했다.
또한, 재벌가 남편의 마약 투약과 경찰 유착 의혹, 심지어 조국혁신당 관계자의 성비위 문제까지 용기 있게 내부 고발했던 아나운서 출신 강미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진실을 말하자, 사건의 본질인 ‘권력형 비리’와 ‘성폭력’은 지워졌다. 대신 진보 유튜버들은 그녀를 ‘가정을 파탄 낸 꽃뱀’ 혹은 ‘감히 우리 진영에 흠집을 낸 배신자’로 낙인찍어 집단적으로 난도질했다.
메신저(여성)를 악마화하여 메시지(권력의 부패)를 덮어버리는 것. ‘타락한 여자’를 욕하는 것은 남성 시청자들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주는 가장 안전하고 비겁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엡스타인 카르텔의 공범이 된다.
이 썩어빠진 토양 위에서 도널드 트럼프라는 독버섯이 자라난 것은 필연이다. 트럼프는 끊임없이 이민자들을 “성범죄자”, “강간범”이라 매도하며 국경을 막아야 한다고 선동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심리학적 투사이자 명백한 거짓이다.
텍사스 공공안전국(DPS)의 데이터를 분석한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불법 이민자의 범죄율은 미국 태생 시민보다 45%나 낮았다. 팩트는 명확하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의 소녀들을 조직적으로 사냥한 것은, 맨발로 국경을 넘는 가난한 이민자가 아니라 전용기 ‘롤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국경을 넘나드는 백인 엘리트 남성들이었다. 트럼프는 가장 약한 고리인 이민자들에게 혐오를 뒤집어씌움으로써, 자신과 엡스타인을 비롯한 친구들의 더러운 죄악을 가리는 거대한 연막을 친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면면을 보라. 그가 여성을 기용하는 방식은 북한의 ‘기쁨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철저하게 남성 권력을 위한 ‘기능’과 ‘미학’으로서만 존재를 허락받는다. 영부인 멜라니아는 제국의 부를 과시하는 침묵하는 ‘전시용 트로피’로, 법무장관 팸 본디는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를 온몸으로 막아내는 ‘고기 방패’로 소비된다.
어디 그뿐인가. 27세의 대변인 캐롤라인 레빗은 국정 철학 대신 트럼프의 분노를 대리 배설하는 영혼 없는 ‘확성기’가 되었고, “개가 말을 듣지 않아 총으로 쏴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회고록에 쓴 크리스티 노엄은 마초적 가학성을 충족시키는 포르노그래피적 판타지로 기능한다. 암살당한 남편의 뒤를 이어 ‘순교자의 미망인’이라는 서사를 입은 에리카 커크까지, 이들의 눈빛에 영혼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주체적인 인간이 아닌, 독재자의 서사를 완성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괴물의 탄생을 막지 못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바로 미국 민주당이다. 그들은 ‘PC(정치적 올바름)’를 외쳐서 망한 게 아니다. PC를 외치면서도 정작 백인 엘리트 중심의 기득권은 조금도 내려놓지 않았던 그 역겨운 위선 때문에 자멸한 것이다.
우리는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향해 “개탄스러운 집단”이라고 조롱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이비리그 학위를 가진 민주당 주류 세력은 샴페인을 마시며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을 “배우지 못한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었다. ‘올바른 말’을 독점한 엘리트들의 오만이, 하루하루 생존이 급급한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큰 모욕감을 줬는지 그들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하늘에서 떨어진 재앙이 아니다. 미국 사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쌓아 올린 이 거대한 위선과 혐오가 빚어낸 필연적인 최종 ‘결과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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