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대와 군대, 그리고 콜로세움 밖 진짜 가해자들

각자도생의 지옥에서 우리는 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가

by 조하나



100원 생리대를 조롱하는 사회


대학 시절, 내 생리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의 지갑에 늘 진통제를 챙겨서 다니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여성의 생리적 현상을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이 온전히 겪을 수 없는 고통임에도 이해하고 배려하려 애썼던 그의 모습은 여전히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현실의 한국 사회로 시선을 돌리면, 이러한 배려와 공감은 지극히 예외적인 개인의 미담에 그치고 만다. 인류 절반이 평생에 걸쳐 겪는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현상임에도 나는 여전히 품질이 좋고 가격이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생리대를 직구해서 쓴다. OECD 최고 수준의 생리대 가격을 묵인해 온 한국 사회의 무심함이 만든 촌극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생리대 가격 문제를 국정 의제로 꺼내 들며 지적하자, 마치 마법처럼 시장에 반값 생리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엔 국내 대형 유통 업체 다이소가 깨끗한나라와 협업해 '100원 생리대' 판매를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오랫동안 여성들이 생리대 가격의 부당함을 호소할 때는 꿈쩍도 않던 기업들이 대통령의 지적이 있자마자 화답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기형적인 현상보다 더 기괴한 것은 일부 대중의 반응이다. "100원짜리 생리대면 쓰레기 원료를 썼을 게 뻔하다"며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목소리들이 온라인을 뒤덮었다.


1차원적인 산수에 갇힌 이들의 논리는 참으로 빈약하다. 다이소에 유통되는 이 100원 생리대는 이름 모를 하청업체의 조악한 불량품이 아니다. 국내 생리대 시장 점유율 상위권을 다투는 '깨끗한나라'가 100% 국내에서 생산하는 제품이다. 가격 인하의 비결은 원료를 후려친 것이 아니라, 톱스타를 기용해 쏟아부은 천문학적인 광고비와 대형 마트 등 유통업체가 떼어가는 묵직한 마진, 즉 '유통과 마케팅의 거품'을 걷어낸 데 있다.


한국의 생리대가 미국이나 일본(개당 평균 170~180원대)보다 최대 두 배 가까이 비싼 370원대였던 이유는 원재료가 특별히 고급이어서가 아니다. 소수 3대 기업이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한 독과점 구조 속에서, 여성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필수품이니 가격을 아무리 올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악용한 결과다.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돈이 안 되니 '안 하던' 기업들의 오만한 폭리를 두고,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질이 떨어져서 싼 것"이라며 기업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현실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시장 경제 자유'라는 달콤한 명분 아래 자본의 횡포를 방치하면, 기업의 폭리를 품질로 착각하는 소비자가 탄생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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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화된 고통과 '여성'에 대한 유럽의 인식


생리대는 단순한 위생용품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류의 탄생과 돌봄, 즉 '사회적 재생산'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국가는 이 막대한 재생산의 비용과 신체적 고충을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안지 않고, 철저히 여성 개인의 지갑과 몸이 감당해야 할 '사적 소비재'로 떠넘겨 왔다.


이 부조리를 완벽하게 깨부순 것이 바로 스코틀랜드다. 2020년, 스코틀랜드는 전 세계 최초로 전 국민 대상 생리용품 무상 제공을 법제화했다. 국가 예산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다. 공중화장실에 비치된 휴지는 공공재로 여기면서, 왜 인구 절반이 겪는 생리에 필요한 물품은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했다. 생리대를 시장의 논리에서 빼내어 '인간의 존엄을 위한 기본권'으로 재정의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반면 한국 여성들이 처한 현실은 비싼 생리대 값에서 끝나지 않는다. 부동의 OECD 성별 임금 격차 1위(약 29%), 결혼과 출산을 기점으로 곤두박질치는 M자 곡선의 덫, 그리고 세계경제포럼(WEF) 글로벌 성(性) 격차 지수에서 매년 최하위권을 맴도는 지표가 증명하듯 여성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무한 경쟁을 강요받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차별 속에서 남성들이 던지는 '여성 징병'이라는 화두는 얼마나 공허한가. 불과 얼마 전인 2025년 11월, 스위스에서는 남성에게만 적용되던 병역 의무를 여성에게 확대하려는 개헌안이 국민 투표에 부쳐졌으나 84%라는 압도적인 반대로 부결되었다. "여성들은 이미 무급 돌봄 노동의 상당 부분을 떠안고 있고 임금 격차 등 사회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데, 여기에 군 복무 의무까지 얹는 것은 성평등이 아니라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폭력"이라는 스위스 사회의 성숙한 합의가 이끌어낸 결과다. 진정한 성평등 지표를 먼저 냉정하게 따져본 스위스의 사례는, 구조적 모순은 덮어둔 채 "우리도 당했으니 너희도 당해봐라"는 식의 1차원적인 화풀이에 머물러 있는 한국 사회에 묵직한 시사점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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