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곳에 오래 살다 보면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당연해지기 마련이다. 일본의 대학교에서 20대를 같이 보낸 친구들이 하나 둘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입 모아 하는 말들이 있었다.
"그때 더 열심히 돌아다니고 기록으로 남겨놓을 걸 그랬어"
그 말을 듣고 나니 새삼 내가 일본에 살면서 참 많은 것들을 만끽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부야의 스크램블 교차로를 지나 미야시타 공원 쪽으로 걷다 보면 타워 레코드의「No Music No Life」라는 슬로건이 대문짝만 하게 보인다. 음악 없이 사는 일상이 흑백처럼 느껴지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공감 가는 문구이다.
그런 내가 일본에 살면서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레코드 문화가 발달해 있다는 점,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일본에 자주 온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인들은 티켓팅에 한국인만큼 진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레코드를 모으게 된 계기
결코 음질에 대한 나만의 코다와리(추구점)가 있어서 레코드를 모으는 게 아니다. 사실 생각보다 막귀라 스트리밍 음악과 레코드 음질 간의 엄청난 차이를 잘 알지는 못한다.
음악이든 음식이든 패션이 든 간에 취향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문득 지금의 내 취향을 형태로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과거의 나는 이런 것들을 좋아했었구나라고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을 미래의 누군가와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너무나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레코드를 모으다 보니 의외로 수집의 결과보다는 모아가는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한가로운 주말에 아침 운동을 다녀온 뒤 좋아하는 레코드 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중고 앨범을 운 좋게 싸게 샀을 때, 어떤 아티스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앨범 재킷이 마음에 들어서 샀는데 집에 와서 들어봤는데 내 스타일의 음악일 때의 그 쾌감!
이런 소소한 과정들 속에서 사사로운 행복감을 느낀다.
혹시라도 관심이 있으실 분들을 위해 혼자 방문하여 레코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나의 최애 레코드 가게를 몇 개 공유해 본다. 레코드와 음악에 크게 관심이 없다 할지라도 가게의 분위기와 인테리어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아티스트들은 일본을 좋아해
요즘은 한국 음악 시장도 워낙 커져서 아시아 진출 시에 빼놓을 수 없는 메인 시장이 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일본의 경제 규모는 한국을 훨씬 넘어서기에 많은 해외 아티스트들이 일본에서 참 많은 라이브 공연을 한다. 게다가 일본에서의 티켓팅은 한국만큼 경쟁률이 치열하지 않으니 나에게는 블루오션인 셈이다.
가끔씩 즐기는 이런 문화생활을 위해서 돈 벌고 열심히 사는 것 아니겠냐며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라이브를 발견하면 누구보다도 빨리 업무를 끝내놓고 공연장으로 직진하는 게 연례행사 중 하나다.
아무래도 음악이라는 게 취향을 타기도 하고 라이브 공연이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 보니 친구를 꾀어서 같이 보러 가기가 쉽지가 않은데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일본 라이브 공연장에는 혼자 오신 분들이 꽤나 많다. 진정한 고수들은 공연 시작 전까지 기다리는 타이밍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스포츠 시합 영상을 보면서 기다린다.
이런 고수 분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라이브 공연을 혼자 보러 가는 것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혹시 음악을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에 맞추어 일본 여행을 계획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를 모두 경험 한 나로서는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 시절 감성이 남아있는 것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린다. 아마도 나는 쉽게 소비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것들을 좋아하나 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아날로그를 만끽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곳이 아닐까.
아날로그적인 요소들이 여전히 많은 나라인지라 필름 카메라에 진심인 젊은 사람들도 많고 잘 찾아보기만 한다면 관련하여 즐길 수 있는 부분들이 참 많다.
필름을 좋아하는 이유
이케부쿠로 근처에 그저 평범한 동네 주택가인 시이나마치역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으로 인화하는 작업을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암실에서 한 첫 작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컬러 사진은 빛이 조금이라도 새어 들어오면 안 되었기에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필요한 물품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동선을 다 외운 다음, 필름에 상이 맺히게 하고 약품에 사진을 담그고 다시 꺼내어 이동시키는 작업들을 해야만 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아주 작은 차이이지만 온전히 나의 입맛에 맞는 명도와 채도를 손 끝 감각과 0.01초의 차이 만으로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찌릿한 전기가 흘렀다. 내가 원하는 레시피를 찾으면 일정하게 표준화된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다 생각하니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사진작가들, 심지어 셰프들에게까지 찬사를 보내고 싶어졌다.
그저 약간의 허세와 감성으로 필름 카메라를 고른 나는 이 일을 계기로 필름이 더 좋아졌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나만이 아는 수고로움을 통해 완성된 사진을 보고 있자면 엄청나게 대단한 멋진 사진이 아니더라도 괜스레 뿌듯한 기분이 든다.
모든 이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일궈내고자 했던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