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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May 25. 2021

코로나가 교회에 기회인 이유..

어 진짜?

모두들 코로나 시대에 교회의 위기, 목회의 위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히려 이 땅 가운데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상황에서는 남들 따라 우왕좌왕하기 보다는 오히려 가만히 물러나 앉아 본질적인 측면을 생각해 보는 것이 현명한 모습일 것입니다.  우선은 코로나로 인해 <변하는 부분>과 <변하지 않는 부분>을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목회에 있어서 (코로나로 인해) 변하지 않는 부분은 당연히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복음의 내용, 예수님의 구원 사역, 진리 등 본질적인 부분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 진리를 전하는 방식은 늘 변해 왔습니다. 오히려 각 시대마다 진리는 늘 변화의 흐름을 타고 이전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에 더욱 효과적으로 전파되어 왔습니다. 즉 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회피하지 않고 순응할 때마다 오히려 폭발적으로 부흥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사실 코로나로 인한 변화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닙니다. 이 변화는 이미 예견되어 왔고 또한 충분히 대처 가능한 변화입니다. 실례로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 모두가 힘들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존, 유튜브, 넷플렉스, 네이버, 카카오 등등 수많은 기업은 오히려 코로나 시대에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이들 기업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한결같이 변화의 물결을 예견하고, 준비했으며 그 변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올라탔다는 것입니다.


이들 기업에게 코로나로 인한 변화는 단지 예견된 미래가 단지 조금 앞당겨진것에 불과합니다.


변하는 것은 늘 변해왔다

혹자는 교회는 이러한 사회의 변화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진리는 변하지 않을지언정, 진리를 전하는 방법, 진리를 담는 그릇, 형식은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늘 변해 왔습니다.


구약시대 이후 예수님 시대까지 진리는 늘 케리그마로 선포되어 왔습니다. 선택된 소수의 선지자를 통해서 생생한 육성으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등장하면서 진리의 말씀은 문자로 필사되어 전파되었습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교회들이 바울의 필사된 서신들을 회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비록 옥중에 갇혀 있더라도 그가 전한 복음은 필사된 서신들을 통해 구석구석 더 넓은 지역에 전파되었습니다.


성경의 필사는 주로 양피지에 두루마리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어마어마한 수고와 비용이 드는 작업이었습니다. 필사된 성경 전권을 소유하려면 아마도 일개 개인이 상상할 수 도 없는 액수의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 당시에는 성경을 가지고 있는(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권력과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교회는 그 권위를 이용해 진리를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듯이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진 권력은 당연히 부패하게 됩니다. 중세 교회의 부패가 끝자락까지 왔을 때 하나님의 섭리 아래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잘 아시다시피 종교개혁의 원동력은 인쇄혁명이었습니다. 그동안 소수에게만 허락되었던 성경이 이제는 값싸게 인쇄되어 누구라도 성경을 소유하고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쇄 미디어 시대에는 더 이상 '성경의 소유'에 권위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성과 논리를 가지고 말씀을 힘 있게 설파하는 사람에게 진리 전파의 권위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종교 개혁 이후 우리들(혹은 우리 아버지) 세대까지가 이 시대에 속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시대의 변화를 거치며 교회는 점점 더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영상 미디어 시대로 변했습니다.  이 시대는 어릴 때부터 TV를 보며 자라난 영상 미디어 세대들이 주축을 이루는 시대입니다. 논리보다는 감성이 주도권을 가지는 시대입니다.


시대적 변화에 눈을 뜬 사람들은 더욱더 발전하며 혜택을 누리게 되지만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뒤떨어지거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실제로 천주교 바티칸에서는 1970년대부터 이미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고 영상과 미디어 부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천주교는, 종교 개혁 당시 부패 척결의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늘날 '신부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청렴하다'인 반면, '목사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개독교' '먹사' '믿슙니다'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시대는 또다시 변화하여 영상 미디어의 시대를 지나 소셜 미디어의 시대로 변화했습니다.  

소셜 미디어 시대의 키워드는 참여, 공유, 공감입니다.


소셜 미디어 시대는, 개인과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시대입니다.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던 주체가 사라지고 개개인의  참여와 공감, 리액션(반응)이 중요해진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고 그 변화에 적응하는 소수는 또한 살아남을 것입니다. 실제로 첨단의 기업들은 앞다투어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탑니다. 페이스북, 유튜브, 구글이 이 시대를 주도하는 것은 이들이 개개인의 좋아요 버튼과 검색 기록에 따라 그들을 참여의 주체로 대접해 주기 때문입니다. 수십 억 명이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지만 어느 누구도 동일한 화면을 보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의 취향에 맞는 화면을 볼뿐입니다.



어떻게 변화하느냐 vs 왜 변화하느냐

이렇게 기업들은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변화에 적극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지닌 본질, 즉 이윤 추구라는 자본주의적 기업가 정신에 있어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서.. 변하지 않는 것(이유 추구)을 지키기 위해, 변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대면 예배를 금하자 교회는 너도 나도 온라인 예배를 합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예배를 생중계합니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합니다.


변화의 본질을 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서 설교하다가 유튜브로 설교한다고 변화의 흐름에 동승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변화는 그 형태보다는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변했느냐 보다는 그 변화가 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변화는 오히려  본질을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어납니다.

즉 본질을 지키기 위해 (내용을 지키기 위해) 형식이  계속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기업들은 <이윤 추구>라는 기업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변화에 민감할 뿐입니다. 만일 변화하지 않더라도 기업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면 그들은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교회가 변화에 동승하려는 것도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변함없이) 온전히 보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마치 새 포도주를 온전히 보관하기 위해 새 부대를 찾듯이 말입니다.


필사 미디어 시대에는 필사된 성경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진리의 보존과 전파에 유용했습니다.


인쇄 미디어 시대에는 진리에 대한 이성적 탐구와 설명이 복음 전파에 기여를 했습니다.


영상 미디어 시대에는 화려한 영상 언어가 복음과 진리를 더욱 풍요롭게 했습니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는 그렇게 시대를 거쳐가며 사회 속에 풍부히, 그러나 부스러기로 녹아있는 진리와 복음의 조각들을 서로서로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끼워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복음에 참여시킬 것인가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더 이상 진리를 접하지 못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변에 널려있는 그 진리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공명하지 못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전에는 메시지를 듣지 못해 한 몸 됨을 이루지 못했다면, 이제는 메시지를 공유하지 못하면 한 몸 되지 못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어느 교회가 “우리 교회는 코로나로 이러이러한 결정을 했습니다”라고 결정했을 때, 그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결정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결정을 하기에 앞서 먼저 의견을 묻고 서로 조율해 가며 그러한 결정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성도들과 함께 공유했다면.. 어떤 결정을 하든(예배를 대면으로 하든 비대면으로 하든..)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공유와 공감과 참여의 과정이 없이 그저 <선포된> 결정에서 비롯됩니다. 이 부분이 예전과 달라진 부분입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의 시대에는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 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면

소셜미디어 시대, 4차 혁명시대에는 <어떻게 복음에 참여시킬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이 부분이 변화의 핵심입니다.


단순히 유튜브로 예배를 생중계한다고 변화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의 핵심을 깨달아 성도를 복음에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을 깨닫는다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에 동참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들의 손에 스마트폰이라는 마법의 도구가 들려져 있습니다.

이전 시대에 우리는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성도의 문 앞까지, 거실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의 시대에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성도의 침실과 화장실까지 침투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전 시대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너무나 많은 물리적 제약이 있었습니다. 모여야 하는 장소, 건물이 필요했고, 시설과 자본과 노동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4차 산업 혁명은 이러한 제약의 많은 부분들을 없애 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몸집이 작은 교회가 더 유리한 세상이 온 것입니다. 4차 산업 시대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은 TV 보다는 스마트폰을 더  많이 시청합니다. 이제는 막대한 자본이 아니라 창의성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야말로 자본의 능력이 아닌 믿음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코로나가 목회의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교회 정화의 기회

코로나로 인해 다들 교회가 위기라고 하지만 저는 지금 코로나는 오히려 기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나아가 저는 코로나가 참된 교회를 가려낼 수 있는 정화의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실 (교회에)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은 4차 산업의 물결을 타고 들어오는 세상 문화의 유혹일 것입니다. 넷플렉스와 인터넷 앞에서 굳건히 맞설 개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와는 비교도 안될 풍요와 유혹이 1세기 팍스 로마나 시대의 유혹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이 제공했던 번영과 평화는 지금의 인터넷, 넷플렉스와는 비교도 안될 실제적인 자유, 평화, 풍요였기 때문입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피 튀기는 생생한 검투사들의 결투를 단지 스크린 화면 속의 캐릭터와 어찌 비교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유혹의 시대에 오히려 교회는 더 성숙해졌고 더 단단해졌으며 더 빛났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제도와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진짜 교회, 유기체적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닥쳐오면 단단해지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뿔뿔이 흩어진다면 그것은 애초에 교회가 아니라 이익 집단이요, 조직이며 제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가 아니었던 것이 교회의 이름으로 서 있었다면 교회의 간판을 내리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진짜 교회는 참여와 공유과 공감이 가능한 유기체적 공동체 모임입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는 가능했지만. 로마 국교화된 후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

참여, 공감, 공유의 교회의 본모습을.. 오늘날 4차 혁명시대에 다시 되살릴 수 있기에

코로나 위기는 분명 기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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