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짜장과 짬뽕을 내맘대로 선택할 수 있을까?

자유의지? 단순한 반응? feat. in the 중국집..

by 이동엽


우리의 수많은 선택은 과연 우리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반응에 불과한가?


우리는 중국집에 들어가서 당연히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짜장면과 짬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의 선택은 단지 중국집 메뉴판을 본 후 우리에게 나올 수 있는 제한된 반응 중의 하나일 수 있다. 마치 컴퓨터의 알고리즘처럼 말이다.


알고리즘은 그저 여러 선택지들 중 조건이 맞는 하나에 반응할 뿐이다. 다만 선택의 여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그런 선택이 여러 번에 걸쳐 빠르게 일어나면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리즘을 인공지능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리즘을 가리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알고리즘은 그저 계산을 실행하기 위한 단계적 절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단 중국집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의 선택지는 중국 음식으로 제한된다 (중국집에서 김치찌개나 스파게티를 선택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함께 한 동료들이 무엇을 주문하는 가에 따라 또 한 번 우리의 자유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부장님이 짜장면을 시키셨는데 유산슬을 주문할 패기 있는 자는 별로 없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선택한 짜장은 진정 나의 순수한 자유의지의 결과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나의 짜장에 대한 선택은 "중국집에선 역쉬 짜장이쥐~" 를 2번 연달아 외치신 부장님의 주문 뒤에 나온 생존을 위한 나의 당연한 '반응'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짜장과 짬뽕의 선택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인생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모든 일과 맥락을 같이한다.


혹자는 처음부터 중국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선택하면 되지 않느냐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맥락이 바뀔까?

선택의 범위만 조금 더 넓어졌을 뿐 우리는 여전히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집과 한식집 그리고 분식집의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아직도 점심을 거를 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있지 않느냐고?

글쎄다.. 범위를 우주적 차원으로 무한정 넓혀 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우주'라는 제한되고 유한한 구조 속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제한된 구조속에선 완전한 자유의지의 실현이 불가능하다 (사실 지구라는 행성 위를 살아가는 생물 종으로서 대기권의 공기를 호흡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느끼는 자유, 자유의지라는 것은 사실은 수없이 많은(그렇지만 여전히 제한된) 선택지에 둘러 싸인 사회적 구조 속에서 그렇게 밖에는 행할 수 없는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와 구조주의>


한때 실존주의 철학과 구조주의 철학이 서로 맞선 적이 있었다.


실존주의자들은 본질에 앞서는 '실존적 자유'를 이야기했다

'인간은 저주스럽도록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이다


한편 구조주의자들은 실존주의자들의 자유를 비웃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구조 속에 갇힌 제한된 자유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일까?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실존적 자유는 한 마디로 짜장과 짬뽕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우리는 능히 그럴 수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실존적' 존재라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다.


반면에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는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구조 속에 갇힌 존재이며 그를 둘러싼 구조의 영향 아래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철학자들의 이러한 논쟁이 어떻게 끝맺었는지 난 잘 모르겠다

아마도 모든 철학 논쟁이 그렇듯이 아직까지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다만 목사로서 나는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철학적 논쟁이 기독교 교리사에서의 '자유의지'와 '노예의지'의 논쟁과 닮아 있어 흥미로울 뿐이다.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은 종교개혁 당시 에라스무스로 대변되는 인문주의자들의 '자유의지론'과 닮아 있다

반면 구조주의자들의 입장은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선을 행할 의지 자체가 없다'는 루터의 '노예의지론'과 궤를 같이한다.



<자유의지론 VS 노예 의지론>


마르틴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둘 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마틴 루터는 수도사였고 에라스므스는 타고난 천재였다. 종교개혁 당시 두 명의 뛰어난 사상가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다. 둘 다 썩어가는 로마 가톨릭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들로서 이를 바로 잡아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먼저 루터는 이미 당대에 커다란 명망을 얻고 있던 뛰어난 석학 에라스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당시 숨어 지내며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라틴어와 고전에 뛰어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참조하며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명망 높은 석학의 지지를 얻어낸다면 자신이 수행할 종교 개혁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지지를 호소한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호소를 정중히 거절한다. 왜냐하면 에라스무스에게는 중용과 평화 그리고 하나됨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 카톨릭과의 투쟁보다는 화해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라스무스는 비록 루터의 종교개혁 자체에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평화와 하나됨이 깨진다면 이는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이러한 에라스무스를 의지박약과 소심한 성격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회피한다고 비난했고 이때부터 이 두 사상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이 서로 날을 세운 대표적인 논쟁이 바로 <노예 의지론>과 <자유의지론> 사이의 논쟁이다. 각각 자신의 신념대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을 피력한 것이다.


루터의 노예 의지론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 없이 행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악하기에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 즉 자유의지가 없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후 인간에게는 오로지 악을 추종할 수 있는 제한된 자유(노예 의지)만이 허락되었을 뿐이라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다.


에라스무스는 이에 반박하며 인간에게는 온전한 의미의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이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주는 지식적 차원의 것이기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선과 악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유의지를 선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극복해 나가는 믿음의 경주와 같은 것이었다.


<화해>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생각은 어떤 식으로 종합될 수 있을까?

먼저 철학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 논쟁은

'존재에 대한 자각'에서 그 화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사르트르는 그의 대표적 저서 '존재와 무'를 통해 인간의 자유는 '무 nothing'에 근거한다고 했다. '무'란 그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라는 개념이 의자나 잉크병처럼 본질이 이미 정해져 있는 어떤 것들, 즉 자유가 없는 것들을 나타내는 개념인 반면에 '무'라는 것은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는 존재, 즉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만 하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소리다. 결국 인간 만이 본질에 앞서 존재하는 존재이고 (실존적 존재), 본질을 만들어 나가는 존재이며 (대자적 존재; for itself) 그만큼 자유로운 존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부정했던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은 이미 확고하게 전제된 구조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무'의 상태를 결코 경험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자신들의 주장이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인간을 (자신이 속한 '구조의 변화'를 추구하고 이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인간 역사의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 '의지를 지닌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철학자 강신주는 1500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두꺼운 책 <철학 VS 철학>에서 바로 이 부분에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가 서로 화해할 수 있는 틈새가 발견된다고 했다. '구조의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간에 기존의 구조를 벗어나야 하는 순간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구조를 벗고 새로운 구조에 편입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비록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무'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고 이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스러울 수 있는 상황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자가 실존주의자의 자유를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부분이다.


무슨 궤변처럼 들리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모든 것이 그렇다. 최신 과학이론의 선봉에 서있는 양자물리학을 들여다 보아도 마찬가지다. 양자 물리학은 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과학이다. 도저히 쪼개지지 않을 것 같은 원자를 쪼개고 들여다보면 그 속에 원자핵과 전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전자들이 존재 상태가 바로 순간적이며 찰나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점멸하는 전구처럼 존재와 비존재(무) 사이를 깜박이듯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전자들의 존재 양태라는 것이다.


전자뿐이 아니라 원자핵 또한 쪼개 보면 양성자 등 수많은 쿼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도 전자처럼 찰나생 찰나멸한다는 것이 오늘날 현대 물리학의 정설이다. 결국 존재를 그 근원부터 탐색해 본 결과 단단한 실체처럼 보이는 나무나 돌멩이도 실제로는 존재와 무 사이를 깜박이는 수 없이 많은 양자들이 모인 것이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슨 놈의 이야기가 중국집에서 시작하여 실존주의, 구조주의가 나오질 않나.. 노예 의지, 자유의지가 나오질 않나.. 그러다 양자 물리학까지 나올 필요가 있나 싶을 것이다.


나 또한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논리의 흐름이 그러한 것을..


처음에 우리는 자유의지인가? 아니면 단순한 반응에 불과한가? 를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자유의지처럼 느꼈던 것이 어쩌면 그렇게 밖에 선택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반응에 가까운 행위로 행해진 것이라면 그것을 진정한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논의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는 이미 철학사에서 실존주의자와 구조주의자가 1세기 전에 벌였던 논쟁이었음을 깨달았다.

논의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니 종교 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벌인 논쟁이 또한 비슷한 논지였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과학과 자유의지>


가뜩이나 복잡한데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미안하긴 한데.. 이왕 양자 역학까지 나온 마당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최신 이론 하나만 더 살펴보기로 하자.


최근의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는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려 준다. 우리의 선택이 사실은 선택이 아니란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벤지민 리벳 교수가 행한 실험에서 연구자들은 피 실험자들에게 스스로 원할 때마다 손목을 움직이라고 하고, 뇌전도 장치를 통하여 피 실험자들의 뇌파를 관찰했다. 실험 결과 연구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 낸다. 피 실험자들이 손목을 자발적으로 움직인 시각보다 최대 1초 전에 연구자들은 뇌파를 통해 미리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실험 결과가 놀라워 다른 여러 연구기관에서도 이를 검증하는 실험을 여러 차례 했고 점점 더 실험을 정교화한 결과 2008년에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행한 실험에서는 피 실험자들의 선택 여부를 7~10초 전에 미리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피 실험자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손목을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뇌 속에서 이미 결정된 선택을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제 자유의지 문제는 더 이상 철학자와 신학자들만의 형이상학적 논의가 아니다. 과학자들까지 측정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유의지의 문제를 논하고 있으니 말이다.


누구의 말이 옳은 걸까?


나는 목사로서 무엇보다도 자유의지론과 노예 의지론의 화해가 궁금하다.

루터의 노예 의지론과 궤를 같이하는 구조주의자들이.. 존재의 '무'에 대한 자각으로 실존주의자와의 화해를 모색했듯이..


노예 의지론을 신봉하는 우리 기독교인들도 인문주의자들의 자유의지론과 화해할 여지는 없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다는 소리다.


<자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사실 기독교만큼 자유에 대해 관심을 갖는 종교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공생애의 첫 사역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행하신 말씀이 자유에 대한 선포였다.

"...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누가복음 4:18)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우리가 앞서 논의해온 자유와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우리는 흔히 '자유' 하면 선택의 자유를 떠 올린다. 아마 가장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자유의 형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자유롭다고 해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자유로워도 정신적으로 억압받는다면 오히려 육체적인 구속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냐 노예의지냐 사이의 논쟁은 이렇게 '자유'라는 개념을 '나의 의지'.. 즉 '선택'의 문제에만 국한되어 생각할 때 초래되는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단순히 선택의 문제를 넘어 선 어떤 상태를 말한다.


어쩌면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란.. 지극한 만족, 기쁨, 평안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에 그 본래의 뜻이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자유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라면.. 이제 자유의지냐 노예 의지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사실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도 어색 해진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말이 지극한 만족과 평안의 상태, 즉 하나됨을 이룬 상태인 반면에 '의지'라는 것은 애초에 의지를 행할 주체와 그 대상을 전제로 하는 이원론적 사고의 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애당초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는 개념인 것이다.



이제 다시 짜장과 짬뽕의 선택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유였다. 짜장과 짬뽕 사이에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말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였던가? 결국 나의 기쁨, 만족을 위한 자유가 아니었던가? 짜장과 짬뽕을 제 아무리 자유롭게 선택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주지 못한다면 그러한 선택의 자유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노예 의지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은 과연 무엇을 위한 논쟁이었을까?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결별은 과연 무엇을 위함이었을까? 종교 개혁 당시 정말 필요했던 것은..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의지가 없다는 노예 의지론의 관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입장을 포기해서라도 얻어내야 하는 화해와 평화가 아니었을까? 노예 의지든 자유의지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장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연합의 정신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에게 자유가 의미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유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P.S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짜장과 짬뽕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나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있는...

'짬짜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의 대퇴부를 스쳐 오른쪽 후두부를 지나.. 뇌리 가운데... 너무 길었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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