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률엔 목숨 걸고 자살률은 외면하는 나라
'죽고 싶다'와 '살기 싫다'라는 말의 무게는 다르다. 전자가 벼랑 끝에 선 자의 절박한 비명이라면, 후자는 더 이상 발을 내디딜 땅조차 없음을 깨달은 자의 체념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절반은,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은 이 '살기 싫은' 감각의 늪에 서서히 잠기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문학적 수사나 일시적인 우울감이 아니다. 숫자는 비극의 실체를 잔인하고 명확하게 증명한다. 2024~2025년 발표된 보건복지부와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20대와 30대 여성의 자살률 증가 폭이 다른 인구 집단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한국 2030 여성의 자살률은 지난 10년간 가파르게 치솟아 전 세계 주요국(OECD 및 주요국 기준) 압도적 1위를 기록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조용한 학살'이라 부르며 한국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이라 경고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대칭성이다. 한국의 전체 자살률과 남성 자살률은 향후 완만한 감소세가 예측되지만, 유독 2030 여성의 사망률만 2030년까지 계속해서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무엇보다 심각하게 보는 건 압도적인 '증가 속도'와 '자살 시도율'이다. 이는 사회가 특정 집단을 조직적으로 사지로 밀어 넣고 있다는 증거다.
전문가들은 2030 여성 자살률 급증의 핵심적인 배경에 '노동 시장에서의 배제와 주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정규직 및 시간제 근로 비중의 증가, 구직을 포기한 무직자 비율의 상승 그래프가 청년 여성 자살률 증가 추이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양질의 일자리에서 밀려난 경제적 벼랑 끝에 다양한 형태의 젠더 폭력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심리적 고립감이 겹치면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소리 없는 죽음의 행렬 앞에서도 사회는 지독하게 평온하다. 여성 의제에 무관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권력이다.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특권'을 얼마나 누리며 사는지 알 수 있는 길은 직접 약자나 소외계층이 되어보지 않고는 많지 않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타인의 고통을 몰라도 자신의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특권이다.
세계를 움직인다는 거시적인 정치 무대를 보자. 멕시코 대통령이나 EU 수장을 제외하곤 세계 대부분의 지도자 자리는 견고한 남성들의 카르텔이다. 매일 아침 뉴스를 장식하는 트럼프, 하메네이, 네타냐후, 푸틴 같은 남성 지도자들이 마치 속옷을 내리고 '누구 X알이 더 큰가' 내기라도 하듯 전 세계의 명운을 건 마초적 권력 투쟁을 벌인다. 한국의 정치권이라고 다를 바 없다. 목소리를 낼 여성 자체가 거의 없으며, 여성이 온전한 시민으로서 끼어들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지독하게 폭력적인 시스템이다.
이 거대한 무대의 폭력성은 개인의 미시적인 일상으로 고스란히 복제된다. 성별의 문제를 교묘하게 '개인의 인성' 문제로 치환하며 구조적 폭력을 은폐하려는 기만은 도처에 널려 있다. 내가 다이빙 강사라는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 자신이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게 다이빙에 대해 실컷 떠들던 남성. "저 다이빙 강사인데요"라는 한 마디에 사과 한마디 없이 굳게 닫히던 그 입술은 이 사회의 축소판이다. 경제나 주식을 이야기하면 "여자인 네가 뭘 알아?"라며 묵살하고, 최소한의 인권을 이야기하면 "너 페미지? 페미는 걸러야 해"라며 대화의 셔터 자체를 내려버리는 일상적인 맨스플레인과 낙인찍기.
성별과 전혀 관련 없는 주제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받아야 하는 이 모든 모욕을 겪지 않아도 되는 남성들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누리는 특권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모르는 남성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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