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첫 직장, 첫 회식, 나는 관광 나이트 커다란 룸에서 탬버린을 치며 코요태 노래를 밤새도록 불렀다.
“난 코요태 노래 좋아하는데…”
부장의 그 한마디보다 더 절망적인 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노래방 책을 펼쳐 코요태 노래란 노래는 모조리 기계에 입력한 뒤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앞으로 내보내고 마이크를 쥐여준 과장과 대리였다. 함께 입사한 남자 동기는 어떻게든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내내 시선을 피하다 부장의 잔이 비워진다 싶으면 재빨리 허리를 숙이고 연신 술을 부었다.
새벽 5시 나이트 영업이 끝나고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3시간 후면 출근이었다. 만취한 과장이 비틀거리며 나에게 다가와 히죽 웃고는, 찜질방에서 씻고 오라며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줬다. 나는 찜질방 마루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동기와 대리와 과장은 ‘먹고 살려고’ ‘처자식이 있어서’라는 말로 끊임없이 스스로 주문을 걸며 부장 자리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릴 것이다. 자신들도 언젠가 부장이 되면 또 다른 대리와 과장이 자신을 알아서 대접할 거라는 공교한 믿음으로, 그들만의 조직과 시스템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나처럼 밤새 춤추고 노래하는 여사원 하나쯤의 인격과 자존감 따위는 가볍게 방관하고 묵인할 것이다.
올이 나간 스타킹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고는 퉁퉁 부은 발이 들어가지 않는 하이힐을 반으로 구겨 신고 회사를 향해 걸었다. 채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선 모락모락 김이 나고, 맨다리엔 닭살이 돋았다.
‘이런 걸 잘 견디고 버텨야 성공이란 걸 하게 될까? 그럼 나는 행복해질까?’
그렇게 한겨울 테헤란로를 걷고 또 걷다가 결국, 나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회에 대한 불신은 물론 그 안에서 언젠가 그들과 똑같아질 내 모습이 두려워 도망친 거다.
20여 년 전 그때는 ‘직장 내 괴롭힘’ ‘직장 내 갑질’ ‘성평등’ ‘페미니즘’이라는 말 자체가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 나이 ‘ㅂ’ 들어가기 시작하면 (스물일곱부터) 끝이다”라는 말을 아무가 아무에게나 공공연히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다들 맞장구치며 키득거렸다. 누구 하나 나서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대에 간 또래 남자 친구들 대부분 졸병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선임으로부터 구타나 괴롭힘을 당했고, 휴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난폭해지며 자신도 선임이 되면 똑같이 할 거라고 이를 갈았다. 나와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가며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사회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노출됐다. “내가 당한 만큼 갚아준다” “꼬우면 돈을 벌던가, 별을 달던가” 하는 식의 사회 집단 시스템 매뉴얼은 일제 강점기와 오랜 군사독재를 겪은 한국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생존 수칙이었다. 다들 어떻게든 얼른 위로 올라가 자신이 받았던 만큼 누군가에게 되돌려준다, 벼르고 벼르며 벌을 받고 있었다.
저 살자고 다른 이를 물어뜯는 괴물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 이웃이고, 선배고, 후배고, 친구였다. 인디문화를 다루는 소규모 잡지 에디터로 일 할 때 십만 원도 안 되는 인디밴드 공연비를 빼돌린 기획사 문제가 터졌다.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이를 공론화하려 했지만, 당시 인디 음악계 관계자들은 모두 침묵했다. 알고 보니 한 기획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사기를 당한 뮤지션들은 돈을 돌려받거나 그들이 처벌받을 거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밀레니엄 세대’라 칭송받으며 새천년 21세기에 대학생이 된 우리들은 무기력하고 말 잘 듣는 ‘88만 원 세대’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세상의 쓴맛을 보고 바꾸려 하면 할수록 기성세대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준 시스템을 보호하려 윽박지르고 으름장을 놓았다.
소규모 영세 독립 잡지에서 일하며 보고 경험한,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등쳐먹는 찌질함에 한계를 느낀 나는 대형 상업 패션지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강남에 밀집한 대형 패션지들의 시스템은 한 달에 2~30만 원 정도 쥐여주며 말 그대로 노예처럼 부려 먹는 ‘어시’라는 게 있었다. 비정규직, 계약직이라고 부를만한 서류도 없었고, 당장 내일이라도 사라질 수 있는, 혹은 대체될 수 있는 자리였다. 회사가 이들에게 흔든 당근은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너도 정식 기자가 될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 고문이었다.
대부분 친구들이 생활고로 6개월을 못 버텼고, 그나마 집이 좀 사는 친구들이 1~2년을 수입 없이 버티다 운이 좋으면 기자가 되었다. 그때 한 패션지 어시스턴트로 일하던 친구가 익명 게시판에 올린 글로 ‘열정페이’ 문제가 터졌다. 그러자 모든 잡지계는 두고 있던 어시스턴트를 모두 그만 나오게 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묵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친구들은 오히려 그 문제를 폭로한 친구를 원망했다.
잡지사와 연결된 패션, 홍보, 스튜디오, 헤어‧메이크업, 연예기획사 등 곳곳이 암덩이로 가득했다. 당시 연예인과 화보 작업을 많이 해 이름이 꽤 알려진 포토그래퍼들의 ‘어시’들이 성추행과 성희롱, 갑질 문제에 시달리다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도움을 청했지만 결국 공론화되지 못했다. 동종 업계에서 누군가의 허물이 들춰지면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패거리 의식 때문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결국 현장에서 쫓겨나고 업계에서 퇴출당한 건 피해자, 그리고 문제를 제기한 내부고발자들이다. 가해자들과 동조인, 침묵을 지킨 이들은 여전히 잘 먹고 잘살고 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 사회생활을 하며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말하는 선배나 관리자를 만나지 못했다. 조직을 위해 작은 일에도 침묵했던 사람들은 더 큰 사회적 참사와 공공을 위한 정의, 진실에도 점점 더 쉽게 침묵하게 됐다. 동료들은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거라고 했다. 좋은 게 다 좋은 거라고도 했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 사회가 내 생각과 감각을 마비시키고 길들이려 하면 할수록 나는 소심하게, 동시에 극심하게 저항했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첫 직장을 그만두던 날, 테헤란로에서 스스로 물었던 질문은 아웃사이더로 가득한 홍대 거리를 지나 나르시시스트로 가득한 강남 신사동을 거쳐 지구 반대편 멀고 작은 외딴섬까지 하루하루 이어져 지금 내 삶을 만들었다.
12.3 내란의 우두머리 윤석열이 삼류 조폭 드라마라도 찍는 듯 사람 진을 다 빼놓으며 체포를 완강히 거부했을 때 야당 국회의원과 언론, 공수처는 경호처 내부로부터 전달받은 제보를 폭로하며 심리전을 펼쳤다. 그중 하나가 대통령실 경호처 60주년 기념식을 날짜가 엇비슷한 윤석열의 생일 파티로 둔갑시켜 여경과 여군까지 동원해 기쁨조처럼 윤석열 찬양 노래를 부르게 하고 팁으로 30만 원을 쥐어줬다는 내용이었다. 그 모든 걸 기획했다는 경호처 차장 김성훈은 국회에 나와 “모두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했다”라고 되레 화를 냈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대한민국은 여전하구나, 나는 맥이 풀리고 불쾌했다.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김성훈 대통령경호처 차장 ⓒ 뉴시스
윤석열과 김건희의 작은 고갯짓에 김성훈 차장은 자신의 충성심을 빛나게 할 수단으로 젊은이들을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불러 모았을 것이다. 관광나이트에서 발이 퉁퉁 붓도록 밤새 탬버린을 치고 노래했던 내 스물셋이 떠올랐다. “나 코요태 좋아하는데”하는 부장의 한마디에 사회 시스템의 매뉴얼을 고스란히 따른 그날의 과장과 대리가 지금 딱 김성훈 차장 꼴이었지만, 그건 20년 전이다. 지금은 ‘직장 내 괴롭힘’ ‘성추행’ 등 사회적 개념과 용어도 확실하고 관련 처벌법까지 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당사자가 느낀 자괴감과 자존감 저하, 사회와 조직에 대한 불신은 어떻게도 제대로 보상되지 않는다.
그래도 경호처엔 희망이 있다. 내란우두머리 윤석열 2차 체포 집행에 지휘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공수처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내부고발자를 색출하려는 김성훈 차장에게 반발하며 “지휘부로서 이 모든 혼란을 일으킨 것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 요구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책임’의 의미를 알 리 없는 김성훈 차장이 이를 거부하자 경호처 본부장급 간부들은 단체로 사표를 냈다.
채 해병 특검법 입법 청문회에서 증인 선서 중인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증인 선서를 거부한 임성근과 이종섭. 2024년 6월 21일 ⓒ 뉴시스
재작년 7월, 실종자 수색 작전에 구명조끼 하나 없이 투입돼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채 해병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군과 대통령실 모두 현장 지휘관 하나 희생시키고 덮으려던 진실을 수면 위로 드러낸 건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과 그의 수사관들이었다. 대통령이 격노하며 지키려 했다는 임성근 전 사단장은 책임을 면했고,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은 모든 책임을 박정훈 대령에게 미뤘다. 대통령실은 전 국방부장관 이종섭을 주호주대사로 보냈고, 채 해병 사망 사건에 관련 있는 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은 ‘항명 수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기소됐다.
최근 박정훈 대령이 군사법원이 그의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지만, 여전히 국방부는 그의 직무 복귀를 미루고, 군검찰은 항소를 제기했다. 임성근 전 사단장은 연수원에서 편하게 자신의 재판 변론서를 쓰고 여론전을 펼치고 있는데 박정훈 대령은 1년 반째 보직도 없이 아침에 출근해 벽을 마주한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퇴근한다. 그 사이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은 임기를 다 채우고 전역했고, 임성근 역시 멀쩡하게 곧 전역할 예정이다. ‘런종섭’은 박정훈 대령의 무죄 판결에 “항명죄를 다시 배우라”며 재판부에 큰소리치고, 채 해병 사망 사건과 관련된 모든 여당 의원과 군, 대통령실, 윤석열과 김건희는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채 해병 특검법은 윤석열의 거부권과 여당의 반대로 지금까지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무죄를 선고받은 박정훈 대령, 그리고 '투쟁'을 의미하는 붉은 장미 ⓒ 뉴시스
“젊은 해병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며 수사단장이 본인의 의무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박정훈 대령이 1년 반째 겪고 있는 고초는 말 그대로 집단의 시스템에 대항한 ‘괘씸죄’다. ‘괘씸죄’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의와 진실을 넘어선다.
박정훈 대령의 선택은 군 조직과 권력자의 부조리를 드러냈지만 동시에 그를 끝이 없는 고난의 길로 이끌었다. 우리는 그의 용기와 희생에 박수와 환호를 보내면서도 정작 ‘나였다면?’이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박정훈 대령이 없었다면 채 해병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하다가도 이렇게 단 한 사람의 용기와 희생이 없어 억울함도 알리지 못하고 가려지고 숨겨진 이들이 이 사회엔 얼마나 많을지 두렵고 아득하다.
국회에 출석한 홍장원 전 국정원 제1차장과 조태용 국정원장 ⓒ 뉴시스
얼마 전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 규명 국정 조사 특별 위원회 제1차 청문회’에서 전 국정원 제1차장 홍장원이 증언대에 섰다. 그는 계엄 당일 윤석열에게 직접 전화로 정치인 체포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12.3 내란이 벌어진 직후 가장 먼저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폭로한 홍장원 차장 이후로 여기저기서 윤석열의 내란 관련 직접 지시를 밝히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는 폭로 이후 미심쩍은 사유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마치 짠 듯 이어지는 보수 시민단체의 고발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 이 모든 상황에는 물론 내란죄 혐의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악하는 대통령실과 비겁한 조태용 국정원장이 관련돼 있다.
“저 대통령 좋아했습니다. 시키는 거 다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명단(한동훈, 이재명, 우원식, 법관, 재야 인사를 포함한 14인의 체포 명단)을 보니까, 그거는 안 되겠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위원장님 집에 가셔서 편안하게 가족들과 저녁 식사하고 TV 보는데
방첩사 수사관과 국정원 조사관이 뛰어들어서 수갑 채워서 벙커에 갖다 넣었다, 대한민국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게 매일 매일 일어나는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어디? 평양!
그런 일을 매일 매일 하는 기관이 어디? 북한 보위부. 이상입니다.”
2025년 1월 22일 수요일, 전 국가정보원 제1차장 홍장원이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 규명 국정 조사 특별 위원회 제1차 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모든 건 다 김용현(전 국방부장관) 탓이다!”라고 말하는 윤석열과 “모든 건 다 부하들(사령관들) 탓이다!”라고 말하는 김용현과 심지어 “유리창 몇 장 깬 건 내란죄가 아니다”라는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의 비열한 말들을 들으며 가슴에 피멍이 들던 와중에 홍장원이 막힘없이 뱉어낸 문장들은 신선하고 개운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소수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가
여전히 윤석열은 계엄을 합법적인 통치 행위라 주장하고, 그를 옹호하는 집권 여당 국민의힘은 사이비 기독교 세력과 친일 극우, 정치 깡패까지 동원해 미쳐 날뛰며 내란을 선동한다. 이 혼란과 어둠 속에서 나는 윤석열이 오늘은 탄핵될까, 오늘은 체포될까, 오늘은 구속될까, 혹시 석방이라도 되면 어쩌나, 늘 불안과 실랑이한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퀘스트를 통과 못 하면 곧바로 낭떨어지로 사라지는 게임 속 슈퍼마리오가 된 기분이다. 대한민국 사회와 집단에 대한 나의 불신이 여전히 깊고 깊기 때문이다.
히틀러와 나치 부역자들만으론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할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핍박받은 건 일제 순사와 군대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가자 지구의 수많은 팔레스타인 학살은 이스라엘 국민과 미국, 유럽 기득권 세력의 묵인, 또는 적극적인 협조로 이뤄졌다.
나는 앞장서 ‘처단’과 ‘파괴’를 외치는 윤석열보다 김성훈 차장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저지르는지조차 모르고 저지르는 ‘악의 평범성(한나 아렌트)’이 가장 두렵다. 자신의 도덕적 책임과 생각의 필요성을 외면하고 체제에 순응함으로써 무감각하게 악행에 가담하는, 보통의 얼굴을 가진 가장 보통의 사람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다.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스스로 감각을 거세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언제까지 우리는 한 사람의 정의와 용기, 선의, 그리고 희생을 기대해야 하는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깃발을 드는 자, 또는 호루라기를 부는 자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핍박받고, 사회로부터 고립되며, 그로 인해 생계의 위협을 받는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러한 인식은 사람들이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기보다는 권력층의 불의를 방관케 만든다.
정의로운 행동이 잠시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잊히는 사회 분위기에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법적 장치는 한없이 미약하고, 그에 따른 보복이나 불이익을 막아주지 못한다. 정의로운 사람들에 합법적인 지원과 보상하는 시스템과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언론과 시민사회는 정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들에게 법적, 심리적, 사회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깃발을 들고 앞서서 나갈 수 없다면 따르는 사람이라도 되리라
12.3 내란·반란 이후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왜 아직도 우두머리가 저리도 뻣뻣이 고개를 들고 잘 세팅된 헤어스타일에 빳빳한 양복을 입고 빨간 넥타이까지 매고 키득거리고 있나, 피가 거꾸로 솟는다. 지난 두 달 동안 국민의힘의 방해로 첫 번째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 실패하고, 내란우두머리를 배출한 집권당의 대표 한동훈이 내란을 일으킨 정부의 총리인 한덕수와 손을 잡고 위헌적인 연정을 선언하질 않나, 검찰과 경찰, 공수처가 수사권을 놓고 티격태격하는 동안 대통령이란 작자는 관저를 요새화해 인간 방패를 두르고 못 가겠다 생떼를 쓰지 않나, 그 새를 틈타 시간을 벌어 세를 모은 사이비 기독교 세력과 친일 극우 세력이 국민의힘에 합세하더니 끝내 서부지법 폭동까지 일으켰다. 가까스로 체포된 윤석열은 삼류, 사류나 간다고 무시했던 공수처의 조사를 모두 거부하고 여전히 시건방을 떨고 있으며, 검찰은 공수처가 수사를 끝냈으니 잔말 말고 기소나 하라는 법원의 판결에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안경을 고쳐 쓰고 넥타이를 가다듬고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검사 카르텔의 이익만을 따진다.
결국 12.3 내란을 일으킨 후 54일 만에 구속기소 된 윤석열을 보며 멀리 떨어져 본 역사는 사진 한 장, 영화 한 편으로 딱 떨어지지만, 역사 속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지금, 진실은 가까스로 드러나며 정의는 겨우겨우 승리한다는 것을, 여전히 세상엔 밝혀지지 않은 진실과 실현되지 않은 정의가 더 많다는 것을 또다시 배운다.
지금보다 더 나쁘거나 심지어 나라마저 빼앗겼던 사람들의 정의와 진실에 대한 확신과 인내에 비하면 내가 지금껏 떠든 한국 사회의 불신은 모두 핑계다. 백범 김구 선생이 말했다. “독립운동하는 나보다 나를 밤새도록 고문하는 일본 경찰이 더 성실했다”라고. 악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죽기 살기로 부지런하다. 선도 악을 이기려면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
광주 사람들은 45년째 기다리고, 독립 열사들은 80년째 기다리며, 제주 사람들은 77년째 여전히 기다리는 진실과 정의가 있다. 여전히 광주와 제주,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곳곳엔 이름을 찾지 못한 영혼들이 진실을 기다린다는 것, 그리고 친일과 군사독재, 내란/반란의 부역자의 이름을 지우고 사는 이들에게 정의가 실현되길 기다린다는 걸 나는 온 감각으로 경험한다. 그 진실과 정의를 가져오는 건 바로 나, 그리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변화는 언제나 단 한 사람의 용기로부터 시작된다. 앞선 자들의 고귀한 용기를 작은 눈덩이처럼 굴려 크게 만들며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 정의감을 붙들어야 한다. 그 안에서 나는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되어갈지,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시민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 나갈지 온 감각을 살려 고민하고 생각한다. 깃발을 들고 앞서서 나갈 수 없다면 따르는 사람이라도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