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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un 06. 2017

인종차별주의자여, 가정부의 똥파이를 받아라.

그냥 쓰는 리뷰, 영화 <The Help>










<The Help>, 2011


*스포일러 주의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을 담은 리뷰임




영화 <The Help>는 60년대,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 잭슨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인종차별을 경멸하는 스키터는 주변 친구들과는 다르게 상류층 가정주부가 아닌 작가를 꿈꾼다. 우연한 계기로 신문사의 살림 정보 칼럼을 대필하게 된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의 입장에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스키터는 하고자 하는 것은 해내고야 마는 뚝심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몇 차례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살림 정보 칼럼을 위해 교류하던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 그리고 미니까지 설득해 함께 흑인 가정부로서의 삶을 책으로 쓰기 시작한다. 흑인 가정부 둘만의 이야기로 채워지던 책은, 이후 에이블린의 집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흑인 가정부들의 애환을 담게 된다. 완성된 책은 뜨거운 감자처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넘치는 사랑을 받게 되고, 스키터는 책을 팔아 받은 돈을 흑인 가정부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는 커리어를 위해 대도시로 떠난다.






1. 색깔로 정의되는 존재의 가치

2012년 호주 정부가 국민건강 증진에 활용하기 위해 '혐오스러운 색깔'을 조사했다. 3개월 간 16~64세 흡연자 1000명 이상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동시에 7개의 기존 연구결과를 분석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뽑은 가장 혐오스러운 색깔은 바로 이 색이었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양인은 이 색깔을 보며 '더러움, 죽음'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했다고 한다. 글을 쓰며 문득 이 색깔이 흑인들의 피부색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화 속에서 흑인 가정부들은 하나같이 더럽고 미개하고 천박한 존재로 취급받는다. 이유는 백인이 아니기 때문에, 피부색이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미니는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 힐리의 가정부로 일하며 온갖 차별에 시달린다. 심지어 힐리는 흑인용 화장실을 따로 만들고, 미니가 '백인용' 화장실을 사용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휴지에 연필로 표시도 해 놓는다. 한 성격 하는 미니는 보란듯이 '백인용' 화장실에 들어가 반항한다. 결국 그녀는 쫓겨나게 되지만, 후에 똥을 넣어 만든 파이를 힐리에게 선물하는 다소 잔혹한 복수를 한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진짜 '똥'을 넣었다. 



자신이 맛있게 먹어 치운 파이의 정체를 깨달은 그녀... 측은하도다...


해당 장면에서 힐리는 파이를 정말 맛있게 먹어 치운다. 내가 느끼기에 그 장면이 우스웠던 이유는 단순히 힐리가 똥파이를 먹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똥이라는 장치를 통해 힐리 스스로 그녀의 불결한 인권감수성을 증명하도록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똥은 일반적으로 불결함의 대표주자(?)이며, 힐리가 흑인에게 느꼈던 주요한 감정이 불결함이기도 하다. 그런데 힐리는 불결한 똥파이를 먹고도 심지어 '뭘 넣었길래 이렇게 맛있는거냐'며 크게 감탄한다. 그 순간 똥을 넣었음에도 파이를 기가 막히게 구워 낸 흑인 가정부 미니는 더이상 불결한 존재가 아닌 용감한 요리사가 되었고, 똥파이를 먹고도 감탄하는 힐리는 불결함 그 자체처럼 보이는 우스운 장면이 펼쳐진다.






2. 강아지 공장의 모견들과 다를 것 없는 삶

흑인 가정부들은 주인집의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기른다. 스키터 역시 흑인 가정부 콘스탄틴 손에 자랐다.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돌아온 어린 스키터에게 콘스탄틴이 다정한 목소리로 '너 자신에게 물어보렴. 나를 험담하는 바보같은 말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라며 토닥이는 장면은 콘스탄틴의 성품과 스키터에 대한 존중이 오롯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연로한 콘스탄틴은 스키터의 어머니가 중요한 손님들을 초대해 베푼 만찬자리에서 실수를 하게 되면서 해고되고 만다. 스키터를 훌륭한 여성으로 키운 대가는 선택권 없는 이별이다.




에이블린 역시 주인집 딸을 자신의 아이처럼 돌본다.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고 속상해하는 아이에게 건네는 'You is kind, You is smart, You is important.'라는 말은 수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짤방이 분수처럼 생성되었다고. 때로 에이블린은 백인 부모보다 더 부모답게 행동한다. 적어도 아이의 내적 성장 면에서 있어서는 그렇다. 오죽하면 아이 역시 '에이비가 내 진짜 엄마야'라고 말하겠는가. 이후 도둑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나게 되자, 아이는 마치 진짜 엄마를 잃는 것처럼 눈물을 쏟아낸다. 그런 아이를 다독이는 것 역시 흑인 가정부의 몫이다. 아이가 '다른 아이를 돌보러 떠나는 거야?'라고 묻자, '아니야 아가, 네가 내 마지막 아이란다.'라며 아이에게 자신이 가르쳐 준 주문, 'You is kind, You is smart, You is important.'를 되뇌이게 한다.


얼마 전 강아지 공장이 큰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흑인 가정부들의 삶은 강아지 공장의 모견과 다를 것이 없다. 한 아이를 키우다 그 집에서 해고되면, 다른 집으로 옮겨가 또 다른 아이를 키운다. 열과 성을 다해 아이를 돌보지만, 결국 그 아이는 자라 부모와 같이 인종차별을 일삼는 백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 또 다른 아이... 흑인 가정부는 죽을 때까지 지극한 모성애로 '남의 편'을 양육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주인이 해고하면 항의 한 마디 못 하고 떠나야 한다. 차별은 이렇게나 잔인하다. 핍박받는 자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는 다양한 감정들조차 꺼내 보일 수 없다.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숨죽이며 종살이를 하는 이유는? 지독한 가난 때문이다. 흑인이 부를 쌓을 수 있는 다른 더 평등한 수단이 있었다면 굳이 차별과 모욕을 견뎌내며 가정부로 일할 필요가 없다. 당시 흑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한정되어 있었으며, 화장실은 물론이고 사무실, 대중교통 좌석, 가게,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식기 등도 백인과 분리되어 있었다. 같은 직업이라도 백인보다 임금이 적었다. 아무리 좋은 학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인종이라는 장벽을 넘지는 못했다.






3. 그리고, 또 다른 불평등

영화 속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 뿐만 아니라 백인에 대한 차별 역시 다룬다. 백인 여성 셀리아가 그렇다. 그녀는 촌뜨기 출신에 남의 남자를 빼앗아 결혼했다는 오해를 사 백인 여성들 사이에서도 무시를 당하며, 이 때문에 흑인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셀리아는 활발하고 다정한 성격으로, 주변 백인 여성들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자꾸만 소외되고 만다.




그러던 와중에, 힐리의 집에서 해고당한 뒤 일자리를 찾기가 막막했던 미니는 셀리아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게 된다. 고기도 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했던가. 차별의 맛을 톡톡히 본 셀리아는 미니가 당해왔을 설움을 이미 마음 깊이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셀리아는 미니에게 시원한 콜라를 대접하며 편한 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하는 등 첫 만남부터 다른 백인 여성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 외에도 미니와 함께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미니가 남편에게 구타를 당해 입은 상처를 치료해주는 등 차별이라고는 거리가 아주 먼 여성으로 비춰진다.


명랑하고 경계심 없는 셀리아, 매사에 당당하고 신념이 확실한 미니의 만남은 흑인 가정부가 상류층 백인 여성과 친구로 발전하는 이상현상(?)으로 나타난다. 셀리아의 삶을 보면 당시 흑인 가정부 뿐만 아니라 백인 여성의 삶 역시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여성처럼 셀리아 역시 정숙한 숙녀, 가정을 돌보는 훌륭한 아내의 역할을 모두 충실히 수행하길 요구받는다. 하지만 셀리아는 둘 다 젬병이었다. '돈에 눈이 멀어 남의 남자를 낚아챈 여자'로 이미 유명세를 탔고, 셀리아의 요리 실력 역시 남편을 자주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이를 유산해도 남편이 자신을 떠나갈까 두려워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했으니, 셀리아의 심정은 안 봐도 비디오다. 남편은 낮시간 내내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친구 한 명 없어 기댈 곳도 없었으니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그런 셀리아에게 말동무가 되어주고 요리도 가르쳐주는 미니의 존재는 구세주나 다름없었을테니, 셀리아가 왜 그토록 미니에게 애정을 쏟았는지 알 만 하다. 더구나 미니는 셀리아를 주도적으로 따돌리던 힐리에게 똥파이도 먹이지 않았는가




시간이 흘러 그 면모가 달라졌을 뿐, 현대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여러 '여성으로서의 역할'은 60년대 여성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셀리아 외에도, 결혼을 요구 받거나 여성은 외모가 아름답고 단정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시달리는 스키피의 일화 역시 곁들일만한 사례다. 피부색에 상관 없이, '나'로 살기 참 힘든 세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다.












에이블린이 해고되기 전, 한 차례의 거센 태풍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다.



그날 18명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10명의 백인과 8명의 흑인.
태풍은 그들에게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았죠.



에이블린의 독백은 사실 모든 것은 태어날 때부터, 아니 이름 뿐이라 해도 존재 자체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인종, 성별, 학력, 빈부 등 여러 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 뿐이다.


흑백차별이 판을 치던 시기의 흑인의 모습에서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모습을 본다. 그들과 우리 각각의 스토리는 다르지만, 인종 혹은 국적이라는 불가항력적 조건으로 인해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선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싶다. 요란스러운 박수보다는 진심과 공감이 담겨 있는 눈빛이 더 걸맞지 않나 싶다.


영화는 나에게 평등에 관한 많은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정말 평등을 지향하는 사람인가? 곰곰히 되돌아 보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몸이 불편한 사람, 피부색이 다른 사람,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 그리고 나와는 다르다고 무의식 중에 인식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스산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응시하던 내가 보인다. 곧 혼란스러워졌다. 갑자기 자기합리화가 나와 죽고 못 사는 친한 벗처럼 느껴진다.


이런 생각이 들 땐 조용히 마음 속으로 똥파이를 씹는 게 상책이다. 잘못한 어린 아이에게 생각하는 의자에 앉으라고 하는 것처럼, 나 스스로 인정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린 평생 인권감수성을 요구받은 적도, 스스로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껴본 적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러니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차별을 저지르며 살았다. 앞으로도 계속 저지를 것이다.' 라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그 다음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변화는 과오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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