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나 Mar 02. 2019

남편을 존경하세요?

남편을 존경한다던 여자가 있었다.

임상미 씨는 남편과 동갑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던 때 그녀의 남편도 마흔셋.  


그래, 남편의 무엇이 그리도 존경스러우시냐고 물었다.

인격. 그 사람의 인격.  


그 대화가 오랜 시간 내내 각인되어 있었다. 어디에서도,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말이었으므로.


남편. 존경. 인격.


그 세 단어는 나의 결혼 생활 내내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기회를 포착하는 즉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남편을 존경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동갑의 남편을 존경하는 일이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동갑인 남편의 인격을 존경하는 일이란 얼마나 현실감 없는 일인가.  


그런 생각들이 연달아 떠오르고, 그래도 그녀는 그렇다고 했지, 나도 마흔셋이 되면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녀의 나이가 되었다. 마흔셋.


공대 출신의 남편에게는 여자 동기가 몇 없었다. 그리고 난 그의 여자 동기들을 다 만나보았다. 미경은 그녀들 중 하나였다. 남편이 이야기했다. 미경이는 정말 대단해, 존경스럽다니까.


남편이 다른 여자를 존경스러워한다. 나는 결혼해서 마흔셋이 되는 지난 15년 동안 줄곧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아왔는데......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타이밍도 죽여주지. 남편이 존경한다던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눈치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남편은 정말 놀라 자기 얘기하는 줄 알았나 봐. 를 덧붙여 가며 전화를 받으러 침대 밖으로 나갔다. 남편이 존경하는 여자라……


마흔셋의 아침이 밝았다. 남편은 백화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어차피 자기가 고르는 생일 선물은 마음에 안 들 것이 뻔하니, 같이 가서 선물도 고르고 점심도 먹으며 데이트를 하자 했다. 기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어제의 대화를 기점으로 15년 동안 갇혀있던 존경에 대한 의구심이 팽창하고 있었다. 그러다 백화점에 있는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서서 그것이 펑! 터지고 말았다. 소리는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 그를 보았다.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15년이나 지났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을 존경한다던 여자의 남편. 신혼 초 눈길 운전에 교통사고가 났었다고 했었다. 사고가 크게 나서 얼굴뼈가 다 주저앉았었다고. 그 흔적이 오른쪽 광대뼈 쪽에 남아있었다. 그녀와 함께 일할 때 그녀의 책상 위에는 항상 가족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를 딱 한 번 보았었다. 그런 얼굴은 흔하지 않으므로 나는 단번에 그가 그녀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예전보다 눈가에 주름이 깊어졌고, 예전보다 더 진한 색의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60이 가까워진 나이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젊어 보이고, 기운차 보였다. 재빨리 그의 앞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훑는다. 그녀는 내가 아는 임상미가 아니다. 남편을 존경한단던 여자가 아니다. 여자 옆에 하얗고 초록인 꽃다발이 놓여있었고, 그가 막 준비한 선물 상자를 열고 있었다. 예뻐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상자 안에서 파란 광물이 얹어진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에 끼어주었다.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끼가 많은 여우다.  


고개를 돌려 내 앞에 앉은 남편을 본다.  


"당신, 어제 미경이 존경스럽다고 한 거 기억나?"

"응? 내가 그랬나?"

"응. 당신이 미경이 존경스럽다고 했지. 나는 어때? 당신 와이프는 존경스럽지 않아?"

"당신? 에이, 당신은...... 사랑스럽지."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대답이 꽤 마음에 들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을 존경한다던 여자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녀의 남편에게 사랑스러운 이는 따로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아직도 남편을 존경하며 살고 있을까? 그녀는 정말 남편을 존경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남편에게 말했다.


"갖고 싶은 게 생각났어."

“그래? 계속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하더니? 뭔데?”

"사파이어 반지."

"에에?"

"파란색 돌 있잖아. 사파이어."

"그.. 그래. 까짓것 사파이어 반지 내가 선물할게."

"응, 내가 사랑스러운 만큼의 크기로 부탁해."

"어? 그럼 아마 못 살걸?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은, 그런 크기의 사파이어는 아마 없을걸?"

"말빨만 늘어가지고……."


남편, 당신은 오늘 실로 존경스럽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존경한다 하여 사랑받을 수 없고,  


아무튼. 존경보다는 사랑받고 싶은 불혹 즈음.

값비싼 보석반지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불혹 즈음.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집에서 놀고 있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