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세 암투병 중인 아내의 친구를 보며 빛과 소금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빛과 소금에 대한 비유 말씀은 예전에 한번 다루었던 말씀인데요
이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 이런 요구가 아니라
너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
이렇게 우리의 정체성의 선언에 관한 내용이라고
말씀드린 바 았습니다
사실 '빛이 되어라'와 '너희는 이미 빛이다'라는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건
지금은 그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니
사실상 '빛이 되어라'라는 말과 '너희는 빛이다'라는 말은
정반대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더 중요한 것은
빛이 아닌 것이 어떠한 노력으로 빛으로 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둠이 아무리 노력해도 빛이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애초에 빛이 아닌 것이 빛이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이는 마치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종과 자녀와의 비유와도 같습니다
종과 자녀는 본질적으로 다르기에
종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자녀가 되어라..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이미 자녀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말씀은
자신이 이미 자녀임을 깨닫고
그 깨달은 자가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라는 내용의 가르침이지
종이 열심히 노력해서
자녀가 되어라 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이 조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어떤 오해인가 하면
너희는 빛이니 빛이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선행을 할 필요도 없고
열심히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저 자유롭게 막살아도 되는구나 이런 오해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는
신약 성경 당시 사도 바울의 설교를 직접 들었던
당시 사람들에게도 빈번했던 일이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줄곧 주장했던 바는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 즉 당시 설교의 청중들이
늘 그들의 열심과 노력으로써
빛과 소금이 되어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구원이란 그렇게 마치 종들이 받는 삯이나 보상처럼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빛이고, 이미 소금이고, 이미 빛인 자들이
당연히 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 속에서 신학자들은 예정론이라는 교리를
이끌어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로마서의 내용은 복잡해 보이지만
정리해 보면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이신칭의) 내용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토록 뛰어난 논증을
직접들은 당시 사람들조차도
오늘날의 우리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아니...
구원이 우리의 선행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힘들게 노력할 필요도
열심히 살 필요도 없네?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네?..
이제부터는 내 맘대로 살아도 되는 거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너무나 명쾌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네 그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녀라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녀인 것과,
즉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과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 맘대로 막살아도 된다
라는 말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말입니다
좋은 포도나무에게서는 반드시 좋은 포도 열매가 맺어지듯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녀가 조금 삐뚤어지려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만 놔두질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는
부모 되신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도록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라면 몽둥이로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말씀이 바로
성도의 견인 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을 드려도
오히려 성경을 차근차근 꼼꼼하게 읽으시는 분들이
이에 대해 반박을 하십니다
그러면 목사님..
마태복음 5장 16절의 '너희의 착한 행실로 세상을 비추이게 하라'
그럼 이 말씀은 무슨 뜻이에요?
성도인 우리가 착한 행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가요?
자고로 성도라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모범을 보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뜻 아니냐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를 잘 들으신 분들 마저도
'목사님, 우리가,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이미 빛이다 이미 소금이다 이건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변한 건 없는 것 같아요..'
'빛이 되는 아니면 빛이든 간에
여전히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길 명령받고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빛이 되어라 와 이미 빛이다.. 이걸 따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이렇게 따지고 묻습니다
너무나 정확하고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사실 성도라면 이 정도 질문은 해야 정상입니다
'빛이 되어라, 소금이 되어라'가 아니라
'이미 빛이다 소금이다'라는 말이
여전히 착한 행실로 세상의 모범이 되어어야 하는
성도에게 무슨 차이가 있는가..
사실 이러한 질문은 한 가지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우리의 상식 속 빛과 소금은
언제나 찬란하게 비추이는 빛의 역할과
짠맛과 부패방지용도의 소금의 역할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로서
세상을 찬란하게 비추어야 하고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으로서의
착한 행실을 요구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쓰인 착한 행실에서
그 착한 이라는 말은 잘 살펴보면
이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착한 행실은
이런 일반적인 도덕행위하고는 좀 차원이 다른
단순히 착한 일 많이 해라
이게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착한 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헬라어는
아가토스와 칼로스가 있습니다
(사실 아가토스와 칼로스는 좋은 선한 착한의 뜻으로
번갈아 쓰이기도 하지만)
착한 행실 여기에 쓰인 헬라어가 칼로스인데
칼로스는 좀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이면서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선함
뭐 이런 걸 의미합니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선함>
성경에서 이 칼로스가 쓰인 용래들을 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히브리어로는 토브인데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는
이 좋았더라를 칼로스로 번역을 합니다
이건 어떤 구체적인 행위보다는
이건 하나님의 창조행위 자체의 어떤 근원적인 선함,
아름다움 이런 걸 나타내는 거죠
또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잖아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는 그런 자기희생적인 사랑
그걸 가리키거든요
이때 쓰인 선함은 칼로스입니다
그러니까 칼로스라는 게 그냥 인간적인 도덕률 잘 지키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이나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란 연결되는
훨씬 깊고 본질적인 선함입니다
우리가 그냥 흔히 생각하는
착한 일과는 확실히 좀 차원이 다른 개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의 예수님이 말씀하신 착한 행실이라는 건,
결국 인간의 어떤 윤리적인 노력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그 새 창조의 역사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
이런 본질적인 의미가 담긴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착한 행실인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때로는 고난이나 십자가를 감수하는 그런 삶,
바로 이런 모습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하심 자체가 바로 우리의 착한 행실이라는 거죠
그래서 착한 행실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막 손뼉 치고 환영하는 그런 선행하고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오해받거나
미움받을 수도 있는 그런 모습이라는 겁니다
착한 행실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깊어지게 되면
소금과 빛에 대한 이해도 당연히 달라집니다
먼저 소금에 대해 생각해 보면
소금이 그냥 뭐 부패를 막고 짠맛을 내는 기능
이걸 넘어서서 훨씬 더 중요한 상징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
특히 소금 언약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금 언약이란 소금이 하나님의 변화하지 않는 약속,
그리고 우리가 그 약속 안에 있다는 걸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소금으로 산다는 건
이 언약 안에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의 부패한 가치관과는 구별되고
때로는 어떤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정결하게 되고
소금의 맛을 잃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빛 역시 우리가 그냥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한 영향력 뭐 이런 거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참 빛이시잖아요
우리가 세상에 빛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 빛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빛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그 빛을 드러내는 것 그게 중요한데
이 빛의 역할은 그저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빛과 관련해서 성경은 등불 비유를 말씀하는데
이 등불 비유를 통해서
빛으로 사는 삶의 본질을 설명해요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는 목적이 뭘까요?
그냥 등불 자체를 막 자랑하려고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 빛으로 인해서
주위에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성도라는 빛이, 성도라는 등불이 드러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의 어떤 의로움이나 업적, 세상적인 성공
이런 게 아니라
오히려 등불처럼 혹은 등대처럼
자신이 아닌 상대에게 유익을 끼치는
낮아지고 섬기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처럼요
즉 빛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역설적으로 더 참된 빛을 바라게 된다
이런 의미가 더 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해 하면서
막 애쓰는 게 아니라
나의 존재됨을 혹은 나의 삶을 통해서
내 안의 성령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착한 행실이고
빛과 소금으로서 존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빛과 소금으로서의 모습이
우리의 삶 가운데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미스코리아가 되어 환한 모습으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라든지
화려한 시상식에서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빛과 소금으로서의 성도의 모습은
오히려 때로는 자기 부인의 모습으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의 순종의 모습으로
아니면 나의 실패나 연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이 드러나는
그런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 세상의 눈에는 무척이나 어리석거나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
우리의 낮아짐과 깨어짐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그분의 본질적인 성품과 능력이
가장 찬란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인간적인 강함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말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 인생을
주어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며 감사하게 여길 때
그 모습 가운데 하나님이라는 참되신 빛이
우리라는 질그릇을 통해 드러나고
영광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아내의 20년 지기 친구를 만나고 왔습니다
저희 부부가 유튜브를 시작한 이후
연락이 닿게 되어 아내가 줄곧 전화로만 연락하다가
최근 들어 암투병 사실을 알게 된 친구입니다
친구의 상태는 암이 재발되어 림프를 통해
장기 조직 전체가 전이기 된 상태로서
의사들은 시한부를 선고한 상태였습니다
너무 아픈 마음에 친구를 위로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그 친구를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위로는커녕 오히려 그 친구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참빛과 그분의 영광을 체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에게 암이라는 불치의 병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남편과
부모님과 자녀들을 오히려 걱정하며
오히려 이렇게 충분히 작별할 시간을 주시며 데려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 어떠한 죽음도 시한부 암환자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분히 작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고
정말 축복받은 죽음이라고 감사했습니다
그저 목사 앞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함을 고백했습니다
저는 아내의 친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무슨 말을 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저 친구가 밝게 웃으니 저 또한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어차피 인생이란 게 모두 다 시한부 인생인데
할부로 치면 24개월 할부나 72개월 할부
어차피 할부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찌 보면 짧은 할부가 더 나을 때도 있다는..
정말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환자 앞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말 같지도 않은 저의 농담에
박장대소하는 그 친구에게서
저는
사망에 네 쏘는 것이 무엇이냐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는 것 같아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성도 된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이
바로 이 친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끊임없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노력과 자기 소진의 압박감에서 벗어나서
이미 그러하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과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삶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 본질적인 의미의 착한 행실을 통해
여러분 스스로에게 한번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오늘 여러분의 신앙과 삶의 방식에
어떤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곰곰이 곱씹어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