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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Nov 26. 2020

아 미치겠다 어린 왕자..

나이 50에 다시 읽은 어린 왕자


어렸을 때 분명 읽었을 책 <어린 왕자>를 집어 들었다. 다 아는 내용이라 생각하며 옛 추억을 떠 올려 볼 겸 뒤적이다가 급기야는 형광펜을 찾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나이 50줄에 동화책을 밑줄 그으며 읽게 될 줄이야..


사실 셍떽쥐뻬리의 어린 왕자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이 아니다. 다만 내용이 동화스럽고 삽입된 그림도 예뻐서 어린아이들도 좋아할 뿐이다.


나는 이 책을 참 좋아한다. 그동안 아마 대여섯 번은 넘게 읽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여운이 남아 내용을 곱씹으며 음미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책을 읽을 때마다 다가오는 부분이 달랐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초반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이야기라든지 무릎 높이에 오는 화산 이야기, 혹은 너무 빨리 자라서 없애지 않으면 조그만 별을 산산조각 낼 수도 있다는 바오밥 나무 이야기가 나의 어린 동심을 흔들어 놓았었다.


그러다 어른이 되어 사람들과의 관계에 이리저리 치일 때가 많아지게 되자

어린 왕자와 장미와의 스토리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깊은 메시지로 다가왔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네 장미가 너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은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이제까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 어린 왕자가

지구별에서 5천 송이나 넘는 장미를 발견하고는 풀숲에 엎드려 슬프게 울고 있을 때

여우가 나타나 해준 말이다.


사랑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나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싶다.


또 어떤 때에는 사막에서 만난 뱀과의 에피소드에서 무언가 신비로운 느낌을 전해 받기도 했다.

아마 처음 읽었을 때는 징그럽고 사악한 동물의 대명사인 뱀이 이 책에서 맡은 역할 또한 그 명성 그대로 사악하구나 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책에 직접적인 암시는 없지만 마지막에 어린 왕자가 뱀에게 물려 죽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읽어 본 <어린 왕자>에서는 뱀은 자신의 별을 떠나와 외로워하는 어린 왕자를 측은해하며 오히려 도와주려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나는 네가 가엾어 보여. 이렇게 약한 아이가 홀로 지구에 오다니. 네가 온 별이 그리워져 다시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든 내가 도와줄게."


죽음과 귀향, 독사의 사악함과 약한 자를 향한 동정심..  선과 악이 묘하게 헷갈리는 대목에서 한동안 생각에 잠긴 적도 있었다.


이제 나이 50줄에 목사가 되어 다시 읽게 된 어린 왕자는 나에게 새로운 부분에 밑줄을 긋게 만들었다.


여우와의 대화였다.



의식은 어느 시간을 평소의 시간보다 특별하게 해..

5천 송이의 장미를 발견한 후, 외로움과 실망감에 빠져 풀숲에 엎드려 울고 있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나타난다. 어린 왕자는 외로우니 친구 먹자고 한다. 그러나 여우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여우는 말한다. 우리는 길들인 것들만을 알 수 있다고.


도대체 길들인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설명해준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서로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인내심이 필요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 말은 수많은 오해의 원인이 되거든.."


"매일 같은 시각에 오는 게 좋을 거야.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4시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중략)

"그런데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잖아. 그래서 '의식'이 필요한 거야"


의식이 뭐냐고 묻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답한다.


"의식이라는 것은 어느 날을 평소와 다르게, 어느 시간을 평소의 시간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거야."


바로 이 부분에서 나는 급하게 형광펜을 찾기 시작했다.

의식이라는 것은 어느 시간을 평소의 시간보다 특별하게 만든다는 작가의 생각이 마음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예배의 의미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후 나는 단 한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예배를 했다. 그러나 30년이 넘도록 예배에 참석하면서 때로는 기쁨과 감격에 찬 순간도 있었지만 한창 뜨거웠던 초창기 시절을 제외하면 거의 습관적으로 주일 예배 시간을 지켜왔던 경우가 그렇지 않은 때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목사가 된 이후로도 그리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설교 준비와 목회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모든 예배 시간이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쁨과 감격에 찬 예배 시간보다는 그렇지 못한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동안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신학교에서 예배론에 대해 정식으로 배우기도 했고 예배와 목숨을 바꾼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예배란 무엇이며,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가슴으로 동의할 만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하듯이 습관적으로 주일이면 예배 시간에 참석했다. 마치 눈뜨면 학교 가는 것이 당연한 학생들처럼 말이다.


우리가 주일 오전 정해진 시간에 (대개는 오전 11시..) 예배당에 모여 행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예배 의식(ceremony)이다. 본질적 예배는 반드시 주일 오전 11시에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진정한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으로서의 예배는 '주일'이라는 특정한 시간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의식'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우쳐주고 있었다. 여우가 설명하는 '의식'의 의미는 너무도 자명했다. 설레임이다.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4시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여우는 밀밭과 아무 상관이 없지만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왕자와 관계를 맺게 되면 그 순간부터 밀밭의 황금빛 출렁임에도 여우는 설레게 된다고 말한다. 어린 왕자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예배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혼돈스러워했던 나에게 여우의 이 말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물론 각 교단마다 저마다의 예배의 정의가 있고 그 중요성과 당위성에 대해 나름의 근거와 주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목말라했던 것은 그러한 신학적/교리적 설명이 아니라 가슴으로 동의할 수 있는 예배의 의미였다. 예배 때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왜 그 시간을 지키는 것이 목숨과도 바꿀 가치가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그 답에 대한 마음속 깊은 동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여우의 대답으로부터 깨닫게 된 예배의 의미는 '관계'였다. 의식은 단순한 형식의 의미를 넘어서 대상에 대한 설렘을 품고 있을 때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대상과의 관계가 의식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조금 더 진지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작가의 통찰이었다.



예배는 관계에 관한 것


기독교인이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관계가 너무도 중요해서 자신의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주일 오전의 예배 시간은 그 특별한 대상과의 약속된 시간이다. 그 관계를 확인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 주일 전날에는 마음이 설레어야 한다. 이것이 너무 심하다면 최소한 주일 오전 예배 30분 전부터라도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한다. 관계를 맺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 예배 시간에는 과연 어떤 깨우침이 있을까? 어떤 은혜가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배당 풍경은 이런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대개는 예배당 문이 닫히기 직전에 허겁지겁 들어서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파이널 선 끊듯이 닫히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와 안도의 숨을 내 쉬며 "휴 다행이다. 아직 설교 전이네.." 하는 모습은 주일 오전이면 어느 교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요즘처럼 팬데믹으로 대면 예배를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선 다행히 그런 풍경은 찾아보긴 힘들지만

대신에 많은 신앙인들이 예배자의 모습에서 시청자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변하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팬데믹 이후에도 사회가 예전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학교도 직장도 이제는 언택트 시대에 맞게 변해야 된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온라인 예배는 시대의 흐름이고 이제는 신학도 그에 걸맞은 예배론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앞으로의 시대가 '언텍트 사회'가 되리라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그러니까 온라인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반대한다.


보건 당국이 팬데믹으로 대면 예배를 금했던 것은 예배에 대한 조치가 아니라 '대규모 모임'에 대한 조치였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러한 조치에 수긍했던 이유는 예배가 '대규모 모임'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펜데믹이 걱정된다고 해서 가족 간의 모임이나 사적인 교제, 데이트 등을 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본래의 예배는 서로 하나 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친밀한 사람들이 함께 행하는 '의식'이었다.


언택트 시대에 예배 모임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대규모 모임이지 예배 의식 자체가 아니다. 예배 의식은 결코 온라인으로 대체될 수 없다.


대규모 모임이 규제가 된다면 대규모 예배를 피하면 된다. 소규모 가정 단위로 모여 초대 교회가 그러했듯이 사도들의 편지글(신약성경 서신서)을 읽으며 그 의미를 되새기면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또한 예배에는 반드시 성도 간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 삶의 나눔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참된 교회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 그저 설교 말씀 듣고 은혜받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는 소리다.  


교회의 살 길로써 온라인 예배 운운하는 것은 예배의 본질을 깊이 생각한 대책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대규모 교회 조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일부 종교 기득권자들의 몸부림에 가까울 것이다.(나는 지금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처지에서 온라인으로 예배 중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배 자체를 예배해서는 안된다. 의식으로서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위한 하나의 도구요 수단일 뿐이다. 우상 숭배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도구와 수단을 본질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예배를 강조하는 것이 우상 숭배와 무슨 관계가 있겠나 싶겠지만

성경의 대표적인 우상숭배 사건이었던 아론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아론은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르며 자기 나름대로의 예배를 행했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의식의 본질은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의식을 행하게 되면 어느 평범한 시간이 특별한 시간으로 변하게 된다.

그 특별한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의식이다.

예배 시간을 통해 주일 오전의 평범한 시간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시간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그렇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데이트 시간이 그렇다. 약속을 정한 후 정작 만나서 하는 것은 별것 없다.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함께 밥도 먹고 그동안 쌓인 이야기도 하고 그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긴다.. 관계를 쌓아간다.


그러나 그 약속시간이 다가올수록 설레임이 커진다.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어떤 말을 나눌까? 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설레는 시간 자체가 행복한 시간이고 의미 있는 시간이다.


우리의 예배 시간이 바로 그렇다.   


나이 50에 동화책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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