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참 쉬운데
우리는 순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며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달리 생각해 보면
순종은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성경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어 놓으라 하지만
사실 이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순종을 어려워할까요”라는 질문입니다.
< 순종이 어려운 이유 >
우리가 언제 순종을 하게 되느냐 하면
순종이라는 행위를 했을 때,
이에 대한 어떤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신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순종하게 됩니다.
아니,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됩니다.
반면에, 그러한 믿음이 서있지 않았을 때
순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러한 확고한 믿음은
경험에 의해 쌓이게 됩니다.
“내가 경험해보니 처음에는 내키지 않더라도
나의 의지를 꺾고 순종해 보니 그에 따르는 보상이 있더라…”
“그런데 매번 그러더라”
이런 경험이 쌓이게 되면
점점 더 순종하기가 수월해집니다
바꿔 말하면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순종이 이득이라는 확실한 경험이
나에게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순종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조금은 수준 낮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러한 순종은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순종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순종의 대명사처럼 말하는
아브라함의 순종이 바로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나이 백세나 되어 낳은
귀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곧바로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심이 그토록 깊어서가 아니라
그때까지 경험한 바에 따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였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실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히 11:19)
즉 그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이로 인한 신뢰와 믿음이
그의 순종을 가능케했다 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떤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막연한 믿음은 결코 순종이라는
구체적 행동을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믿음이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상 주실 이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 잘못된 감사, 채무자 윤리 >
여기서 잠시 조금 더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가끔 이 부분에서 뜻하지 않은 오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순종은 소위 말하는
‘채무자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의 순종이,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채무,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해 행하는,
의무로서의 순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경험한 은혜를 갚아야 할 채무라고 생각하고
이를 갚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는 ‘자기 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데..”
하며 신앙의 열심을 내기 시작한다면
이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은혜의 빚을 갚아버리고 당당하게 살고픈,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달리 말하면
은혜를 거래로 바꾸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자리에 머물러 신앙생활을 합니다
<율법주의>
우리의 순종이 이렇게 채무자 윤리에 의해 왜곡될 때
맺어지는 최악의 열매는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은혜라는 채무를 갚으며 사는 사람은,
곧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게 됩니다.
바로 성경 속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그것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 다 했다..
그런데 너는 왜 안 하느냐? “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대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대신,
자기 위로 똘똘 뭉친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해 갈 뿐입니다
진정한 순종은
은혜를 빚 갚듯이.. 보답해 드리는 차원에서의 순종이 아니라,
감사함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삶 가운데 일어났던 모든 일이,
그 당시에는 비록 불행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결국에는 감사하게 됩니다.
구약의 요셉이나 욥의 감사가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감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연결됩니다
사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불행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섭리에 따라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율법주의의 폐단으로 인해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요 도구일 뿐입니다.
다만 그 율법이라는 도구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런 잘못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십계명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의 참된 의도는
백성들의 참된 안식과 평안, 그들의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절대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주시려고 하는 참된 안식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식 표현대로라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꼴이 되었던 것입니다.
방편이요 도구로 주신 율법을 지키느라,
낙타와 같이 너무나도 뚜렷하고도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에는 나 몰라라 외면했다는 꾸지람인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동일한 문제에 봉착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매주 교회에 모여 예배라는 의식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명하셨을 때,
이를 통해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기 위함이었을 것이었습니다.
성찬식을 하며, 말씀을 들으며 기도를 하며,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주 안에서 한 몸 됨을 누리는 것이며,
주 안에서 참된 기쁨과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에 집착하듯이…
예배 자체에 집착하여..
예배 가운데 누리는 평안과 기쁨보다는
그저 예배를 교리에 따라 어긋남 없이 치러 내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가울입니다.
그러나 기쁨과 안식이 없는 예배 속에서
우리는 단지 은혜의 빚을 갚으려는
채무자의 모습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빚을 갚은 채무자는 당당해집니다.
자기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결국 인생을 자기 힘으로만 살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 걱정 불안 염려의 문제 >
이렇게 은혜를 거부한 채,
율법에 의지하여 자기 힘으로, 자기 위로 살아갈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문제는 걱정과 불안 염려의 문제입니다.
걱정 불안 염려는 우리 삶에 너무나 친숙한 주제이고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문제를 많이 언급하며
염려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즉 마음속에 염려가 일어나는 것은
성실하게 살지 않아서도 아니고
기도가 부족해서도 아니라
우리 마음에 믿음이 없을 때
걱정 불안 염려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집약되어 있는 신약 성경 산상수훈에는
바로 이 걱정과 불안 염려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결론 맺습니다
그 이유로써 곧바로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위부터 구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신뢰한다면,
우리는 염려하는 대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최우선으로 구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처음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먼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모든 일에 합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 없음은 필연적으로
세상적인 염려와 근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다시금 믿음을 회복하는 것임을 성경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섭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비롯되고
이에 대한 확고한 믿음만이,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순종을 가능하게 함을 물론
우리에게 참된 자유함, 즉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토록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씀은
성경이 믿음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한다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게 되면 믿게 되고
믿게 되면 기꺼이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