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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천박함이 예술의 용기를 만날 때

정치가 지우려는 것, 예술이 기억하는 것.

by 조하나


시대의 얼굴은 때로 기이하고 때로 비루하다. 본디 정치는 공동체의 영혼을 보듬고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하는 거름과 같아야 할진대, 인간 정신의 가장 고귀한 발현 중 하나인 문화 예술을 북돋우고 보호하며 공동체의 영혼을 풍요롭게 가꿔야 할 책임이 있다.

최근 우리 사회를 스쳐간 몇몇 장면들은 정치권력이 그 본연의 책임을 망각하고 문화 예술을 어떻게 대상화하고 왜곡하는지, 그리고 이에 맞서 진정한 예술가와 시민들이 어떤 용기를 발휘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알베르 카뮈라면 이 현실을 응시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부조리는 멀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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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렸던 콜드플레이 관련 게시물은 그 단적인 예다. 최근 콜드플레이의 내한 공연 중 보컬 크리스 마틴이 이렇게 농을 쳤다. “우리가 내한할 때마다 대한민국에 대통령이 파면되고 없다. 우리 밴드의 드러머를 한국의 다음 대통령으로 추천한다.” 그런데 이 영상을 국민의힘 대통령 경선 후보였던 나 의원 측이 무단으로 가져다 사용했다. 더욱이 영상 자막과 설명을 임의로 수정하고 편집하여 마치 콜드플레이가 자신을 지지하는 듯한 인상을 주려 했다는 점에서 이는 대중을 기만하려 시도한 행위로 비판받는다. 상대 당 후보를 향한 혐오를 부추기려 직접 ‘드럼통’에 들어가 사진을 찍은 나 의원 선거 캠프 측이 콜드플레이의 프런트맨 크리스 마틴이 언급한 ‘드러머’라는 단어에서 연관성을 찾은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뿌듯해했을 나 의원 캠프의 젊은 홍보 스태프들에게 인간적인 참담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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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플레이는 환경 문제, 성소수자 인권, 가자 지구 문제 등 진보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아주 오랫동안 꾸준히, 공개적으로 내왔다. ‘지구에서 가장 성공한 밴드’의 거대한 영향력을 사랑과 존중, 희망으로 온 세상을 아름다운 무지갯빛으로 물들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경원 의원은 그런 영향력과 거리가 멀다. 아니, 정 반대의 지점에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헌법 가치와 국가 체제를 수호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애국 보수 우파’라 자신을 칭하면서도, 실상은 손익 계산에 의한 끝도 없는 극우 노선으로 분명히 갈아타며 끊임없는 혐오와 폭력, 배제, 차별의 메시지로 지지층을 선동한다. ‘공공선’을 추구하며 사회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치인의 사명이자 본질인데 나경원 의원은 오히려 그 자리와 힘을 이용해 사회 갈등과 혐오를 부추겨 사익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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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콜드플레이 팬들은 모두 뒷목을 잡았다. 콜드플레이의 음악적, 사회적 가치관과는 상반되는 정치적 이미지를 무단으로 차용한 나 의원 측에 법적 책임까지 묻겠다는 사람들도 다수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저작권 침해나 캠프의 실수를 넘어선다. 그것은 특정 정치 세력이 문화 예술을 어떻게 인식하고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유명인의 인기를 천박하게 이용하려 들면서도, 그 예술가가 가진 메시지, 철학, 그리고 사회적 가치관은 철저히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이중적인 태도. 예술을 단순히 인기나 이미지를 소비하는 대상으로 보며, 그 안에 담긴 인간적인 고뇌, 시대정신, 아름다움을 향한 순수한 열정 등 예술의 본질은 외면하는 시선이다. 예술을 사유하는 주체가 아닌, 그저 ‘끌어다 쓸 수 있는’ 도구나 홍보 수단으로 여기는 천박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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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득권의 문화 예술의 도구화 시도는 과거부터 반복되어 온 역사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자행된 ‘문화 예술인 블랙리스트’는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예술가들을 조직적으로 배제하고 탄압했던 야만적인 행위였다. 이는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예술의 독립성을 짓밟은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윤석열 정부 들어선, 김건희 자신이 문화 예술계 사업가 출신임을 내세우며 특정 예술가들과의 관계를 과시하고, 이 과정에서 사적인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문화 예술계를 활용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논란이 일고 있다.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가는 지우려 하고, 필요할 때는 그들의 명성만을 착취하려 드는 이 일관된 패턴은 특정 정치 세력이 문화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즉 ‘자유로운 정신의 표현’이 아닌 ‘통제 가능한 수단’으로 여기는 근본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이토록 억압적이고 위선적인 환경 속에서 대중의 시선 한가운데 서 있는 예술가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가수 이승환은 바로 그 용기의 최전선에 서 있는 몇 안 되는 이 시대의 예술가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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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내란 이후, 이승환 35주년 전국 투어 공연을 앞두고 이승환 측은 구미시 측으로부터 ‘정치적 발언이나 돌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 작성을 요구받았다. 이승환은 이를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보고, 예술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양심과 독립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해당 요구가 위헌임을 확인하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후, 헌법재판소는 해당 사안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렸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이미 공연이 종료되어 문제 상황이 해소되었으므로 심판의 이익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이는 이승환 측이 ‘미래의 동일한 피해를 막기 위해’ 헌법소원을 제기했음을 고려할 때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승환의 행동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대중 예술가들은 이른바 ‘좌파 연예인’이라는 낙인과 함께 가혹한 시련을 겪는다. 이 ‘좌파’라는 낙인은 한국전쟁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어두운 유산 속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비판 세력을 입막음하기 위해 권력자들이 휘둘러 온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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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개혁 요구마저 ‘체제 전복 시도’로 몰아세웠던 이 언어의 폭력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진영 논리에 기반한 무분별한 비난과 배제의 근거로 작동한다. ‘좌파 연예인’은 진보 정부가 들어서면 ‘코드 인사’라며 특혜 의혹에 시달리고, 보수 정부 시기에는 노골적인 불이익과 검열의 대상이 된다. 양쪽 모두에게 온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정치적 노이지(Noise)’로 취급당한다.


여기에는 ‘딴따라 주제에 무슨 정치적 의사 표현이냐?’는 식의 한국 사회의 예술 비하적 인식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으며, ‘입틀막’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사회 분위기 또한 한몫한다. 개인의 사유와 표현을 불편해하고, 침묵하고 순응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용기 있는 목소리가 설 자리를 잃는다. 더 나아가, 누군가 ‘정의’나 ‘공공선’을 이야기할 때 ‘너는 얼마나 잘나고 깨끗하냐’고 되묻거나 인신공격하며 비난을 회피하려는 비뚤어진 ‘화자 비하’ 심리까지 더해져 목소리를 내려는 이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경제적, 심지어 가족에 대한 위협까지 가해진다. ‘잃을 것이 많은’ 유명인일수록 침묵이 생존에 유리한 이 구조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걸고 불의에 “아니요”라고 외치는 이승환의 용기는 그래서 더욱 귀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이승환과 같은 예술가들의 용기가 더욱 빛을 발한다. 구미시의 부당한 서약서 요구에 헌법소원으로 맞선 그의 싸움은 단지 계약 관계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예술이 예술이기 위해,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지켜야 할 근원적인 자유를 위한 저항이자 투쟁이다. 그는 무대에 서는 용기, 부당함에 맞서는 용기,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비난의 폭풍과 고독, 그리고 자신의 정신을 깎아내는 고통까지 기꺼이 감수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여도, 불의한 세상에 홀로 맞서는 이의 내면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상처 입는다. 그의 용기는 단순한 정치적 행동을 넘어선 예술가의 양심이자 한 인간의 절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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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인간성을 외면하고 공동체의 영혼을 병들게 할 때, 문화 예술은 그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이승환처럼 용기 있는 예술가들이 단순한 정치적 구호를 넘어 인간 본연의 존엄과 자유를 향한 외침을 낼 때, 그것은 민주주의의 퇴보를 막는 행위가 된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국가 폭력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 정신의 존엄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깊은 곳에 자리한 공감과 연대의 씨앗을 일깨웠듯 문화 예술은 계산되지 않은 순수한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열망을 자극하며 세상을 향한 공감 능력과 비판 의식을 기르고 연대의 힘을 믿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콜드플레이의 음악이 국경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듯 예술은 때로 정치보다 더 강력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고 사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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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의 헌법 소원이 헌법재판소로부터 ‘심판의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 결정을 받았을지라도, ‘미래에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려 했던 그의 싸움의 의미는 희미해지지 않는다. 그는 눈앞의 이익이나 과거의 심판을 넘어 미래 세대의 자유로운 목소리를 위해 씨앗을 뿌린 것이다. 그가 뿌린 씨앗은 단순히 법적 다툼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자유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깊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미래’를 외치기만 하면서도 ‘공공선’은 손톱만큼도 기여하지 못하는 기득권 정치인들보다 훨씬 진정성 있고 강력한 힘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가들의 용기는 그들을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 연대하는 팬들과 시민의 힘으로 이어져 사회를 아주 조금씩, 느리지만 단단하게 변화시킨다.

하지만 이 싸움은 여전히 외롭고 고독하다. 이승환이라는 이름은 그 용기와 함께, 그 용기 때문에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를 상징한다. 시스템적인 압력과 사회적 비난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싸우며 정신을 갈아 넣는 지난한 과정일 터다.


문득, 신해철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의 날카로운 지성과 거침없는 언변,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에 용감했던 뜨거운 심장을 가진 예술가가 지금 우리 곁에 있었다면. 이승환이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갈 때, 그의 옆에서 그와 함께 시대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기득권의 위선을 조롱하며, 예술가의 자유를 옹호해 주는 정신적인 연대의 힘이 되어주었다면.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을까. 그의 부재는 단지 한 명의 뛰어난 뮤지션을 잃었다는 슬픔을 넘어 이 시대를 함께 진실을 외치고 고독을 나눌 든든한 동지를 잃은 아픔, 그 이상이다.


대한민국 정치와 문화 예술의 불화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권력의 유혹과 억압은 끈질길 것이다. 하지만 이승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인간 정신의 자유와 예술의 독립성을 위해 싸우는 예술가들, 그리고 그들의 용기에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공감과 연대의 힘으로 응답하며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함께 서는 시민들이 있는 한, 진실과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 열망과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신해철과 같은 수많은 목소리들은 뜨거운 정신과 사유로 남아 현재의 싸움에 힘을 보탤 것이다. 우리의 불편한 현실과 이승환의 외로운 용기, 그리고 부조리 속에서도 기어이 피어나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나는 기록한다. 그리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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