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by 이동엽

오늘 설교 제목이

'다시 보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인 이유가

예전에 한 번 설교를 한적 있거든요


성경의 주제는 늘 한결같습니다

우리의 구원이죠

그런데 이 주제를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늘 새로운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번 설교에서 제가 강조한 부분은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이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질문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했으니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내 몸처럼 사랑할 대상이 누구인지 묻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이러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우리의 생각에

과연 그럴까? 하시며 반문을 제기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내가 선을 행해야 할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렇게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싱니라



그러고 보면 율법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 지를 분명 알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선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 교사는 구원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 청년도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청년 또한 구원이란 자신이 무엇인가 열심히 행하여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마태복음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죠

그래서 누가복음의 율법교사는

자신이 선을 구체적으로 행할 대상,

즉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를 물은 것이고


마태복음의 부자청년은

어떤 선한 일을 더 행해야 할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정확히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바꿔 말씀드리자면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내 힘으로,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사랑도 이와 비슷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성취해 내지 않습니다

부모 또한 자녀를 억지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취소되지 않고 영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구원의 모습은 관계 속에서 누리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내가 사랑을 베풀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다시 묻습니다


이웃은 내가 선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가 아니라

누가 과연 나를 이웃으로 받아들여 줄 것인가?

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그 삶 가운데 비로소 내가 이웃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 또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구원이란 내가 열심히 노력하여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백성의 반응은

뿌듯함이나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면목없음과 감사함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줄곧 행위가 아닌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비유 마지막에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라는 예수님의 결론 말씀 때문입니다


목사님, 내가 선을 행할 이웃을 찾든 아니면

나의 착한 행실을 보고 남이 나를 이웃으로 인정해 주든

결국은 나의 행함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결국 이 비유의 결말도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가서 행하라는 말씀 아닌가요?

야고보서 또한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지 않았던가요?

이런 질문들이 나와야 합니다


사실 오늘 설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번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단지

우리도 선한 이웃이 되자 이런 교훈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 비유속의 그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깨달아 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상징되는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유 말미에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하라'라는 말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가 아니라

강도 만난 자처럼 행하라

즉 거반 죽은 자처럼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으라는 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너 자신이 바로 저 강도 만난 자처럼,

거의 반 죽은 상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너에게 자비를 베푼 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여라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 라는 의미보다는

강도 만난 자의 자리에서

사마리아인의 도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

행위의 주체가 되려는 우리의 본성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실 이런 저희 설명에 많은 분들이 질문을 해 오셨습니다

정통 신학적인 관점에서 너무 떨어진

목사님 자신만의 주관적이고 사적인 성경 해석 아니냐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각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통적인 관점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성경을 꿰뚫고 일관성 있게 전해지는 메시지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줄곧

자신을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모습이

믿음의 참모습임을 강조해 왔고

아브라함의 삶이 바로 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모리야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장면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게 만든 모습입니다

참다운 믿음의 모습이고 동시에

철저한 자기 부인의 모습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자기 부인입니다


모리아산 사건 이전까지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까지

자기 꾀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의 씨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열심 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모리아산에서는 완전히 달라져있는

아브라함을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약속,

아들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과 완전히 모순되는 명령입니다

아들을 죽이면 언약이 그냥 끝나버리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같으면 절대로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거기서 자신의 이해, 자신의 판단,

자신의 생존 본능까지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명령에 그냥 순종합니다


그동안 숱하게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박영선 목사님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열심..이라 표현하신 바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리야산 사건은

단순히 아들을 바치는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순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는 이렇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브라함 개인의 열심과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신약에 와서 시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인해서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믿음이란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그분의 열심, 그분의 계획과 소원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의지,

이걸 바로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믿음이라고 보고


그리고 모리아산 사건은 그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 응답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완전한 자기 부인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이고

이러한 모습이 믿음의 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을 가지고

다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살펴보면

좀 더 명확해지죠


강도 만난 자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반 죽은 상태,

즉 완전한 무력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자신의 노력이나 자격, 선행 같은 걸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상태에 있는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다가와서

일방적인 자비를 베풉니다


우리의 완전한 무력함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베프시는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

이것이 바로, 구원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 또한

바로 이 자기 부인의 자리,

즉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리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나도 저 강도 만난 자처럼 거진 죽은 존재임을 알고

그 도움을 받아들여야지 하는 자리로 가라는 거죠


야고보서가 믿음의 증거로 제시하는 행함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덕적 선행과는 좀 다릅니다


야고보서가 대표적인 예로 든 인물이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이잖아요

아브라함의 행함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생명과도 같은 아들 이삭을 바침으로써

자기 자신을 죽이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행함이었고


그리고 기생 라합의 행함은

자기 민족과 자기가 살던 성,

즉 자신이 속한 세상, 여리고를

적에게 내어 준 배신 행위였습니다


결국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인간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본받을 만한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행위, 하나님의 행함에 대한

믿음의 반응으로서의 자기 부인을 보여주는 행함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야고보서가 말하고자 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열심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 모습은 결국 삶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때로는 이 모습이 우리에게 불행과 고난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실패자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인생이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차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원이란 이렇게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의 상태,

내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에부터

시작된다는 겁니다


당시 가장 보잘것없던 사마리아인

누구에게나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과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구원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진짜 모습은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상태로 쓰러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우리의 디폴트값이에요

거기서부터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서글퍼할 필요가 없어요

금수저나 흙수저나 할 것 없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그 모습으로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나 구원이 필여한 것이고요


그리고 그 구원이란 것이

나의 어떤 노력이나 특별한 열심을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

그 소식이 바로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인생 별거 없습니다

누구나 허덕허덕 살아갑니다

단지 어떤 사람은 먹고사는 문제에 허덕일 뿐이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또다시

죽고 사는 문제에 허덕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해 주신 복음은

그 먹고사는 문제, 죽고 사는 문제가 사실

별거 아니다


무거운 짐 진 채로 내게로 오라

내가 안식을 주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린아이처럼 믿고 받아들이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반면에 에이 그런 게 어딨어? 하며 돌아서면

그 자리가 바로 지옥입니다


이 모든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지면

괜찮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항상 지금이 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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