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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Dec 10. 2020

예수 믿으세요? 란 말은 무슨 뜻일까?

도대체 뭘 믿는 거야?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실은 한 번쯤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믿는다는 것은 마치 자기가 탄 버스가 부산행인지 목포행 인지도 모르고 버스에 오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 도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 막연한 것 같지만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예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이며 신적인 존재임을 믿고 그를 숭배한다는 뜻일 테고  

반면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살아 생전 주장했던 말이나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일 것이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당연히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섬긴다. 그와 동시에 그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따른다. 그러나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냐를 물었을 때는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살펴보면 기독교는 언제나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그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무게중심을 두어왔던 것 같다. 기독교의 태동 시기에 가장 중요했던 논쟁이 바로 예수의 신성에 관한 삼위일체 논란이었으니 말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니케아 종교회의(AD 325) 때 벌어진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사이의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아리우스는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최고이자 최초의 창조물이긴 하지만 피조물이었기에  영원치 않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동격의 신'이라는 동일 본질론을 주장했고 그의 주장은 기독교 교리의 근간인 삼위일체설로 굳어졌고 동시에 예수의 피조성을 주장했던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후  예수가 곧 하나님임을 부인하는 모든 주장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야만 했다. 제아무리 예수의 훌륭하심과 그의 가르침의 정당성을 설파한다 하더라도 예수의 하나님 되심에 조금이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산채로 불에 태워져야 했다. (난 가끔 교회사를 공부하다가.. 과연 예수님께서 자신에 정체성에 관한 의견 차이로 서로 간에 산채로 불태워 죽이는 종교인들을 보면 뭐라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단은 무섭다. 호환 마마 천연두 보다도 무섭다고들 한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신천지, JMS, 오대양 사건등 수많은 이단 사이비에 의해 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그로 인한 피해의식 때문에 정작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을 중요시하는 것은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그의 가르침이 공의와 사랑에 어긋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과연 믿어야 할까 생각해봐야겠지 않을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이 좀 더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수많은 이단 논쟁이 있어왔고 여기에는 항상 피 비린내와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었다.

그리고 논쟁의 쟁점은 언제나 그의 가르침보다는 예수가 하나님이냐 아니냐가 주된 이슈였다.


물론 여러 면에서 이단 논쟁이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는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주된 관심은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느냐 아니냐가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의 관심은 언제나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에 있다. 흔히 이단 논쟁의 정당성과 관련해 생각하는 우상숭배의 죄도 실제로는 이단 논쟁과는 별 상관이 없다.


성경이 꾸짖는 우상 숭배는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한 질타이다. 전혀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본질인 양 호도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에 대한 꾸짖음인 것이다.


우상은 '아이돌'이다. 즉 인형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이 마치 실재하는 대상이며 우리에게 복을 주는 신이라  생각하고 섬기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우상숭배인지 아닌지를 가늠해 보려면 우리가 그 우상을 왜 믿는지, 왜 섬기는 지를 따져 보면 된다. 그 우상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려는 건지.. 아니면 그 우상을 전능한 신으로 믿고 그에게만 잘 보이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믿는 것인지를 따져보면 된다.


마찬가지 논리로 우리가 만일 예수가르침을 믿고 따르기 보다는 그를 그저 복을 주는 신으로만 믿고 숭배한다면 이는 단연코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사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형인 아론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뒤 시간이 흘러도 내려오지 않자 동요하는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고자 금송아지를 만든다. 그리고 그가 백성에게 하는 말이..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출애굽기 32장 4절)


비록 금송아지를 만들었지만 그들이 섬기고자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는 다만 그들이 가진 가장 값진 것이 금이었고 또한 애굽에서 나서 자라난 이들에게 익숙한 신의 형상은 송아지였기 때문에 금송아지를 만든 것뿐이지 지금의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우상숭배를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의도는 명백했다. 금송아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모면해 보려 했던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라 부르고 섬긴다 할지라도 그로부터 오는 어떤 이득이나 대가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인 것이다.


성경의 기록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우상 숭배에 취약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우상숭배란 것은 단지 타 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이 아니다.  우상숭배는 단지 내가 '나의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의해 판단될 수 있을 뿐이다.


목사로서 나는 가끔 내 앞에서 타 종교와 그들의 업적에 대해 폄하하고 험담을 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가 있다. 내가 목사니까 일부러 나를 위해 그러는 것일 수 도 있겠다 싶지만..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현재의 기독교 세계관이 너무나 안타깝다.


성경은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간디나 법정 스님이 원수보다 못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서다.


신학적으로 얼마나 더 원숙해져야 나도 그들을 다르게 평가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예수를 사랑했던 간디나 무소유를 주장하고 실천했던 법정 스님이 종교 재판장의 성직자들보다 훨씬 더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보여진다. 최소한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따른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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