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 형, 사는 게 왜 이래?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by 이동엽

인류 역사상 최초로 행복에 대해서 포괄적이고도 체계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닐까 한다. (아님 말구..)


참으로 대단한 아리스토텔레스다. (소크라)테스 형도 “사는 게 왜 이래?”라는 질문에 속 시원한 답을 못해주는 마당에 그의 손자뻘 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이 ‘사는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한 권의 책으로 떡 하니 써 놨으니 말이다.


그 유명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왠지 제목부터가 하염없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책이다.


그러나 실상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무척이나 논리적이고 단순(?)하다. (‘니코마코스’라는 제목은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 학당에서 강의한 행복에 관한 논설을 그의 아들인 ‘니코마코스'가 정리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각설하고,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 질문인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먼저 전략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곧바로 '행복'이라는 거대 담론에 뛰어드는 대신 슬쩍 우회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잽을 날리는 것인데 그 질문이 이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삶의 궁극 목적을 찾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다만 그 '궁극의 목적'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이 있다


그 두 가지 조건이란 다름 아닌 ‘궁극성’과 ‘완전성’인데

궁극성이란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고

완전성이란 무엇인가 보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조건을 갖춘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궁극적 목적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

그 궁극의 목적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은 궁극성과 완전성인데

이 두 가지를 갖춘 것이 행복이다.



이렇게 먼저 잽을 날려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논리적인 답을 가뿐하게 도출해 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 단계를 밟아 나간다. 그러면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답하기 위해 행복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살펴보고 이를 하나하나 비판해 나간다. (참으로 논리적이다)


우선 '행복'의 후보로서 첫 번째로 도마 위에 오른 희생양은 ‘쾌락’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이 곧 행복이라는 견해에 대해 이것은 노예나 짐승의 목적은 될 수 있지만 인간의 목적은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탈락!


두 번째로 ‘명예’다. 쾌락보다는 쪼끔 있어 보이지만 ‘명예’는 주체가 그것을 얻는 사람보다는 주는 이에게 달려있는 것임으로 탈락. 인생의 궁극 목적이 피동적인 것이 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쩝.. 할 말 없다)


세 번째로는 ‘덕’이다. 오호 이것은 명예보다 훨씬 더 있어 보인다. 그러나 덕이 발휘되지 않을 수 도 있고 또 덕 있는 사람이 비참한 생애를 보내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것도 탈락! (바로 소크라테스가 그러지 않았던가!)


네 번째 후보 ‘재산’.. 이것은.. 바로 탈락 (재산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일 뿐..)


마지막으로 ‘선의 이데아’.. 이건 좀 어렵다. 스승 플라톤이 말한 궁극 존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탈락! 왜냐하면 이는 너무 막연하여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을뿐더러 설령 있다 해도 현실적인 행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견해를 나름대로의 논리로 비판한 후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결론은.. '행복이란 정지된 어떤 상태가 아니라 활동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잘 산다’는 것이고, 잘 산다는 것은 어떤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삶의 연속적 과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호 제법 말이 된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풀어서 설명해 준다. 즉 '잘 산다는 것'은 인간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능을 세 가지로 나누어 탐구해 본다.

첫 번째로는 먹고 싸고 번식하는 생물학적인 기능이다. 근데 이것은 인간만이 지닌 기능이 아닌 모든 생명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기능이므로 인간의 기능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두 번째로는 희로애락 등의 감각적 기능이다. 이 기능 또한 식물에게는 없지만 동물에게는 일정 부분 존재하는 기능이므로 인간 고유의 기능이라는 할 수 없다.


세 번째로 ‘이성과 사유’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 번째 기능이야 말로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자 본질적 기능이라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은

'행복'이란 잘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은 '인간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인데

인간의 본질적 기능은 ‘이성과 사유’ 이기 때문에

사유를 통해서 관조하는 삶을 살아야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서 과연 천재답게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마디 덧 붙이기를..


“한 마리의 제비가 여름을 불러오지 않으며 하루의 맑은 날씨가 여름을 만들지 못하듯이” 한 두 번의 이성적 생각과 사유가 행복한 삶을 만들지는 못한다고 못 박는다. 즉 일생을 통하여 '한결같이' 이성을 발휘해야 비로소 행복이 얻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서 중요한 말은 ‘한결같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


여기까지 오면 행복에 대한 답이 거의 구해진 것 같지만 사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주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처음 시작은 '행복'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윤리학’ 즉 ‘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그 본질적 기능인 '이성'을 ‘한결같이’ 발휘하기 위해서는 ‘경향’ 내지는 ‘습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습성’이 곧 ‘덕’이라는 것이다. (타고난 품성이라기보다는..)


그리고 이 ‘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하다. ‘이론적인 덕’과 ‘실천적인 덕’이 그것이다.

이론적인 덕이란; 사물의 이치를 인식하고 항상 올바른 행동을 계획하는 지적 능력이고

실천적인 덕이란; 이성의 인식과 계획을 따라서 늘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행동의 능력을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또다시 '실천의 덕'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답을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덕의 실천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첫 번 질문 ‘실천의 덕은 어떻게 생기는가? 이에 대해 ‘실천을 통하여’라고 답한다. 즉 실천의 덕은 행동과 습관에 의하여 생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덕’의 기본적인 특징에 대해 묻는다. 왜냐하면 이 특징을 알아야 덕의 습성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에 대하여 ‘중용’이라고 답한다. 즉 사람의 감정과 욕구에서 지나침과 모자람의 양 극단을 피하고 이성의 통제력이 언제나 어김없이 발휘되는 경향(중용)이 곧 실천의 덕이라는 것이다. 말은 좀 어렵지만 예를 들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사람이 위험에 빠지면 너무 겁을 먹거나 혹은 지나치게 공격적이 될 수 있는데 이 두 극단을 피하여 중용을 얻으면 곧 '용기'라는 덕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의 질문은 '사람이 어떤 경우에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써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는 '고의적' 행위인 경우이고, 이때의 '고의적 행위'란 누군가에게 강요당하거나 모른 채 행하지 않은 모든 행위를 말한다.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덕의 중용'은 행위의 결과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이유에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즉 책임 문제는 행위의 이유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록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덕'이 일종의 '경향' 내지는 '습성'이며 실천과 행동을 통하여 생긴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실천의 덕보다는 '이론의 덕'이었다. 왜냐하면 결국 사람이 덕을 실천하도록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그의 이성에 있는 것이고 그 이성의 본성에 따라 활동할 때 인간은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행복이야말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행복한 삶이란?


지금까지의 논지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성과 사유를 통해 바르게 판단하고 이를 의지를 통해 (한결같이) 실천하는 삶이야 말로 덕스러운 삶이고 곧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렇게 몇 줄로 가볍게 요약될만한 책이 결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말년의 원숙한 도덕 철학적 사상이 집대성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저적물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이든 서양이든, 고대이든 현대이든 간에 사람의 사고의 틀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몇 줄로 간추려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성경을 연구하는 목사로서 나 또한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철학자'와 목사는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 또한 삶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전하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 곧 행복에 관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목사이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 그저 '믿쓥니다' 만을 외치게 만드는 설교보다는 행복을 위해서 어떠한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하는 지를 논리적으로 설복시키는 철학자의 논증이 훨씬 더 은혜롭게(?) 들린다. 사실 예수께서도 단순히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과 행복이 보장된다는 식으로 복음을 가르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께서 심혈을 기울여 전한 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한결같이'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나와 남을 구별된 존재로 여기지 말고 한 몸처럼 여기라는 것이었다. 즉 행복은 나 혼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진정한 행복은 행복한 사람들에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가르치셨다.


'교회'라는 말 자체가 공동체를 전제로 한 말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곧 행복한 삶의 비결인 것을 '이웃 사랑'이라는 단순한 한마디 말로 표현하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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