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가주망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_사르트르

by 이동엽


흔히 앙가주망 하면 ‘사회참여’를 떠 올리고 실존주의 철학을 떠 올린다.

실존주의 하면 바로 무신론적 지성인의 대표주자 사르트르가 생각이 나며... 점차 머리가 띵.. 해온다.


사실 앙가주망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단어이다. 영어로는 engagement.. 그렇다. 우리가 잘 아는 그 단어 맞다.. 약혼 ㅋㅋ (engagement ring = 약혼반지..)


그런데 이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아.. 그거... 하며 한쪽으로 밀어 제쳐 둘 만한.. 그런 개념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사물은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의자는 ‘앉기 위함’이 그의 본질일 것이고.. 그 본질에 충실하다면 소파가 되었건 통나무가 되었건 모두 ‘의자’인 셈이다. 그래서 의자의 본질인 ‘앉아 있기 위함’이 먼저 있고 그러고 나서 앉아있을 수 있는 모양(실존)을 갖춘다.


의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은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 벌과 메뚜기는 창조된 본질에 의해 실존한다. 메뚜기가 꿀을 모으지는 않고 벌은 메뚜기처럼 닥치는 대로 먹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 피조물.. 인간만은 예외다.

인간은 메뚜기처럼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고.. 벌처럼 꿀도 모을 수 있는 존재이다.

살인을 할 수 도 있고 성인이 될 수 도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먼저 ‘존재’ 한 후에..(실존한 후에..) 그러고 나서 ‘본질’을 규정해 나간다. 즉 실존이 본질을 앞서는 존재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래서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그래서 자신의 존재 이유마저도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어 나가야 하는 존재.. 무한의 자유를 지닌 존재..


이 무한의 자유는 동시에.. 인간을 얼마나 부담스럽게 만드는가..


그래서 인간은 무한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해 버리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규정된 제도와 종교.. (그렇다.. 특히 종교...)등.. 다른 것에 기대어버린다.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주체성을 너무나 쉽게 포기해 버린다.


사르트르는 이를 ‘자기기만’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진정한 인간’은 다른 것에 기대어 자신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진정한 인간’은 주변과 상황을 핑계 대지 않고 항상 주체적으로 삶을 마주한다.

사르트르가 생각한 진정한 인간 ‘실존’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주체적 모습이었다.


‘나 자신으로 사는 삶’.. 사르트르 사상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그들에 대한 배려는 나 자신의 삶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였을 뿐이다. (사르트르 철학이 싸가지 없다는 욕을 듣는 지점이 아마도 이 부분이었으리라.. )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한다면... 도덕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러던 중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은 사르트르의 관심을 다른 사람과 사회로 돌려놓는다.


전쟁이라는 집단적 폭력 앞에서 ‘앙가주망’(Engagement)’, 즉 ‘참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이 자유를 억누르는 세력과 집단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결코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후 사르트르는 행동하는 지성의 대명사가 된다.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는 모든 세력과 대항하여 싸우게 된 것이다. 그 상대가 정부가 되었던.. 종교가 되었건.. 그 어떤 권력이 되었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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