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에는 커다란 책장이 있었다. 내 아기일 적 사진 속 단칸방 안에도 자리 잡고 있던, 엄마가 혼수로 해왔다던 거무죽죽한 나무 색의 책장이었다. 내가 거무죽죽한 색이 칙칙하다며 저것 좀 없애버리면 안 되냐고 철없는 불평을 툭툭 거리면 엄마는 네 눈은 해태 눈인가 보라며 저게 어떻게 거무죽죽한 색이냐고 버럭 하곤 했다. 그러면 한동안 색에 대해 서로 혈전을 벌이느라 그 책장을 없애고 싶다고 본디 말을 꺼낸 나의 의도는 어느새 잊혀 버리고는 했다.
좁은 단칸방에 저 책장을 넣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해 몇 번이고 이야기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엄마가 책을 엄청 좋아했구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집 그 책장 안에는 책이 아니라 엄마가 아끼는 그릇, 안 쓰는 그릇, 온갖 주방용품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 구석 한 칸에 노트 몇 권과 아빠가 전역하며 받았다던 사진첩들이 초라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즈음이다. 한창 시험 기간이던 때 불현듯 책장 구석에 있는 동글동글 말린 스프링 노트가 내 시선을 잡아채더니 어느새 내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어린 내가 봐도 반듯반듯한 어른 글씨체로 줄 간격 상관없이 써 내려간 글들이 담겨 있었다. 그 글들을 읽으며 조마조마하고 두근거려 몇 장을 읽다 얼른 덮어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눈만 마주치면 옥신각신하는 엄마의 일기였다. 가족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 누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혼자만 있는 방 안에서 눈치를 보며 스름스름 책장 앞으로 기어가 노트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작은 테이블 등에 의지하여 읽어 내려갔다. 사건도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 글들이었다. 그저 한밤 감상에 젖어 이리저리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간 엄마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강해 보이는 엄마도 이리 아프던 때가 있었구나. 엄마도 고민이 많았구나. 엄마는 왜 이리도 슬펐던 걸까.
그런 종류의 놀람과 의아함, 쓰라림으로 읽어내려 간 엄마의 일기는 언제, 왜 그만두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게 노트 한 권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끝이 났었다. 그 뒤로도 가끔 읽을거리가 필요하거나, 집에 있는 읽을거리들이 지루해지곤 하면 엄마의 일기장을 몇 번이나 꺼내서 읽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놈의 입이 방정인지라, 입 가벼운 동생에게 문제의 일기장에 대해 발설하고야 말았다. 물론, 곧 엄마의 귀에 들어갔고 그 뒤로 엄마의 일기장은 거무죽죽 책장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엄마의 힘든 시간들을 자식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엄마의 글이 읽히는 게 부끄러우셨던 걸까, 어찌 되었든 그 날 이후로 다시는 그 일기장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에 공을 들이는 시간들에는 늘, 엄마의 일기장이 있었다. 엄마의 즐거웠던 기억이 담겨있는 글도, 뭔가 특별하고 반전 있는 글도 아니었는데 읽는 내내 글 맛이 참 달달했다. 자꾸만 훔쳐보고 싶었다. 훔쳐보는 글이라서 달콤했을까 아니면 끌리는 글이라서 훔쳐보고 싶었을까. 무엇이 먼저이면 어떠할까. 그러다가 그저 나도 그렇게 자꾸만 훔쳐보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다고 움츠려 본다.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괜스레 기침 한 번 해본다. 상상만으로도 광대뼈가 승천한다.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구나. 현실이 되면 그 행복감의 크기를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싶다. 나도 내 아이들에게 그리고 너에게 훔쳐보고 싶은 글을 맛 보이고 싶다. 그러다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런 글 맛을 전할 수 있으면 또 그런대로 좋겠다. 나는 아마도 내가 책장 안에 누군가가 훔쳐보고 싶은 글들이 담긴 노트를 몇 권 꽂아두고 싶은가 보다.
엄마가 요즘, 글을 쓰고 있는데 말이야.
응? 쓰는 걸 프랙티스 한다고요?
아니, 엄마 마음이나 생각을 글로 쓰고 있다고......
유찬이가 화가 나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 울기도 하고 소리지르기도 하고 이불 안에 들어가고 싶기도 하잖아?
그런 것처럼 자기 기분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엄마는 그럴 때 글을 써. 그럼 좋아.
아무튼, 유찬이가 한글 공부 계속해서 나중에 엄마가 쓴 글들도 읽어주면 좋겠어.
어느 날인가 큰 아이에게 이야기했다. 그 옛날 나처럼 내 아이들이 책장 안에 꽂혀있는 내 글들을 야금야금 읽어 내려간다면,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참말로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