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퍼져 드라마를 보다, 하루 종일 그러고 있으면 온 방이 전자파로 가득 차 내 에너지도 다 빨리는 기분이 좋지 않구나 했던 어제의 생각이 떠올라 부스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잔뜩 쌓여있는 싱크대 안의 설거지들을 식기세척기에 넣고는 싱크대 위의 남은 물기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문득, 내가 무정부주의자를 가늠케 하는 정치관을 가졌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시작이 어디인지 쉽게 찾지를 못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아마도 그것은 보던 드라마의 연장선이 아니었나 싶다. 중국 사극(황위 쟁탈에서 비롯된 정치적 다툼에 관한 드라마였다.)을 보다 정치적 이견이란 단어가 떠올랐고, 나의 정치관은 어떠한가로 생각이 이어졌으며,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신랑에게 외쳤던 언젠가가 떠올랐다.
그리고 곧, 무정부주의자라 외쳤던 당시의 나는 어떠한 갈등 상황에도 부딪히거나 속해있기 싫다는 마음이 강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갈등 상황을 피하고 싶은 그 마음은 정치적 이견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뿌리 깊게 박혀 어느 순간부터 갈등 상황을 극도로 꺼려한다는 것에 생각이 이르렀다. 진지하게 오랫동안 생각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예전보다 더 많은 중압감을 느끼며 그런 거부감을 귀찮음으로 표출한다는 것 또한 발견하였다. 이 생각의 끝은 얼마 전 몰입되어 읽었던 예민한 사람들에 관한 책으로 귀결되었다.
나는 천성이 예민한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너무 많은 자극을 받아들여야 했구나.
예전에는 그러한 나를 몰아치며 모든 자극을 받아들이고 그 자극들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쳤구나.
지금의 나는 그런 자극 자체들을 거부하는구나.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나는 자극에 대해 예전보다 점점 예민해지고 스트레스 상태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기 더욱 힘들어하는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30초? 1분 남짓이었던 것 같다. 정말 찰나와 같은 순간에 저 수많은 생각들이 솟아났고 지나갔다. 그런 생각과 함께 싱크대 정리를 마치고 레인지 청소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나에게 마음먹기라는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의문스럽다. 내가 행동을 하고 있으니 마음먹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레인지를 닦기로 한 순간의 마음먹음에 관한 과정에 관해서는 저렇게 또렷하지가 않다. 아마 저 많은 생각들이 스친데 30초 정도의 짧은 순간이 걸렸으니 레인지 청소를 마음먹는데 필요한 생각과 결정의 과정은 너무도 짧은 순간에 처리되어 지각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레인지 청소를 하다 내가 한 생각들을 글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인지 청소를 시작했으니 다 마치고 나면 글로 생각을 옮겨둬야겠다고 또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또 잠시 (내 생각엔 이번에는 3분 남짓이었다고 생각된다.) 레인지 닦기에 집중했다. 닦기가 끝난 후 '아까 내가 글로 옮겨두려고 했던 첫 문장이 뭐였더라.'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첫 문장을 다시 떠올릴 수가 없었다.
끝내 건져내지 못한 첫 문장을 아쉬워하며 청소기 돌리기를 시작하였다. 무정부주의, 예민함 이런 단어들만 떠돌아다니고 방금 전 머릿속에서 또렷이 떠올랐던 문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 다른 생각이 스며든다.
이렇게 일순간 떠올랐다 삽시에 사라져 버린 생각은 내가 하는 진짜 생각이 아니다. 그 생각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 아닌, 상황이나 얻은 지식들로 인해 만들어진 가공의 생각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그러나, 가공의 생각은 생각이 아닌 것인가? 그것 역시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누구도 내게 강요한 적 없는 것인데 그러면 그것은 내 것인가? 내 것이 아닌 것인가?
이리되었든 저리 되었든 일단 시작해보기로 하고 앉아서 글을 쓴다. 쓰다 보니 또 나의 처음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정리가 되었다. 그런데 뭔가 깔끔하지가 않고 찝찝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역시나 그 첫 문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모르겠다. 갑자기 문득, 그 문장이 다시 떠올라 내 앞에 따악 나타날지는....
그러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의 과정을 거치나 싶은 의문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거지를 하다, 청소를 하다 보던 드라마에서 시작된 단어 하나로 짧은 순간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처리과정을 거친 생각을 가지나 궁금해진다.(물론, 내가 생각하는 짧은 시간이다. 생각의 과정이 일어나는 이 시간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대한 지식은 없다. 나중에 공부해 봐야 할 일이다.)
이 생각의 끝은 '나는 아마도 예민한 사람 쪽에 가깝다.'라고 분류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러기로 하고 생각도 글도 마치기로 한다. 그러지 않기에는 생각도 글도 끝이 없을 것이라 단정 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