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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Jan 02. 2021

동네 뒷산에 올라 타이타닉호를 생각하다

날아라 지구호..

동네 뒷산에 올라 타이타닉호를 생각하다

가족들과 함께 동네 뒷산에 올랐다. 뒷산이라고 얕보면 안 된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다. 멀리 태평양도 바라보인다. 내가 사는 동네가 해발 400미터 정도 되니 600미터 정도를 오른 거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LA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 태평양 바다의 수평선도 보인다. 차로 가도 1~2 시간 걸리는 바다를 동네 뒷산에서 내려다보니 신기하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기막히게 아름답다.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

탁 트인 자연이 선사하는 청량감에 그저 '좋다'라는 말 외엔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문득 내가 지금 올려다보고 있는 저 하늘이 바로 우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우주는 깜깜하다. 그래서 하늘이 새까맣게 보여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지구라는 행성의 태양 빛을 받는 면 위에 서 있기에 우리가 낮이라고 부르는 이 짧고도 특별한 시간 동안 파란색의 아름다운 우주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 난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낮에 나온 달을 관찰한 적이 있다.  달은 정말 낮에 봐야 제 맛이다. 그 맛에 취해 혼지 공원에 서서 목을 뒤로 꺾은 채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푸른 하늘에 둥실 떠있는 둥근 천체. 그 달의 어두운 반 쪽을 바라보며 만약 저곳에 우주인이 착륙한다면 그는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 난 지금 그 우주인의 밤을 바라보고 있는 거네.. 거 참 신기하다. 가만있자 그렇다면 그 우주인이 깜깜한 밤에 바라보는 지구, 그 지구의 밝은 반쪽에 서 있는 나.. 이렇게 서로의 낮과 밤을 바라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미친놈처럼 헤벌레 신기해 했다. 그러다가 '뭐야? 그럼 지금 난 저 달처럼 우주에 둥둥 떠있는 거야?'라는 생각에 혼자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지구라는 행성 위의 나. 우주라는 광활하고 어두운 공간 속을 지구라는 행성을 타고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나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 불과 몇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이처럼 우주적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을 한 사람은 지구 상에 없었을 듯하다. 


갑자기 타이타닉호가 생각이 났다. (아니 정확히는 디카프리오가 뱃머리에서 로즈와 함께 팔을 벌리고 바람을 가르던 그 장면이 생각났다)


영화 속에 타이타닉호는 하나의 거대한 세상이었다. 그 안에는 화려환 무도회장과 수영장, 극장, 식당 등 모든 시설들이 갖추어 있었다. 그 속에는 또한 온갖 삶을 만들어 내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화려한 귀족들의 삶이 있는가 하면 배를 움직이는 기관실에서 노동을 하며 일이 끝나면 배 밑의 허름한 공간에서 춤 파티를 벌이던 노동자들의 삶도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영화의 압권은 타이타닉호의 침몰 장면이었다. 영화는 배안에서 일어나는 인간군상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서서히 배의 침몰을 향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절대 침몰할 것 같지 않던 거대한 초호화 유람선이 마침내 두 동강 나며 거대한 바닷속에 가라앉던 장면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 정상에서 갑자기 타이타닉 호가 생각난 건 무슨 까닭일까? 

인간은 누구나 높은 곳에 서게 되면 생각이 깊어진다고 한다. 아마 시야가 넓어지니 덩달아 사고의 폭도 넓어져서 그런 것 같다. 산 정상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다 언젠가 낮에 나온 반달을 보며 화들짝 놀랐던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나는 지금 타이타닉 호처럼 지구라는 커다란 행성을 타고 우주를 떠도는 한 사람의 승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삶 가운데 지지고 볶을 때에는 전혀 실감 나지 않더니 이렇게 높이 올라 멀리 수평선과 머리 위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니 나 또한 지구라는 행성에 탑승한 승객으로서 우주에 두둥실 떠 있다는 사실이 마구 마구 납득되는 것이다.


만일 인류 전체가 한 배에 탄 승객처럼 지구라는 행성에 탑승한 승객이라는 깨달음이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지금처럼 쓰레기를 마구 마구 생산해 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처럼 아무 생각 없이 공해를 뿜어 내지는 않을 것이다.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다.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좀 더 세심하게 조심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기가 탄 배에 손상을 가할만한 가능성이 있는 일들은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의 결과가 고스란히 자기에게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더 이상 그 안에 승객들은 따로따로가 아니었다. 침몰하는 배안에서는 더 이상 귀족과 노동자, 선장과 선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별이 소용없었다. 그들은 단지 타이타닉호의 승객이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삶과 죽음을 함께 맞이해야 할 운명 공동체였다.


간혹 이 사실을 잊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레 집 밖으로 쓰레기를 버리게 된다. 공장이 매연을 뿜어내고 아마존의 삼림이 황폐되고 남극의 빙하가 녹아내려도 나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의 이웃들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남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스스럼없이 나와 남을 구분하고 그들보다는 나의 이익에 우선한다. 남의 아픔에 무관심하게 된다. 그러나 조금만 더 넓게 생각해 본다면 모든 시설이 완비되어 있는 초대형 유람선 안에서의 삶과 평소 직장과 마켓, 기껏해야 주말에 영화관이나 다니는 일상에서의 삶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타이타닉호의 침몰 원인은 배가 작은 빙산에 스친 후 생긴 조그마한 구멍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누구도 그만한 상처에 거대한 최첨단의 배가 침몰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멍이 커지고 물이 차기 시작하고 배의 여기저기에서 이상 증후들이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배의 침몰을 막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지구호의 여기저기에 이상 증후들이 보이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빙하의 붕괴, 이상 기후로 인한 홍수, 산불 거기다 지금 펜데믹까지 모든 면에서 지구호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구호 승객들은 설마 이 거대한 행성이 무너지겠어? 이러다 말겠지.. 하며 무관심하다. 


설령 간혹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만은 위기를 피해 안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하다. 마치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먼저 구명정에 올라 안도의 숨을 내쉬던 얌체 승객처럼 말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만일 지구호가 침몰한다면 이번에는 그 구명정을 구조하러 올 구조선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미래학자들은 지금 이대로 지구 환경이 방치된다면 지구는 재앙을 맞이 할 것이라고 말한다. 허기사 지구 종말론을 믿는 목사로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을 믿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황스러운 점은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각종 지표가 그 종말의 날이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세대에 올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약성경의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매우 현실적인 충고로 들린다. 왜냐하면 이웃을 나의 생존과는 전혀 상관없는 남으로 생각하는 한 지구의 종말은 한층 더 가까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운명 공동체로, 한 몸으로 생각하는 길만이 나와 나의 가족, 나의 후손을 사랑하는 길인 것이다. 


나의 집과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집 밖에 내다 버린 쓰레기가 결국에는 내가 사는 지구 위에 썩지 않고 쌓이게 된다. 나의 편리와 만족을 위해 싼 값에 구입하는 수많은 공산품들은 그것을 생산하는 자본가들에게 낮은 단가를 맞추기 위해 환경을 무시하도록 부추긴다. 결국 그들이 흘려 내보내는 공장 하수와 산업 폐기물은 고스란히 내가 탄 지구호의 한편에 쌓여 언젠가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중국발 미세 먼지는 그들의 값싼 공산품을 마구 마구 구매하고 편리하게 사용한 대가일 뿐이다. 그들이 중국인이건 인도인이건 누구라도 물건이 팔리는 한 계속 만들어 낼 것이며 그토록 싼 물건을 만들면서 그들이 환경보호에 신경 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자는 거창한 구호를 외치기 전에 먼저 우리들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지구호에 함께 승선한 탑승객의 한 명으로서 지금 나 자신의 생활 습관을 살펴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라고?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지 말기 바란다. 오히려 물어야 할 질문은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는가?'이다.


자신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도 배려하지 못한다. 환경보호는 지구를 살린다는 거창한 목표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다. 단지 나 자신이 깨끗한 환경 속에서 행복함을 느끼는지 아니면 더럽고 오염된 환경 속에서 행복한지를 따져보면 된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주변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지구 환경은 몰라보게 나아지게 될 것이고 그속의 나의 이웃들도 행복해 질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자신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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