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한국을 떠나는 편도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언젠가는 내 나라가 꽃을 피우리라 기도했다. 화려하고 대담한 꽃은 아니어도 상처 많고 연약하고 애처로운, 한(恨) 많은 우리 사연이 녹아든 청초하고 강인한 꽃이 피길 바랐다.
2024년,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 보낸 시간은 여전히 ‘그래도 되는’ 나라, 그럼에도 ‘나만 아니면’ 되는 하루살이 같은 경험이었다. 여전히, 그리고 아직은, 꽃이 피려면 멀었나 보다.
내 생애 첫 선거권을 행사했던 대선 때 나와 함께 투표장에 가 노무현을 뽑았던 아빠는 이후 생각을 바꿨다. “우리 나라가 파이를 좀 더 키워야 한다”라고, 아빠가 그 이유를 밝혔을 때, (지금 세상이 MZ를 돈줄로 보고 떠받들 듯) 제트기에 태워져 고공을 날던 ‘밀레니얼 세대’에서 찬밥 덩어리 애물단지 ‘88만 원 세대’ ‘82년생 김지영’으로 전락한 나는, ‘그 커진 파이의 정당한 몫이 결코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나는 파이의 크기가 아닌 분배에 분명한 문제가 있다고, 중산층이 약자와 소외계층과 연대해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보다 분명히 해둬야 할 때라고 믿었다. 그 시기를 놓친 미성숙한 우리 사회는 결국,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양극단으로 갈라져 이기적으로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에 치를 떨며 끝이 없는 비난과 모욕과 조롱으로 가득한 혐오의 시대를, 기어코 만들고야 말았다.
아빠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잘 사는 집 아이가 잘난 척 잘못했다간 얻어터지기 일쑤였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대부분의 반 친구들이 나와 비슷한 겸손한 집에 살았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주소에 따라 집 평수와 사는 수준을 가르고 서로를 함부로 판단하는 사회가 되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 집안의 경제적 위치를 스스로 인식하게 됐다. 돈이 많이 드는 피아노도, 외고 진학도, 유학도, 모든 게 무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대학을 가야 했다. 모든 것의 기준은 돈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못 사는 만큼 꿈을 줄이고, 욕망을 줄였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초등학생 딸을 일주일 내내 영어만 써야 하는 외고 캠프에 보낸다며 기뻐했다. 그렇게 딸의 자아를 대신 살아내는 엄마가 된 그 친구를 보며, 내가 돈 때문에 버려야 했던 욕망이 얼마나 우습고 초라한 것이었는지 알았다. 결핍과 상처로 인해 나는 동정심과 공감, 유대의 가치를 배웠고, 그 결핍과 상처를 다이빙으로, 또 글 쓰는 일로 나만의 꽃을 피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 구성원 사이에 그어진 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이 희미하게나마 존재했다. 그러다 사회는 소셜미디어에 잠식되며 ‘플렉스’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자신이 정당하게 번 돈을 과시하는 게 오히려 미덕이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문화 씬에 있던 나는, 여론과 문화의 흐름 역시 기업과 자본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바꿀 수 있다는 걸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플렉스’라는 개념이 달갑지 않았다. 팔고, 팔고, 더 팔고 싶은 기업은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소비 심리를 무한히 키우는 게 존재의 목적이니까.
내가 인디 씬에서 잡지사 에디터로 활동했을 당시, Dok2 같은 뮤지션이 ‘돈돈돈’ 거리며 돈을 벌었다. 인디 씬의 한가운데에서 내가 느낀 절망은 돈 잘 버는 뮤지션을 향한 시기 질투나 아니꼬움이 아니라, 돈을 못 벌어도 멋있게 음악 하는 인디 뮤지션에게 상대적으로 쏟아지는 비아냥과 조롱, 모욕 때문이었다. “돈도 못 버는 주제에 아무도 안 듣는 음악을 왜 하냐"라는 비난과 조롱을 겁 없이 퍼붓던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끓던 하 수상한 시절이었다. 그들 역시 잘 버는 이들에 대한 증오와 무력함을 그렇게 비겁하고 무책임하게, 선량하고 약해서 대응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화풀이했다. 그래서 더 나빴다. 그렇게 몇몇은 시류에 잘 편승해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 돈을 많이 벌었고, 또 다른 몇몇은 그 상대적 박탈감과 무기력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마지막 사회적 안전핀이 제거되는 것을 목격했다. 결국, 회사에 사표를 내고 서울을 떠났다.(<서울에서 도망칠 용기>)
‘플렉스’는 이후 별의 속도로 우리의 삶을 잠식해 갔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TV, 지구상의 수억 명이 각자의 <트루맨 쇼>를 진행하는데, 대부분 경제적으로 잘 사는 사람이 콘텐츠를 제작, 생산, 배급하고, 못 사는 사람이 시청자가 된다. 넉넉한 사람들의 럭셔리 라이프 스타일에 24시간 가스라이팅 당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들이 슬쩍 흘려 보인 그들만의 세상에 들어설 수 있을 거란 착각에 빠져 돈을 섬기고, 기꺼이 부자의 편을 든다.
삼성이 그 많은 불법과 탈법을 저질러도 ‘재드래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불공정과 부정도 부를 두르면 괜찮다. ‘가난은 무능’이라며 남이 더 벌면 내가 못 번다고 그토록 서로를 죽도록 혐오하면서도, 삼성이 더 벌면 내가 못 벌어도 나라에 득이라는 희한한 믿음에 사로잡혀, 재벌과 오너 일가의 문제에는 눈을 감는다. 각자도생이다. 한국 사회의 어른들이 민주주의를 희생시켜 가며 그토록 열심히 일한 이유가 바로 약육강식, 각자도생의 야만적인 사회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함이었을 텐데. 21세기의 각자도생은 더욱더 가혹하고 살벌해져만 간다.
우리는 정작 화내야 할 것에 화를 내지 못하고 만만한 것에 화풀이한다. 우리 모두 못 버니 공정한 분배의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담론이나 토론, 연대는 더 이상 없다. 미디어 역시 진정 화를 내야 할 권력과 재벌을 비호하며 사람들에게 화풀이 대상을 던져준다. 한국에선 그게 연예인이고, 소수자이고, 약자다. 수천만 주주의 이익에 반해 사익을 쫓는 재벌과 국민의 주권에 반해 제 뱃속에 기름칠하기 바쁜 권력이 ‘공인’인데, 연예인을 ‘공인’이라 칭하며 저들에게 돌팔매질을 하라,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움직인다.
자신이 쏟는 사랑과 관심으로 커리어를 이어가는 연예인이기에 언제든 비난과 조롱, 모욕을 퍼부어도 괜찮다는 한국 사람들의 기괴한 정당성은 K-컬처의 눈부신 성장에 취하기 전, 우리가 들여다보고 반성하고 바꿔야 할 검은 그늘이다. 물질 만능주의인 미국의 천박한 민주주의의 전철을 성실하게 밝아 따르고 있는 한국이 삼성 오너에는 화를 못 내고, 권력자들에겐 침묵하면서 연예인은 함부로 대한다. 그렇게 한국은 점점 AI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보면서 점점 더 사고의 경직성을 굳혀가고, 더 이상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타인에 대한 이해도 배려도 없이 기어이 손에 칼을 들어 작정하고 목을 찌른다. 그래, 한국은 그래도 되는 나라니까. 돈이 있으면 그래도 되고, 힘이 있으면 그래도 되는 나라니까.
한국을 떠나 해외에 살면서, 한국의 눈부신 경제적 성장에 우쭐대며 동남아시아에선 거들먹거리고, 미국이나 유럽에선 아무 말도 못 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많이 만났다. “못 사는 나라라서”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태국에서 혀를 끌끌 차던 한국 사람들이 나는 역으로 안쓰러웠다. 일 년 내내 죽도록 일하며 여름휴가 일주일 꼴랑 받아 돈 많이 안 들면서 생색내기 좋은 태국에 와서는 한국어 알아듣지 못한다고 현지인들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보다 그 자식들이 더 가련했다. 아이들은 그 아름다운 곳에 와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학교와 학원만을 오가며 가난한 영혼으로 사그라들 것이다.
왜 우리는 엄한 데 화를 내나. <서울의 봄> 관객 수가 천만이 넘어도 독재자의 딸이 여전히 TV에 얼굴을 비추며 환하게 웃고, 군사정권의 후예들이 여전히 행정부에서, 국회에서, 사회 곳곳에서 호가호위하고 있는데도 그들에게 사과 한 번 제대로 요구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일본의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사회 수준을 가늠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나 혼자 잘 살고 싶은가’ 아니면 ‘다 같이 잘 살고 싶은가’이다. 이미 한국 사회는 권력과 미디어의 가스라이팅에 ‘다 같이 잘 사는 건 불가능하다’라는 인식과 철학이 팽배하다. 그렇게 우리는 결코 우승자가 나오지 않는 ‘오징어 게임’의 굴레에서 유리 천장에 비치는 잘 사는 사람들의 럭셔리 라이프에 가스라이팅 당하며 우리끼리 서로 치고받고 죽인다.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다 같이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시민의 연대다. 그런 면에서 현 권력은 성공했다. 우리는 정작 화낼 곳에 화를 내지 못하고, 엄한데 화풀이를 하며, 저마다 주머니에 죽음을 넣고 다니니까. 랜덤으로 돌아오는 차례에 하루는 이태원 아이들이었다가, 하루는 일터의 노동자였다가, 하루는 이선균이다. 사람들은 연대하는 대신, 당장 내일 내 차례가 아니길 바라며 하루살이처럼 버텨낸다. 내가 한국을 떠났던, 무관심과 무기력함의 기운이 온 세상에 드리워졌던 박근혜 정권 때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다. 그때 목숨을 끊었던 여배우의 가해자인 검사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고, 침묵했던 사람들은 잘 살고 있다.
잘 사는 사람은 못 사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신이 가진 것들에 가치가 매겨지고,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못 사는 사람을 못 살게 만들 것이다. 한국을 떠나 오랫동안 터를 잡았던 태국의 작은 섬에선 벤츠와 람보르기니가 오히려 애물단지다. 아무리 비싼 명품을 휘감고 와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런 사회의 분위기는 사회 자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이 만드는 거란 걸 나는 한국을 떠나서야, 뒤늦게 배웠다.
저출산과 지역 소멸, 양극화, 우울증, 자살률, 극도의 경쟁, 어느 하나 뒤처지지 않고 1등을 달리는 한국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솔한 연대를 이어가는 선한 양심이 있다. 10년 전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도 목소리를 냈던 문화예술인들이 있어 기자들은 침묵해도 영화는 할 말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가장 만만하게 함부로 대하는 연예인이 권력에 맞서 사회의 그릇됨에 유일하게 목소리를 냈다. 무엇을 잃게 될지 너무나도 잘 알면서 용기를 낸 윤종신(그는 나와의 10년 전 인터뷰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다)과 봉준호, 김의성은 진정한 사회의 어른이다. 그래서 나는 내 나라 한국이 더 애처롭고 귀하다.
한국이 상처가 많은 나라라 자격지심에 못 이겨 무엇이든 극단적으로 이기고야 마는, 이루고야 마는 나라가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이룬 성장과 그로 인한 풍경을 좀 즐길 줄 아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앞으로’ ‘더, 더, 더’ 하는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인스타그램 안에서의 자괴감과 조바심에서 벗어나 세상을 직접 탐험하고 경험하며,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온 길에서 속도를 좀 늦추고, 뒤처진 사람도 챙기고, 다 같이 돗자리 깔고 김밥도 나눠 먹으며, 그렇게 손잡고 천천히 가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재외국민 투표를 하고, 한국의 봄을 기다릴 것이다. 그래서 애처롭고 사연 많은 사람들이 주머니에 죽음 대신 청초한 꽃을 품고 다니길 기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