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광장>입니다. 11년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배우 소지섭과, 그 이름만으로도 무수한 서사를 품은 <광장>의 만남은 하나의 사건이었죠.
스스로를 유폐했던 전설이 동생의 죽음을 기점으로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는, 거의 신화에 가까운 이 이야기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리스 비극의 장엄함과 셰익스피어적 고뇌를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주인공의 대사든, 눈빛이든, 액션이든 관계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7편의 에피소드 끝에 제가 마주한 것은, 영혼의 울림이 아닌 잘 조율된 스펙터클의 공허함이었습니다. <광장>은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배신한, 잘 만든 실패작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상징으로만 남은 아킬레스건
모든 비극은 주인공의 상처에서 시작됩니다. <광장>의 남기준(소지섭)에게는 ‘스스로 끊어낸 아킬레스건’이라는, 이보다 더 강력할 수 없는 상징이 주어졌습니다. 이는 과거와의 단절, 세상으로부터의 고립,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는 낙인입니다. 그의 절뚝이는 걸음은 매 순간 그의 고통과 결의를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살아있는 상징이 되어야 했죠.
하지만 드라마는 이 강력한 무기를 스스로 내던집니다. 남기준은 11년의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낸 야수의 얼굴이 아닌, 혹독한 자기 관리에 성공한 CEO의 초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수트는 말끔하고, 그의 고독은 계산된 카리스마로 연출됩니다. 이는 단순한 각색의 차이가 아니라, 장르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냅니다. 누아르의 주인공에게 육체는 그의 영혼이 겪어온 고통의 지도입니다. 주름 하나, 상처 하나에 그의 역사가 새겨집니다. <광장>은 이 지도를 지워버림으로써, 남기준을 비극적 영웅이 아닌 기능적 해결사로 전락시켰습니다. 그의 아킬레스건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배경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죽은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카타르시스가 실종된 액션의 향연
원작 웹툰에서 남기준의 폭력은 처절한 ‘생존의 언어’였습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고통을 주어 공포를 지배하는 기술이었고, 살아남기 위한 동물의 몸부림이었죠. 독자들은 그 폭력 앞에서 쾌감이 아닌, 생존의 처절함과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서늘한 통찰을 느꼈습니다.
반면, 드라마 <광장>의 폭력은 ‘무중력 상태’에 가깝습니다. 주먹은 뼈를 부수지만 고통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고, 칼날은 살을 가르지만 피의 비릿함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는 폭력의 ‘스펙터클화’가 빚어낸 참사입니다. 모든 액션은 감정의 폭발이 아닌 정교하게 계산된 안무처럼 보이며, 남기준은 고뇌하는 인간이 아닌 단지 효율적인 살상 기계로 기능합니다. 관객은 그의 싸움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대신, 잘 만든 액션 게임의 클립을 보는 듯한 감각적 쾌락만을 소비하게 됩니다. 폭력에서 철학이 제거될 때, 남는 것은 공허한 움직임뿐입니다. <광장>의 액션은 화려하지만, 그 무엇도 관객의 마음에 남기지 못합니다.
기능적 악인과 영혼 없는 도시
위대한 비극은 영웅과 대적하는 강력한 세계가 있을 때 완성됩니다. 그러나 남기준이 돌아온 서울의 밤은 거대한 제국이라기엔 너무나 허술한, 판지로 만든 세트장 같습니다. ‘주운’과 ‘봉산’이라는 거대 조직은 서울의 심장을 움켜쥔 실체적 공포가 아니라, 주인공의 동선을 위해 존재하는 기능적 집단에 머무릅니다.
이 세계의 시민인 악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각자의 생생한 욕망을 지닌 입체적 인간이 아니라, ‘배신하는 부하’, ‘야심 많은 후계자’, ‘속을 알 수 없는 조력자’ 같은 ‘욕망의 템플릿’을 기계적으로 수행합니다. 특히 차승원이 연기한 김 선생은 <독전>의 브라이언이라는 안전한 흥행 공식을 게으르게 자기 복제함으로써, 이 세계가 얼마나 창의성 없이 구축되었는지를 스스로 증명합니다.
누아르의 무대인 ‘도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장> 속 서울은 욕망과 음모가 뒤엉킨 생물이 아니라, 화려한 야경을 보여주는 관광 엽서에 불과합니다. 영혼 없는 공간 속에서 영혼 없는 인물들이 벌이는 싸움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를 남길뿐입니다.
결국, 새로운 ‘아저씨’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고독한 이방인은 새로운 ‘아저씨’가 되고 싶었던 걸까요? 이 모든 실패의 조각들은 결국 이 질문으로 수렴합니다. 영화 <아저씨>의 차태식(원빈)이 신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폭력이 지키고자 하는 명확한 대상(소미)과 처절한 감정적 연결고리에 단단히 닻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액션은 서툴고 거칠지언정, 절박한 진심의 외침이었죠.
하지만 <광장>의 남기준은 그 닻을 내리는 데 실패합니다. 드라마는 복수의 명분인 동생과의 유대를 깊이 있게 쌓아 올리는 대신, 남기준의 스타일리시한 고독과 세련된 폭력을 전시하는 데 집중합니다. 그 결과 그의 복수는 지켜야 할 것을 위한 투쟁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공허한 제의(祭儀)가 되고 맙니다. ‘지키는 폭력’의 처절함은 사라지고, ‘보여주는 폭력’의 허무함만 남았죠.
결국 <광장>은 자신의 제목을 스스로 배신합니다. 다양한 욕망이 충돌하고 개인이 거대 담론과 맞서는 철학적 ‘광장’이 아니라, 모든 것이 ‘좋아요’를 위해 소비되는 디지털 플랫폼의 네모난 ‘광장(스퀘어)’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광장>은 새로운 ‘아저씨’의 신화를 재현하려 했으나, 그 핵심인 ‘진심의 무게’를 담아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복제한 ‘멋진 모조품’으로 남았습니다. 복수가 끝나고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 남기준이 홀로 남는 마지막 장면이 허무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비극의 침묵이 아니라, 처음부터 채울 이야기가 없었던 텅 빈 공간의 당연한 적막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