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저당 잡힌 ‘현재’를 사는 대한민국 청년
청년(靑年). ‘푸를 청’에 ‘해 년’.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청년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한 젊음,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들이 품은 ‘미래’라는 무궁무진한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역설적이게도 청년들에게서 바로 그 미래를 향유할 ‘현재’를 박탈하고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청년의 미래’를 인질로 삼아 오늘 이 순간의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는 듯하다.
이러한 현실 뒤에는 종종 단기적인 이익과 권력 유지에 급급한 정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특히 한국 정치 지형에서 일부 정치인들은 분노와 갈등, 혐오를 의도적으로 증폭시킨다. 이는 대중의 시선을 첨예한 현재의 갈등에 묶어둠으로써, 저출산, 고령화, 인구소멸, 성평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 문제, 사회의 미래 근간을 뒤흔드는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위기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에 눈을 뜨는 청년들이 많아질수록, 자신들이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청년들을 공포와 불안, 두려움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희망찬 미래와 빛을 향한 그들의 시선을 가리려 한다.
미래를 외면하는 뇌의 생존 본능
사실, 이러한 정치적 단기주의와 대중 조작이 효과를 발휘하는 데에는 우리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심리적, 인지적 편향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치인이나 시스템의 문제 이전에, 우리 뇌 자체가 구조적으로 먼 미래의 불확실한 큰 보상보다는 당장의 작지만 확실한 만족을 선호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행동경제학에서는 ‘현재 편향(Present Bias)’이라고 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당장 눈앞의 생존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유리했을 수 있다. 이 편향 때문에 우리는 종종 미래 세대에게 돌아갈 막대한 환경적, 사회적 이익보다는 당장의 세금 감면이나 눈앞의 개발 이익과 같은 즉각적인 유혹에 더 쉽게 흔들린다.
더욱이 우리는 미래의 가치를 평가할 때 ‘쌍곡형 할인(Hyperbolic Discounting)’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 가치를 급격히 떨어뜨린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10만 원을 받는 것과 내일 10만 5천 원을 받는 것 사이의 차이는 매우 크게 느껴지지만, 1년 뒤 10만 원을 받는 것과 1년 하고도 하루 뒤 10만 5천 원을 받는 것 사이의 차이는 거의 미미하게 느껴지는 식이다. 시간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미래 가치의 하락 폭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이 경향성은, 기후 변화 대응이나 연금 개혁처럼 수십 년 뒤에야 결과가 나타나는 장기 정책의 현재 가치를 실제보다 훨씬 낮게 인식하게 만든다.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이러한 인지적 약점을 파고들어, 미래를 위한 고통 분담이나 투자를 ‘비현실적인 부담’으로 포장한다.
여기에 ‘공포와 불안의 심리’가 더해지면 미래지향적 사고는 더욱 마비된다. 정치인들이 의도적으로 경제 위기, 안보 위협, 사회적 갈등 등 끊임없이 위기감을 조장하고 공포를 자극할 때, 우리의 뇌는 생존 본능을 우선시하게 된다. 편도체가 활성화되면서 이성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담당하는 전전두피질의 기능은 억제되고, 시야는 당장의 위협에만 고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 상태에서는 복잡하고 장기적인 문제에 대한 합리적 토론이나 창의적인 해결책 모색이 어려워지며, 사람들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자에게 의존하거나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결국, 정치인들은 대중을 불안과 공포 속에 가두어 둠으로써, 미래에 대한 자신들의 무능함과 철학의 부재를 감추고 현재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미래를 향한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정치 시스템 개혁과 더불어, 우리 안의 이러한 심리적 함정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 또한 절실히 요구된다.
단기주의의 덫
이념과 소속 정당을 떠나, 30년 뒤에나 가시화될지 모르는 타인의 문제, 아득히 먼 미래의 일에 집중하는 것은 모든 정치인에게 어려운 도전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임기를 회고하며 이렇게 토로했다. “정치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아주 먼 미래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이나, 아무 조처를 취하지 않은 데 대한 대가를 수십 년 뒤에나 치를 사안을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것이다.” 그 말속에는 깊은 아쉬움이 배어 있다.
장 클로드 융커 전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역시 경제 정책 결정의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정치인은 어떤 사안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결정 때문에 재선이 물 건너갈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이렇듯 당장의 정치적 생존 앞에서 미래를 위한 결단은 종종 뒤로 밀려나기 쉽다.
물론 역사 속에는 주목할 만한 미래지향적 사고의 순간들도 존재한다. 몇몇 혜안을 지닌 정치인들은 지속 가능한 헌법을 제정하고, 여성과 소수자에게 새로운 권한을 부여하며, 수십 년, 나아가 수백 년 지속될 진보적인 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들은 도시 하수 시설부터 대륙 간 철도에 이르기까지, 먼 미래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킬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미래 세대에게 오늘의 부를 상속하기 위해 국부 펀드를 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치인들은 위기를 겪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장기 계획의 필요성을 절감하곤 했다.
문제는 21세기에 들어 눈에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단기주의적 시간의 압박이 점점 더 커지고 있으며, 동시에 장기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한 채 쌓여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아직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위기의 시대, 시간의 불일치
오슬로 대학의 문화역사학자 헬게 요르드헤임과 에이나르 바이겐은 20세기 후반 ‘서구식 발전’ 담론이 기후 변화, 사회 격변, 테러리즘, 이민, 금융 위기 등 ‘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국제 질서가 위기라기보다는, 위기를 이용하여 국제 질서를 잡으려는 경우가 점점 더 늘어난다”라고 경고하며, “만약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현재의 위기를 처리하느라 내일의 위험을 외면한다면, 결국 세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라고 역설한다.
우리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는 ‘세계화’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다. 한 국가의 의사 결정 범위를 넘어서는 국제적인 흐름이 국내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오하이오나 글래스고의 공장이 중국 지도자의 결정으로 문을 닫을 수 있지만, 그 후폭풍 처리와 비난은 고스란히 현지 정치인의 몫이 된다.
동시에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시간에 쫓긴다. 21세기가 풀어야 할 중대한 과제들은 대부분 수십 년 이상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지만, 정치인이나 정부의 임기는 그 시간의 범위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공직자의 임기와 정치적 이슈의 해결 기간 사이의 이러한 차이를 ‘시간 불일치성’ 또는 ‘부정합’(사이먼 캐니)이라고 부른다. 캐니는 또한, 한 정부가 옳은 결정을 내리더라도 다음 정부가 다른 우선순위에 밀려, 혹은 정치 보복이라는 구태에 의해 그 정책을 계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시차에 의한 무정부 상태’를 지적한다. 이는 결국, 더디게 발화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예방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급발화성 문제에 행정력을 집중하게 만드는 유인이 된다.
단기주의를 증폭시키는 언론과 포퓰리즘 정치
정치 저널리즘의 보편적 특성 중 하나는 ‘논란’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안을 놓고 벌어지는 격렬한 싸움, 날을 세우는 인물들, 명확한 승자와 패자. 이러한 논란은 시각적으로도 자극적이다. TV 프로듀서는 국회에서의 몸싸움, 연단에서의 설전, 분노한 유권자의 목소리를 손쉽게 화면에 담을 수 있다.
저널리스트들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보다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 예외적이고 극적인 것을 선호하며, 평범하고 숨겨진 진실보다는 당장의 속보 경쟁에 매몰되기 쉽다. 중요한 변화가 서서히,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을지라도, 촌각을 다투는 뉴스룸의 인내심 없는 기자들이나 피곤에 지친 시민들의 즉각적인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러한 미디어 환경은 포퓰리즘의 부상과 맞물려 새로운 유형의 정치인을 등장시켰다. 이들은 자극적이고 일시적인 뉴스를 만들어냄으로써 장기 전략의 부재라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때로는 거짓된 주장으로 공론장을 오염시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미디어 조종술의 대가이다. 그는 논란을 일으키는 트윗이나 발언으로 자신에게 쏠린 부정적인 관심을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돌리곤 한다.
이는 영국의 정치 컨설턴트 린톤 크로스비가 언급한 ‘데드 캣(Dead Cat)’ 전략과 맥을 같이한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가 설명했듯, “식탁 위에 죽은 고양이를 던져놓으면, 사람들은 ‘맙소사, 식탁 위에 죽은 고양이가 있어!’라고 외칠뿐, 당신이 그 고양이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하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즉, 논점을 흐리고 대중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핵심이다.
미래로 눈을 돌린 누군가
그러나 역사는 장기적인 관점과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꾸준히 상기시켜 왔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래 세대의 세상 사용권은 이전 세대로 인해 제약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했으며, 존 스튜어트 밀은 1866년 영국 하원에서 ‘후손에 대한 의무’를 역설했다. 칼 마르크스 역시 “어떤 사회도 지구의 주인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들은 그저 지구의 일시적 관리자, 수혜자일 뿐이고 더 나은 환경의 지구를 미래 세대에 물려줘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선구적인 해양 탐험가이자 환경 운동가였던 자크 쿠스토는 말년에 미래 세대에게 망가진 지구를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강하게 피력하며, 1990년대 초 ‘미래 세대를 위한 권리장전’을 제창했다. 그의 노력은 유네스코 선언문에 포함되었고, 이는 유엔 총회의 승인을 받게 된다. 2013년 유엔은 ‘세대 간 연대와 미래 세대의 요구’ 보고서를 통해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감을 지속 가능한 개발의 핵심 개념으로 명시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미래 세대가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할 능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현세대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라는 정의는 이제 국제 사회의 보편적인 원칙이 되었다.
2021년,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의 공통된 어젠다’ 보고서에서 미래 세대에게 권리를 부여하고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에 대한 국제적 협력을 촉구했다. 그는 현세대가 미래 세대를 대신하는 ‘신탁자’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0년 전 쿠스토가 시작했던 캠페인이 유엔 사무총장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만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래를 위한 저항
영국의 철학자이자 사회 사상가인 로만 크르즈나릭은 우리 시대 민주주의 정부가 ‘미래를 식민지화’하고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하며, ‘시간 반역자(Time Rebel)’들의 새로운 운동을 촉구한다. 크르즈나릭이 말하는 ‘시간 반역자’란, 현대 사회 만연한 극도의 단기주의와 즉각적인 만족 추구 경향에 적극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저항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미래가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주인 없는 땅’처럼 취급되어 현재 세대가 마음대로 착취하는 ‘시간 식민주의’를 비판하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의 권리와 안녕까지 깊이 고려하는 책임감을 지닌다.
‘시간 반역자’는 당장의 이익이나 다음 선거 너머, 수십 년에서 수 세기에 걸친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또한, 현재 존재하지 않는 미래 세대와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공감하며 ‘좋은 조상’이 되고자 하며, 이를 위해 미래 세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과 제도적 변화를 추구하고 지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크르즈나릭은 이러한 시간 식민주의적 태도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영국이 호주를 식민지화할 때 원주민을 쫓아내며 사용했던 ‘무주지(Terra nullius)’, 즉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땅’이라는 법적 원칙을 현재 우리의 시간에 대한 태도에 빗대어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의 태도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시간’의 원칙을 악용하고 있다. 미래는 ‘빈 시간’이며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영토로,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제국이 점령한 오지의 영토처럼, 미래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우리 것이라는 태도로 살아간다.”
홈리스들의 자립을 돕는 잡지 <빅이슈> 창립자이자 영국 의회 상원의원 존 버드는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미래 세대를 위한 복지법’을 제안했다. 이 법안은 공공기관이 정책 제안 시 의무적으로 ‘미래 세대 영향 추정보고서’를 발표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특임 위원장이 이를 감독하도록 규정한다. 버드 상원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때 현재에 집착했다. 과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위기를 시작한 것은 나이다. 고장 난 시계를 계속 고치는 일이 이제는 신물이 난다. 대신 처음부터 시계가 고장 나지 않게 만들고 싶다.”
그는 노숙이나 중독과 같은 현재의 위기 해결에 막대한 자원과 시간이 투입되는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트라우마, 실패,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는 잠재적 위기를 예방하는 데는 소홀했다고 지적하며,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미래를 위한 상상력
이러한 움직임은 실제적인 제도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웨일스는 2015년 미래 세대의 복지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제 웨일스의 정책 입안가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세대 간에 미칠 영향을 의무적으로 고려하고 설명해야 한다. 초대 미래 세대 위원장인 소피 하우는 이 법이 보건, 지방 정부, 국가 기관 등 모든 공공 서비스에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비록 관할권이 제한적이지만, 기후 변화를 악화시킬 수 있는 우회도로 공사 취소, 학교 시험 개혁 등 의미 있는 성과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국회 자문단을 도입했고, 헝가리는 미래 세대를 위한 옴부즈맨 제도를 운영 중이다.
2019년 영국 총선 전에는 주요 정당 지도자들이 버드 상원의원의 ‘미래 세대 서약’에 서명하며 미래 세대의 권리 보장을 약속하고, 단기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기후 위기나 빈곤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철학자 타일러 존과 윌리엄 맥아스킬은 ‘세대 간 변화 효과’를 고려하여, 다음 정치 세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정치인의 연금 지급을 확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내놓았다. 이는 미래 세대에게 불합리한 유산을 물려준 정치인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강력한 경고이다. 정치 과학자 사이먼 캐니는 정당, 시민단체 등이 미래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미래의 날’ 지정과 ‘미래를 위한 성명서’ 발표를 제안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미래 세대를 대표하는 시민의회, 즉 ‘미래 의회’라는 숙의 민주주의 모델도 제시된다. 아일랜드, 벨기에 등에서 이미 현실 정책 결정에 활용되는 시민 의회를 기반으로, 참가자들이 미래 시민의 역할을 맡아 토론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2040년대, 도시에 사는 중년 아담’ ‘2050년대, 국방부장관’ ‘2060년대, 농사를 짓는 사만다’ 등의 가상 역할의 입장에서 현재의 정책을 평가하는 것이다.
일본 교토의 인류와 자연 연구소는 ‘미래 설계’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참가자들은 예복을 입고 미래 세대의 입장이 되어 특정 정책에 대해 찬반 토론을 벌인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2060년 교토의 물 인프라 개선을 위해 현재 세금을 더 납부하는 정책에 동의하는 시민들이 예상외로 많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경제학자 사이조 다쓰요시는 “어떤 한 사람이 현재의 이득을 포기하고 미래 세대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결정을 내리거나 조치를 취하고, 그 결과 행복감이 증가하는 경험을 했을 때, 이를 ‘미래성(Futurity)’을 보여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시계가 고장 나도 시간은 흐른다
물론 정치인의 짧은 임기가 권력 남용을 막는 순기능도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1830년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간파했듯이, 정치인의 진정한 역할은 미래의 빛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는 빈곤에 대한 두려움에서부터 미래에 대한 기회에 이르기까지 시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드는 일들이 많다. 그리고 끊임없는 운명의 부침 속에서 현재의 크기는 점점 더 커진다. 그렇게 커진 현재가 미래를 가리게 되고 결국 지워지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음 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싶어 진다”라고 진단하며, “국가는 종교나 사회가 더는 영감을 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시민의 마음속에 다시 심어주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정치인의 책임이 더욱 막중해지는 이유이다.
단기주의는 종종 가장 부족적이고 분열적인 정치와 연관되지만,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논할 때는 오히려 초당적인 지지를 얻어내는 경향이 있다. 장기적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희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현재의 정치 시스템 안에서 좀 더 멀리 내다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이는 미래 세대는 물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궁극적으로 이익이 될 것이다.
내가 2030 청년 세대였을 때 사회는 우리에게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라는 타이틀을 일찌감치 선사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비정규직, 계약직이 생겨나고 기업의 단기적 이익에 따라 언제든 사람을 쉽게 자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놓고는 우리를 ‘88만 원 세대’ ‘잉여 세대’라 부르며 조롱했다. 그동안 사회의 기득권 세력과 정치인, 기성세대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내가 가장 경멸하는 책이다. 사회와 기성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우리에게 잔뜩 미뤄놓고 그 고통과 불안을 기꺼이 견디라는 가스라이팅이었다.
당연히 그러는 동안 한국 사회는 미래를 준비하지 않았다. 그래서 2025년, 현재 2030 세대는 ‘88만 원 세대’가 아닌 ‘44만 원 세대’가 되었고, ‘3포’ ‘5포’를 너머 ‘N포 세대’가 되었다. 그러면서 경제적 이득이 필요할 땐 ‘MZ’라는 별 의미도 없으면서 그럴싸한 레이블을 붙여 끊임없이 상품과 서비스를 사라고 유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미래’를 말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일본 문화 개방을 선언하며 대한민국 국민에게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투자는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정책으로 대한민국의 문화와 소프트 파워를 키우면 미래에 큰 먹거리가 될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초고속 인터넷 망을 깔았다. 그가 품었던 기대와 희망은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지금 현재, 이루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현재’를 희생해 우리의 ‘미래’를 만들었다. 정치와 정치인이 마음에 안 들면 구석에서 불평만 하고 있지 말고 정당에 가입해 당을 바꾸라고 했던 그의 말에 민주 시민은 정당 민주주의와 당원의 권리를 실천했다. 그로부터 민주주의를 배운 우리는 20여 년 후, 지금 또 다른 노무현을 꿈꾼다. 나는 어린 청년 시절, 김대중과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난 덕분에 우리 ‘미래’가 얼마든 바뀔 수 있다고 감히 말한다.
그뿐인가.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 한 가운데 시민들은 자신들의 '현재'를 희생해 우리들의 '미래'를 만들어냈다. 일제강점기,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짧은 생을 살았던 독립 열사들 역시 우리들의 '현재'를 위해 자신들의 '미래'를 희생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시대, 계획적이고 악의적으로 청춘의 '현재'에 혐오와 폭력, 갈등, 공포, 불안을 심어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진상 조사 요구와 단식 투쟁을 조롱하며 그들의 면전에서 피자와 치킨을 시켜다가 볼이 터지도록 입안에 욱여넣었던 대학생들은 10년 후인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 또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지금 대한민국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현재를 비극으로 물들이고 절망과 혐오, 불안을 부추기는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누군가는 ‘무속의 칼춤’을 함께 추자고 외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현재의 고통을 직시하고 해결하여 미래를 바꾸고, 다시 한번 희망차고 신명 나게 살아보자고 미소 지으며 손을 내민다.
선택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 특히 청년들의 몫이다. 우리의 미래를 직접 결정할 소중한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만약 12.3 내란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어쩌면 다시는 직접 투표를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려는 세력이 시민에게서 빼앗으려 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 표 한 표에 담긴 무게와 의미를 절실히 깨닫는다.
우리는 이제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다가오는 6월 3일 대통령 선거와 그 과정을 단순히 정치적 경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미래를 여는 축제처럼 즐기고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이 곧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 우리는 ‘시간 반역자’가 되어 우리의 ‘현재’를 볼모로 ‘미래’를 약탈하는 이들에게 저항해야 한다. ‘현재’라는 섬을 떠나 ‘미래’의 섬으로 가야 한다. 시계가 고장 나도 시간은 흐른다. 사악하고 무능한 정치인이 ‘현재’를 팔아도 우리는 ‘미래’를 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