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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17. 2024

그들의 절망을 바라는 우리들에게

‘88만 원 세대’, 우리는 다음 세대를 축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전히 사회의 주변만 맴도는 젊은 사십 대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어.”     


고대 로마 시대에도, 중세 시대에도, 조선왕조실록에도 있었던 말이다.      


세대별로 뭉뚱그려 집단 속 개인의 이름을 지워 익명화시키고, 기득권의 가치에 따라 제멋대로 젊고 새로운 세대를 판단하고 구석에 몰아세우며, 그들을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세대로 포장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길들이는 시스템의 폭력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출발했다. 


급기야 ‘조폭’에까지 ‘MZ’를 붙이며 젊고 새로운 세대를 물어뜯는 한국 사회에서 나는 사회 구성원을 세대로, 성별로, 소득 수준으로 구분 지어 서로 이간질하는 사회의 교활함을 몸소 체험하는 나이, 사십 대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회의 주변을 어정쩡하게 맴돈다.      


모든 게 돈으로부터 시작해 돈으로 귀결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나의 이십 대는 한국 대기업의 연구 대상이었다. 세대별로 구분 짓는 건 소비자 타깃을 설정하고 영업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업들의 마케팅에 유용하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연구해 그 꿈의 실현을 도와주는 대신, 사회는 그 결과를 어떻게 하면 내가 돈을 더 벌게 만들어 그 돈으로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게 할까, 고민하는 데 사용했다. 그렇게 이름도 없이 ‘소비자’로만 분석된 나는, ‘다 안다’라는 오만함과 착각 속에 자신의 팍팍한 삶에 대한 짜증과 피곤함으로 젊은 세대를 대하는 기성세대에 짓눌려 이십 대를 보냈다. 








새천년의 희망에서 시대의 천덕꾸러기가 된 ‘M세대’
 


서구권 학계에서는 우리를 ‘밀레니엄 세대’, ‘M세대’라고 불렀다. 21세기 초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 성인이 된 세대를 말한다. 즉, 밀레니엄에 성인이 된 세대다. 


우리가 어렸을 땐 한국 사회엔 여전히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다. ‘하나 낳아 잘 기르자’는 국가의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볼 때까지 딸을 낳는 집들이 많았고, 남는 딸들은 해외로 입양을 보내곤 했다. 

    

시대정신에 반했던 용감한 우리 아빠는 장남이 대를 이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서슬 퍼런 명에도 불구하고 82년생 무남독녀 외동딸을 낳았다. 할머니는 지지리도 가난한 집구석에서 뼈 빠지게 일해 대학까지 보낸 맏아들에게 그 보상을 받아낼 생각이었지만, 아빠는 어떻게든 할머니에게서 벗어날 생각뿐이었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제 아들은 어떻게 못 해도 남의 자식인 며느리는 마음껏 괴롭혀도 되는 시어머니의 전성시대였다. 학교에선 선생님들의 엄혹한 체벌이 ‘사랑의 매’로 이해되었고, 스승의 날 교무실에 수북이 쌓인 선물과 촌지에 아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997년 외환 위기로 고등학교 수학여행지가 제주도에서 경주로 바뀌었고, 아빠의 사업 부도, 실직 등으로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안 나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때 우리는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새로운 시대 가치로 떠오른 ‘돈’을 시리게 마주해야 했다. 


십 대의 끝 무렵, 우리가 마주했던 혼돈과 절망은 연도의 앞자리 수가 바뀌는 해 2000년, 밑도 끝도 없는 낙관주의의 빛으로 덮였다.      


새천년을 맞이한 사회는 갑자기 깨어있는 척, 깨끗한 척 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리고 앞으로는 무조건 좋은 일만 생길 거라는 듯 2000년, 휴대폰과 노트북을 가지고 대학생이 된 첫 세대인 우리들을 멋대로 ‘새천년의 희망’ 비행기에 태웠다. 하도 비행기를 태우고 달래니 어지러웠다. 진짜 우리가 뭐라도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하늘을 날며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기성세대와 시스템은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 계약직 제도를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들여놓고는 우리에게 알아서 살아남으라 했다. 비행기의 추락이었다.     

  

사회에서 그리 칭찬하고 추켜세우던 ‘M세대’는 고학력 실업자 ‘88만 원 세대’가 되었다. 10여 년 전, TV 뉴스엔 우리 사회에 어쩌다 이런 세대가 출연하게 되었나, 어른들의 혀 차는 소리와 공허한 탄식만 가득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사회의 낙오자, 천덕꾸러기가 되어 스스로 ‘잉여 인간’이라 조소하며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기의 단물을 빤 부모 세대에서 태어난 ‘부모보다 가난한 첫 번째 세대’가 되었다. 


그뿐인가. 우리는 희망과 낙관주의로 가득했던 ‘새천년의 희망’에서 평균 결혼 연령 그래프를 훌쩍 올려버리고, 취업을 포기하거나, 자살하거나,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고립을 스스로 자처하는 등의 각종 사회 문제의 비율을 높여버린 천덕꾸러기 세대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이 부자 강국이 되었다는 건 우리의 부가 아닌, 부모 세대의 부를 말했다. 그리고 사회의 기득권을 쥔 부모 세대는 그 주도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부자 나라에서 가난하고 무기력한 개인이 되어가는 박탈감에 시달리며 우리는 여전히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권력을 가진 보수적인 부모 세대와 급변하는 시대의 새로운 메시지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메시지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쿠데타를 일으킬 용기도, 추진력도, 행동력도 없었던 우리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고, 가장 존재감 없는 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외환 위기의 경험은 새로운 시대의 가치인 물질만능주의로의 순응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부모 세대의 욕망을 그대로 따라가며 심지어 그 욕망을 더욱 키웠다.     

  

‘신자유주의’와 ‘글로벌 시티즌’을 말로만 들었고, 영어 토익 점수만 높았지 정작 외국인과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해본 우리는 개인의 인권과 개성과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기만 했지, 정작 세상은 돈이 인간보다 중요하다는 사회의 뼈 아픈 메시지에 순응하며 인문학의 멸망 속에서 ‘철밥통 공무원’이 되도록 강요받았다. 여자는 가정, 남자는 기술이라는 학교 커리큘럼에 의해 전통적 성역할에 길들여져 제대로 된 성교육, 성평등 교육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이 맨몸으로 사회로 내던져진 우리는 기성세대의 아집과 권력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들의 편에 선다고 성공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지만, 실패로 이어질 게 뻔한 반항과 일탈은 스스로 그만두었다.      


그러다 30대가 되니, 사회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가스라이팅을 하더니 새로운 <90년대 생이 온다>며 결국 쓸모없어진 우리를 <82년생 김지영>으로 만들어 어두운 뒷방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우리는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급변하는 시대 가치에 흔들리며 갈 곳을 잃은 세대가 되었다. ‘MZ세대’에 은근히 끼었다가 ‘너무 늙었다’고 밀려나고, ‘X세대’에도 끼었다가 ‘아직 철이 안 들었다’며 쫓겨난다. 아, 우리 ‘M세대’는 정말 짠하다.                         









우리는 가장 존재감 없고 위험한 세대


우리 세대는 전통과 변화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며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에 일렁이는 자괴감과 끝도 없이 싸우면서도 한편으론 기득권의 눈치를 잘 보고 순응한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의 사회적 피해의식을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 화풀이하게 될까 조바심이 생긴다.    

  

‘M세대’는 우리의 다음인 ‘Z세대’에게 ‘라떼’를 들먹이며 우리가 그토록 혼란스러워했던 반쪽자리 전통적 사고방식을 무기처럼 둔갑시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든지 “요즘 애들은 이기적이다”라며 권리와 공정에 예민한 그들을 조롱한다. 사회의 모든 권력과 시스템의 변화 능력을 쥐고 놓지 않는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겁박하는 방법의 기본이다. 자신들이 낳아 키워놓곤 마치 어디에도 초대받지 못한 외계인 대하듯 그들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세대인지 저주를 퍼붓고, 경제적으로나마 도움이 될 때만 ‘MZ, MZ’하며 어르고 달래는 치사하고 비열한 태도이다. 우리 역시 사회로부터 그런 취급을 당해놓고는 다음 세대에 또 되풀이할 일이 아니다.      


‘Z세대’의 유일한 공격 수단은 ‘꼰대’론뿐이다. 기성세대에 길들여져 자신의 알을 깨치고 나오지 못하고 그들의 모순과 고집을 그대로 답습해 가고 있는 우리에게 ‘Z세대’는 벌써부터 ‘젊은 꼰대’라는 별명을 붙였다. ‘회사는 가족’, ‘회사는 평생직장’이라는 사회적 가치가 강했던 시대에 십 대를 보내고, 그 가치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변화되는 시대에 ‘받아주기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마음으로 청년실업에 허덕이며 직장을 찾던 이십 대를 보낸 우리는 ‘돈을 덜 받더라도 주 4일만 일할 수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Z세대’에겐 벽이 느껴지는 꼰대인 것이다.    




                

과연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의 출발점에 설 수나 있을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기성세대(旣成世代)는 ‘현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나이가 든 세대’라고 정의되어 있다. 나이가 들어 사회에서 안정적 지위를 확보한 세대로 40대에서 60대 후반을 말한다. 나는 과연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의 출발점에 설 수나 있을까, 의심이 앞선다. 


여전히 거대한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는 부모 세대는 신세대에 들이대는 편견과 잣대로 그들의 고집과 신념을 더 강하게 붙든다. 그러면서도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뤘다는 긍지로 도덕적 우위를 내세우면서도 갖가지 투기와 부정부패, 로비로 이룬 모든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끊임없는 욕망을 실현한다. 이 나라 경제를 이만큼 끌어올렸다는 자만심으로 자신들보다 가난한 다음 세대를 만들어 놓고는 여전히 돈을 좇는다. 


시스템은 게으르고 교활해서 사회의 본질적 문제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기득권의 권력이 침범당할까 골몰하며 전전긍긍한다. 반성이나 후회, 죄책감을 가지면 자신들의 젊은 날이 모두 부정당하기라도 할 것처럼 사회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책임은 절대 지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결국 권력은 더 강한 자를 찾아 옮겨가기 마련이다. 이젠 ‘알파세대’가 온다. 2010년도 이후에 태어난, 바로 우리, ‘M세대’의 자녀들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손에 들고 태어나 SNS로 지구 반대편 친구와 소통하는 세대다.      


우리는 민주화를 이루고 열심히 일해 경제 시스템을 부흥시킨,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한 권력을 쥔 부모 세대에 복종해야 했던, 가장 존재감 없고 인정받지 못한 ‘M세대’이다. 나는 행여라도 우리가 낳은 아이들을 통해 우리 세대의 인정받지 못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그릇된 욕망이 고개를 들까 걱정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 맹목적으로 강요당하던 무한경쟁에서 아이들로 플레이어만 교체해 여전히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우리 세대의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을 드러내게 되지 않을까, 노파심이 난다.  

                   

내가 ‘82년생 김지영’에 이름을 빼앗긴, 익명의 세대 중 하나로 살기 싫다며 시스템을 떠나겠다고 선언하던 날, 아빠는 내게 기성세대로서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졸업 후 회사를 골라 갈 수 있었던 아빠의 시대, 우리를 위해 좀 더 나은 사회와 시스템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은 사유와 고민 없이 그저 돈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고, 다들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하며 살았다고, 그래서 이런 사회를 만들었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한심스러운 세대로 치부되어 자기혐오와 자격지심, 피해의식에서 허우적거릴 때 사회의 어른으로부터 받은 공식적인 최초의 사과였다. 악마화되고 익명화된 기성세대에서 아빠라는 개인을 뜯어내 바라보니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던 세대 갈등에서 어쩌면 벗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은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졌다. 

      

아빠의 사과 이후, 나는 기성세대에 대한 힐난을 거두는 대신 곧 기성세대가 될 나의 어른으로서의 모습을 더 가꾸기로 했다. 나는 좀 더 나은 어른으로 성장해야 한다. 좀 더 나은 기성세대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젊고 새로운 세대였을 때, 우리는 참 외로웠다. 누군가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의 젊고 새로운 세대들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짓밟는 대신 존중하고 인정하며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이기고 짓밟으려만 하지 말고, 이제 그들이 이기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해 가보지 못했던 길을 그들이 갈 수 있도록 축복하고 도와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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