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남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가
우리는 왜 남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가
잘 지내던 미국, 유럽 친구들에게서 서서히 이질감이 들기 시작할 때였다. 처음엔 그저 문화적 차이이려니, 혹은 개인의 성향 차이이려니 했다. 처음엔 호기심에 호감으로 보이기만 했던 그들의 일상 속 섬세한 결에서 나는 이유 모를 불편함과 거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균열이었다. 그들은 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거나, 역사를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습관이 배어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제국이 아닌 식민지였던 민족의 DNA가 느끼는 본능적인 경보음이라는 것을.
그때 즈음 우연히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어스 라이징>을 봤다. 르완다 대학살의 생존자이자 영국 상류층 가정에 입양된 주인공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 이 작품은, 서구가 내세우는 '국제 사법 정의'가 아프리카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공허하고 위선적인지 서늘하게 고발한다. 영국이 르완다에 무슨 짓을 했는지, 유럽이 아프리카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파헤치는 그 서사는 내 안의 경보음을 더욱 증폭시켰다. 수많은 자료들을 찾아보고 알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돔'이 씌워져 있다는 사실을.
돔 바깥세상은 시끄럽다. 미국과 유럽의 뉴스, 주식 시장의 등락, 최신 아이폰과 AI 기술에 대한 환호로 가득하다. 하지만 돔 안쪽, 아프리카와 제3세계의 목소리는 철저히 '음소거' 되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돔 밖의 사람들은 돔 안의 비명을 '듣지 않기로' 합의했다.
돔 밖의 소란스러운 쇼 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는 일론 머스크와 프랑스의 싸움에서 시작해, 아프리카의 잊힌 비명을 지나, 식민지의 기억을 가진 한국인인 우리의 얼굴을 마주하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2026년 2월, 프랑스 파리 검찰이 일론 머스크의 X(구 트위터) 사무실을 급습했다. 혐의는 아동 성착취물 유포 방조와 딥페이크 범죄 방치. 머스크는 즉각 "정치적 공격"이라며 발끈했다.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 정부 관계자는 서늘한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의 그 논리가 '어떤 섬'에서는 통용될지 몰라도, 이곳 프랑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21세기 외교사에서 가장 모욕적이고도 정확한 일갈이다. 여기서 '어떤 섬'은 중의적이다. 표면적으로는 법 위에 군림하려는 빅테크 기업들의 무법지대를 뜻한다. 하지만 그 심연에는 '제프리 엡스타인의 섬'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도사리고 있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 모여 아동을 성적으로 착취하며 그들만의 타락한 낙원을 즐겼던 그 섬. 프랑스는 머스크를 향해 "너희가 그 섬에서 서로의 더러운 비밀을 공유하며 낄낄거렸을지 몰라도, 여기는 법치 국가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업과 국가의 싸움이 아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미국의 빅테크 자본과, '몰락해 가는 귀족'인 유럽 국가 권력의 충돌이다. 트럼프와 머스크, 피터 틸로 대변되는 미국의 신흥 엘리트들은 국가를 존중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덴마크의 영토인 그린란드를 쇼핑하듯 사겠다고 했고, NATO를 용역 업체 취급하며 방위비를 분담하지 않으면 러시아의 침공을 용인하겠다고 협박했다. 피터 틸은 유럽의 규제를 '적그리스도'라 부른다. 그들에게 국가는 자신들의 무한한 확장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다. 그들은 단순히 규제를 비난하는 것을 넘어, 최신 AI 기술을 유럽에만 제공하지 않겠다며 '기술 봉쇄'의 칼을 들이대고 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철저히 자기만의 '섬'에 갇혀 있다. 돈과 힘만 있으면 법도, 윤리도, 역사도 짓밟을 수 있다는 천박한 야수성의 섬이다.
이에 맞서는 유럽의 태도는 일견 비장해 보인다. 그들은 '병리적 완벽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규제에 집착한다. AI 법, 디지털시장법(DMA), 디지털서비스법(DSA) 등 온갖 법안을 만들어 미국의 야수들을 가두려 한다. 사실 그들의 속내는 투명하다. 기술 패권 경쟁에서 완벽하게 패배한 유럽이 꺼내 든 '규제'는 정의의 방패가 아니라, 혁신할 능력을 잃은 늙은 대륙이 미국의 기술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쳐놓은 21세기형 관세 장벽일 뿐이다. 스스로 빅테크를 만들어낼 수 없으니 남의 성장에 족쇄를 채워 통행료(과징금)라도 뜯어내겠다는 비겁한 생존 본능, 그것이 유럽식 '규제 만능주의'의 본질이다. 겉으로 보면 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의 사도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유럽의 도덕적 우월감은 역겨운 기만 위에 서 있다. 그들이 엡스타인의 섬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그 섬의 방문자 명단에는 영국의 앤드루 왕자, 노르웨이의 메테마리트 왕세자비 등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이 버젓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들은 미국 졸부들과 똑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똑같은 욕망을 배설했다. 지금 머스크를 때리는 것은 정의구현이라기보다, 엡스타인 리스트가 터지면서 더 이상 서로의 치부를 덮어줄 수 없게 된 카르텔 내부의 집안싸움에 가깝다.
한국인인 내가 보기에 유럽은 스스로 '거대한 박물관의 관리자'를 자처하는 듯하다. 마크롱 대통령 스스로 "유럽은 늙었고, 느리고, 불편하다"라고 자조했듯, 과거의 영광에 갇혀 혁신의 동력을 잃어버린 그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조상들이 약탈해 온 유물로 채워진 박물관과 아름다운 거리 풍경을 지키는 것으로 과거의 위상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오만함은 하늘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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