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淸算) 별곡

비교하는 삶의 청산(淸算).

by 하나

아 뜨거워. 으~ 호호~ 고구마는 역시 김치를 이렇게 얹어 먹어야 맛있지.

언니. 나도 나도.

나. 나. 나. 나도 고구마 까줘.


추운 겨울날 따뜻한 이불속에 동생들과 몸을 파묻고는 TV 앞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에 김치 얹어 먹던 그 시간이 그렇게도 행복했었다. 애 늙은이처럼 '아~ 좋다!'를 입에 달고는 부지런히 고구마 껍질을 까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곤 한다. 그런 시간이 가져다주는 그 만족감이 넘치고 흘러 손 데어가며 껍질 벗겨낸 고구마를 두말없이 동생들에게 양보하는 것 또한 즐거움 그 자체였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때가 또 언제였더라..... 학창 시절,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두 다리를 쭉 펴고는 행복하다 생각하곤 했었다. '오늘 하루도 끝이 났구나. 오늘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았구나.' 보낸 하루에 대한 만족감을 갖는 그 시간이 행복해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었다.

내가 행복하다 생각했던 또 다른 많은 시간들이 있었겠지만 행복하다고 내뱉던 말들이 떠돌아다니던 그때의 감상들이 남아있는 경우는 몇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남아있는 그 감상들은 모두 내 안에서 일어나던 것들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갖는 행복감이 내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그때는 그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기억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었다.






서른 남짓 해를 큰 사건, 사고 없이 순탄하게 살아왔다. 그런 평범한 하루하루들이 채워져 어른이 되고 직장인이 되고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자는 아이와 함께 TV 앞에 앉아 있던 어느 날, 난 문제의 불편한 감정과 만나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아이를 낳고는 화장실 한 번 맘 편히 못가는 상시 대기조의 수유 맘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이 힘들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젖소 놀이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비관하고 있었다. TV에서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아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의 이런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내 아이가 아픈데 없이 잘 크고 있지 않은가. 그것 만으로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인 일이다. 지금의 이런 나의 상황을 비관하지 말고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야겠구나.


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고 곧 긍정적인 마음으로 수유를 하고 기저귀를 갈고 그렇게, 그렇게 생활했다. 그러다 또 반복되는 일상에 우울 해지곤 하면 그래도 내 남편, 아이들, 가족들 아픈데 없이 잘 지낸다는 위안으로 마음을 돌려세웠다. 그때 나는 주변에서 듣곤 했던 '남의 불행은 곧 내 행복이다.'라는 말이 놀부 심보인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다'와 같은 편의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상 사는 사람들 누구나 자신의 처지를 남의 처지와 빗대어 자기 위안을 갖는 것이라고, 그래서 견딜 수 있고 행복하다 만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의 발견을 한 내가 짐짓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몇 년 간을 '남의 불행은 곧 내 행복이다.'에 대해 내가 만든 고루한 틀에 갇혀 살았다. 어른이 되기 전 내가 갖던 만족감과 행복감에 대한 기억은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행복감의 시작점이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온전히 내 안이라는 사실은 가라앉아 묻히고 말았다. 그것을 잊지 않고 살았더라면 저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게다.


그리고 얼마 전 브런치에 게재된 투톤님의 글을 읽다 한 문장을 만나고 그만 얼음이 되고 말았다. 그 문장에서 시작된 생각들이 나의 어린 시절의 순수한 행복감에 대한 추억을 다시 건져내주었다. 이 글은 그 문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항상 기도한다. 가진 사람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해서 불행해지지 않고, 없는 사람들과 나의 상황을 비교해서 괜찮아지지 않길. 내 모든 번뇌가 모두 내 안에서 풀어지길.'

/투톤님의 '지구와 달 사이' 중에/



나 역시 항상 기도한다. 가진 사람들과 나의 상황을 비교해서 불행해지지 않길. 그러나 그뿐이었다. 없는 사람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해서 괜찮아지지 않길 기도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것은 다분히 개인의 욕구 충족을 위한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위안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갖는 보편적인 마음이라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갖고 있던 어딘지 모를 불편한 감정들은 내 식의 의미 부여를 통해 날려버렸다. 그러던 나는 저 문장을 만나고 나서, 날려버린 나의 자책감이 얼마나 오만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비교의 삶이 또 이렇게 내 마음을 옭아맨다.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친구가 들고 다니는 명품백이 내게는 없다고 우울해하던 시절, 남들이 즐겨 입는다는 고가 브랜드의 옷을 나도 이제 입어 보겠다고 선언했던 그 시절. 남들에게 기죽고 싶지 않아 겉모습에 시간을 쏟아붓고 돈을 들이던 시절. 끊임없이 시간과 돈을 들이는데 난 늘 더 많은 것을 원했고, 더 새로운 것을 원했고, 그들이 가진 것을 나 또한 갖길 원했고 결국은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남았던 시절. 그 시절, 순간의 반짝임이 사라지고 나면 난 늘 혼자였고 서늘해졌었다. 그것을 견디는 것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누구에게나 오는 시간이라 생각했고, 그럴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누추해지고 닳고 해져갔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 앞에 설 용기가 없어 밀어내고는 했었다. 그러다 마침내 나는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고, 내 마음의 누추함을 더 이상은 방관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야 말았다. 그래서 인정했다. 나는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가진 사람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타인의 시선에 고정되어 있느라 내 안의 만족을 잊고 살았다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인정하고 나니 버려야겠다 생각 들었다. 물론 지금도 깨끗하게 타인의 시선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적어도 인지하고 변화해야겠다는 마음의 시작이 있었다. 그렇게 가진 사람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하는 삶의 청산(淸算)을 시작했었더랬다. 그런 내가 없는 사람들과 나의 상황을 비교로 위안 삼는 것은 비교하는 삶이라 생각한 적 없다니. 참으로 일방통행이었다.



최근 몇 달 동안 몸과 마음 부대끼는 힘든 일들을 겪게 되었다. 왜 이렇게 불행이 연달아 올까 할 만큼 아픈 시간들이었다. 그렇다면 지난 몇 달 간의 내 불행은 남의 행복이 되었을까? 그런 나를 보며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이가 있었을까? 무릎에 가슴을 붙이고 웅크리고 앉아 생각해본다. 참 모자란 생각이었다. 내가 고통받던 그 시간 동안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은 한결같이 나의 고통을 보듬어주고, 끌어안아주고, 함께 눈물 흘려줬다. 내 힘든 일들이 하나 둘 해결되고 끝나던 때에 나만큼 기뻐하며 축하해주던 이들이다. 이제 다 괜찮다며,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며 나의 마음 안에 혹여라도 남아 있을 불안까지 알아채어 다독여주던 이들이다. 그 고마운 이들에게 저런 오명을 씌우다니, 참으로 나빴다.


누구도 타인의 인생에 켜켜이 쌓여있는 고비에 잣대를 들이댈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저 내 생에 만나게 되는 험한 고개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나는 것에 힘쓰면 그뿐인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그만인 것이다. 감히 누군가의 인생의 무게를 저울질하려 했던 나의 철없음과 무지함에 깊이 고개 숙인다. 타인의 눈에 기대 살지 않고 나의 눈으로 타인을 훑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나도 투톤님처럼 내 모든 번뇌가 내 안에서 풀어지길 기도하며 비교의 삶을 청산(淸算)하고 남은 생을 고개하게 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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