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용서에 대한 황당한 오해
군대에 있을 때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읽다가
너무 재밌어서 다리에 쥐가 난 걸 참아가며
단숨에 읽었던 책이 있었다
겉표지도 없이 너덜너덜했던 문고판 소설이었다
제대 후 10여 년 후 배우 전도연이 ‘밀양’이란 영화로 깐느에서 수상했다는 뉴스를 보고
영화를 관람했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다
10년 전 군대 화장실에서 읽고 한동안 머릴 멍하게 만들었던 소설의 내용이 영화 속에 있었기에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그때 읽었던 소설은 작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이었고
이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었다
영화 밀양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유괴범에게 아이를 잃은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절망 가운데 살아가다 주위에 마음씨 좋은 신앙인들의 보살핌과
그들의 열성적인 전도에 의해 교회에 나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큰 위로를 받은 신애는 그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아들을 죽인 유괴범이 있는 교도소로 찾아간다
범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애는 유괴범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어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고 새 생명을 얻었다고.
그래서 힘들었지만 당신을 용서하여
그분의 사랑을 전해주기 위해서
이곳에 찾아온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신애의 아들 준이를 죽인 그 범인의 얼굴은
이미 너무나 평온해 보인다
그도 말한다
자기도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이렇게 준이 어머니가 오신 건
자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신 거라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자기한테, 이 죄 많은 자기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해주셨다는 것이다
용서를 받아서 그런지 그의 얼굴은
불안의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
주인공 신애는 갑자기 혼란스럽고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지금껏 고통받아 온 피해자인 본인은
아직도 그 악몽에서 충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가해자는 벌써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용서해주고 싶었는데 용서를 할 수 없어요. 이미 용서를 얻었다는데 제가 어떻게 용서를 해요?”
라는 극 중 신애는 절규한다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너무나도 힘들게 꺼내 들었던
용서의 권리, 용서의 주도권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신앙의 힘으로 되찾았다고 믿었던 마음의 평안이
사실은 거짓된 것임을 깨닫고는 신애는 스스로 무너지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만다
이 영화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거리를 남겼다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궁극적으로는 누가 우리를 구원해주는가?
특히 용서와 관련해서는
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용서는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가?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 자에게도 과연 용서가 가능한 것인가? 등의 질문을 남긴다
그런데 감독은 그 어떤 것에도 확실한 해답을 주지는 않고
관객들에게 숙제로만 남긴다
한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보며 혼란에 빠졌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그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신애의 모습
그리고 정작 피해자 본인의 용서는 구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 모든 것을 용서받았노라며
스스로 평안을 누리고 있는 유괴범의 모습에서
이해는 되지만 그러나 납득은 되지 않는
뭔가 이상한 하나님의 용서를 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는 ‘죄사함과 천국’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조직 폭력배 두목이었다가 감옥에서 회개하여 목사가 된 스토리가 영화화되기도 하고
80년대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던 사람이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누구나가 다 ‘이제부터 저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예수가 믿어집니다’라는 말 몇 마디에 마치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영웅처럼 교회에서 감격스러운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어떻게 몇 마디 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복음을 영접한다는 것, 말씀을 받아들인 다는 것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복잡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네 죄가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눈처럼 희어지리라’(이사야 1:18)는 성경 말씀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경은 절대로 사람에게 지은 죄를 하나님께 갚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죄지은 것을 갚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회개해야 할 것이 아니라,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도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 레위기 6장은 회개와 용서를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물건 피해를 당한 자에게 본래 물건만이 아니라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보상해 주어야만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날 성경을 믿고 따른 다는 기독교인들의 경우 이와는 너무 다르다
돈 들이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로 그냥 때우고 끝이다
실제 주변에서도 사업이 부도가 난 후 법적 처리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교회 장로님들이 수두룩하다
돈을 빌려준 수 많은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고통 받아도
이 분들은 오히려 교회에서 위로받고 아무 문제 없이 여전히 존경받는 장로님이다
이유는 단 한가지 하나님 앞에 통한의 눈물로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께만 해결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 ‘밀양’에서 하나님은 유괴범을 용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유괴범이 마음대로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해놓고는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셨다고 혼자 믿는 것일 뿐이다.
백 번 천 번 양보하여 그가 하나님께 용서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직 해결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
그는 여전히 자기의 행동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져 내린, 자녀 잃은 신애에게 아무것도 갚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용서로 인해 마음 편해할 것이 아니라, 피해를 당한 사람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이다. 물건이야 성경 말씀대로 오분의 일을 붙여서 보상하면 될지 몰라도 잃어버린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 속의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함께 사랑하시는 사랑이다
동생을 때려눕혀놓고 엄마한테 가서 용서를 빈다면 과연 그 엄마가 ‘그래 고백했으니 괜찮다‘ 하고 받아 주실까?
가서 동생의 사과를 받으라고 하지 않을까?
유괴범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 그는 죽은 아이의 어머니가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진정 원하시는 바이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3-24)
어쩌면 신애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단지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관심의 초점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신애처럼 초신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머물러 있다면 그 무엇을 섬기든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 기독교계에서 반발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신론자인 이창동 감독이 이 영화에서 반기독교적인 자기 생각을 표출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목사이지만 나는 이러한 비판에는 반대한다
감독이 기독교 자체를 폄하했다기보다는
우리나라 기독교인의 행태를 비판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싶은 것이다
즉, 한국 교회의 구성원들이 단지 교회에 잘 나가고 기도를 열심히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내려는 그런 종교 행태를 뛰어넘어
예수님처럼 자기희생의 삶을 몸소 실천하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영화에 투영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나 또한 이 영화가 신앙의 핵심은 빠뜨린 채 겉모습만 우스꽝스럽게 왜곡하여 표현한 것이 꽤 거슬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억울하지는 않다
사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모습이 현실의 모습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 속 신자들 대부분은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얻어내려고만 하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극 중 신애는 단지 오늘 날 이러한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